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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랑데부 미술관 (큰글자도서)
채기성
나무옆의자 202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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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원 큰글자도서

책소개

목차

어쩌다 부암동
발끝에 매달린 것
보이지 않는 젊음
다정한 눈빛으로 말해요
위로의 맛
투명하고 반짝이는 몸짓으로
단 하루의 전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니까요
긍정이 징크스
흔적을 지워주세요
눈에 띄는 일
소중한 걸 잃고서
잃어버린 소리의 느낌
인생의 폼
계절의 변화
오늘 하루 쉬는 날
뜨거운 게 좋아요
여러분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얼굴을 찾아서
사는 게 다 화나는 일투성이라고요?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일
별 헤는 밤의 언덕에서
랑데부 미술관
다시 봄이 찾아오면요
작가의 말

저자 소개1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앙상블」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장편소설 『언맨드』로 제17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22년 장편소설 『반음』으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2025년 『못갖춘마디』로 제23회 사계절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2024년 첫 소설집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 장편소설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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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7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196*290*30mm
ISBN13
9791161572369

책 속으로

“혹시, 윤호수 씨 되세요?”
직원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호수를 알아보고는 다가오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삽시간에 긴장한 호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첫 출근이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학예연구원 손다미라고 해요.”
여자가 손에 든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망울, 야무져 보이는 입매, 긴 머리를 뒤로 한데 묶은, 언뜻 봐도 다부진 인상의 여자였다. 여자를 따라 인사를 하고 나서 호수는 왠지 기운이 쇠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아나운서라는 하나의 길만을 좇다 이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 듯싶었고, 어쩐지 난파된 뒤 길을 잃어버린 배 위에 올라탄 막막한 심정이었다.
--- pp.10-11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잃어버린 젊음을 그림으로 보고 싶소. 그런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매일매일 봐야 하는 이 지긋지긋하게 늙고 주름진 얼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진 생기와 젊음이 내게도 있는지 보고 싶소. 다 늙은 고약한 영감이 된 거울 속 내 모습을 그림으로는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그럴 거면 말고요. 다만 내가 가진 생기와 젊음을 그려줄 수 있다면, 보여줄 수 있다면 그려주시오. 제발 보여주시오! 사연 신청자, 김춘호’
--- pp.39-40

길을 걸으며 호수는 전선들 사이로 멀찌감치 내려다보이는 차도를 바라봤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저 도심 한가운데의 빌딩 숲속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호수의 머릿속에 클립처럼 꽂혀 저장되어 있었다. 오전이면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기 위해 매장 앞에서 줄을 서고, 점심을 먹기 위해 빌딩 밖으로 쏟아져 나온 인파를 헤치고 식당을 찾아다니며, 일에 치여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후 저녁이면 퇴근한 사람들로 인해 비어버리다시피 한 빌딩 숲 사이의 공허를 호수는 동경하는 것이었다. 호수가 입사하고 싶었던 방송사들이 하나같이 그런 지역에 있기도 한 탓이었다. 그런 지역에 비해 부암동은 지나치게 한적한 동네였다.
--- pp.56-57

그런 그를 토닥여주는 건 가끔 마주치는 청소부 할머니였다. 건물 내외부를 청소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텐데도 항상 호수를 만나면 “호수 청년, 호수 청년” 하며 나긋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했다. 오 실장은 호수에게 종종 핀잔 비슷한 말투로 왜 그렇게 피곤해 보이냐고 하거나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전보다 표정이 밝아졌네.”
대개 첫마디부터 늘 기분이 좋아지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그래요, 할머니?”
호수가 반색하며 되묻자 할머니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소리 죽여 말했다.
“나 같은 노인도 여기 취직하자마자 진작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게 벌써 이 년이 넘었어. 잘 버텨봐, 호수 청년.”
--- p.83

‘선해주 님의 사연에서 문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느껴졌어요. 그립고 보고 싶은 대상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전 몹시 부러웠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저의 부모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시거든요. 지금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던가요. 돌아가신 부모님을 어떻게 해서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저는 종종 허무해지거든요. 갖고 있는 사진 하나 없다는 해주 님의 아버지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꽤 오래 고민하고 망설였습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이더군요. 해주 님의 사연에 제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은 오로지 한 가지 형식밖에는 없었습니다. 만남, 그 자체 말입니다.’
--- pp.93-94

‘그래서 말인데 아무 문신도 그려지지 않은 저를 한번 그려줄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상태의 문신을 모두 지우는 건 도무지 불가능하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상징적으로나마 내게 남은 흔적을 지우고 싶습니다. 그 모습을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쩌면 제 문신을 보고 작가 양반도 기겁할 수도 있겠네요. 이런 건달의 사연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부탁해봅니다.’
--- p.133

‘새소리, 수업 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 알람음,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악보 속의 멜로디. 그것들을 모두 제 목소리로 표현한다는 게 어린 나이에도 너무 신나고 좋았어요. 언제나 노래 실력을 뽐내는 아이였어요. 그때부터 꿈을 키워 뮤지컬 배우가 되었고 수년 만에 마침내 주연 역할을 맡았죠. 하지만 거기까지였어요. 성대결절이 저를 꿈의 바로 문턱에서 좌절시켰거든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느낌을 아세요? 궤도를 잃고 우주를 떠도는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지금은 제 안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 무서워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거친 소리를 낼까 두렵고요. 분명히 머리는 어떤 음을 노래해야 할지 알고 있는데, 정작 소리를 낼 수 없는 답답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일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저는 그토록 사랑하는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제가 꿈꿨던 주연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걸 바라보며 제 마음은 무너졌고요. 그 이후로 전 어떤 소리도 싫어졌어요.’
--- pp.174-175

“미술관 오셨어요?”
덩치가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에 수염이 턱 주위로 까슬까슬하게 뻗친 한 남자가 미술관 입구에서 물었다. 가만 보니 익숙한 브랜드 로고의 점퍼를 입은 택배 배송기사였다.
“그런데요?”
“왜 안 들어가고 서 계시나 해서요.”
남이야 들어가든 말든 웬 참견이냐며 대꾸라도 할까 하다 영은은 꾹 참았다.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인가 보고 있어요.”
“들어가도 되죠.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요. 미술관이 사람 가리는 것도 아닌데. 전, 여기 전시 작품 바뀔 때마다 다 보고 다니는걸요.”
영은은 남자를 핼끔 쳐다봤다. 미술 쪽에는 전혀 취향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말에 영은은 괜스레 용기가 솟아올랐다.
--- p.208

“영서야, 내 얼굴을 그려달라는 게 무슨 말이야? 이거 사기 아냐? 영서야 너 요즘 같은 세상에 함부로 가족 정보 팔고 다니면 안 돼.”
“사기는 무슨 사기야, 내가 그냥 아빠 얼굴 그려달라고만 했는데.”
“그러니까 아빠 얼굴을 할 일 없이 왜 그려달라고 하냐고. 그걸 또 누가 그려주기나 한대?”
“응. 아빠가 화만 내니까 아빠 선한 얼굴 좀 찾아달라고 했어. 아빠도 아빠 선한 얼굴 어떻게 생겼는지 미술관 가서 좀 봐.”
--- pp.248-249

천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그림이 희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전시 벽면에서 분리된 그림은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트레이싱지처럼 반투명한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맛살의 주름이 도드라지고 입매가 비뚤어져 짜증을 내는 듯한 얼굴. 그림을 보며 희준은 이게 내 얼굴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 고개를 기울여보자 그림이 있던 자리에 또 다른 그림이 있었다. 희준은 버튼을 누르고 다가오는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성이 난 듯 치켜올려진 눈썹, 부릅뜬 눈과 포효하듯 크게 벌린 입, 날카로운 눈매, 그 옆에 새겨진 잔주름들이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누가 봐도 화를 내는 모습이 분명한 희준, 자신의 얼굴이었다.

--- p.256

출판사 리뷰

우주에 하나뿐인 존재들이 모여든 그곳에서
잊고 있던 겹겹의 내 얼굴을 마주치다

해마다 반복되는 시험과 낙방에 지친 호수는 미술관 업무를 위한 아무런 조건도 못 갖췄다고 여겨지는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들여졌는지 알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다. 취업뿐 아니라 가족관계를 비롯한 일상 전반이 무너진 상태였던 그는, 자신의 내밀한 고민과 소원을 털어놓는 방문인들의 이야기를 미술작품으로 만나면서 서서히 변화해간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들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고, 자신의 적성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다른 이들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알게 된다. 그러나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은 호수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기에 등장한 모든 사연 신청자들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즉 잃어버린 젊음을 그림으로 보여달라는 칠십 대, 오랫동안 인연 끊고 지낸 아빠 얼굴을 그려달라는 스트리트 댄서. 문신을 지워달라는 조직 폭력배, 성대결절로 첫 뮤지컬 주연을 포기한 가수, 어머니의 반대에도 국밥 장사를 하고 싶다는 전직 야구선수. 세상이 화나는 일투성이라는 젊은 가장과 그 주변 사람들, 나아가 작품을 만드는 정체불명의 미술관 작가까지 서로 바라보고 다독이며 물들듯, 이 ‘마법의 성’ 같으면서도 소박한 문화 공간에서 치유와 성장을 이뤄간다. 복잡한 도심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 단출한 미술관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여러 주인공들에 우리도 속해 있음을 책장을 넘기며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속도와 효율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일상은 수많은 정보와 디지털 콘텐츠, SNS로 둘러싸여 있다. 오프라인에서 진정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은 여백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 속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가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관계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_‘작가의 말’에서

“어떤 마음의 이야기든 꺼내어 들려주세요.
당신의 사연이 작품이 됩니다.”

호수는 출근 첫날부터 미술관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다.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사적인 예술 공간’이라고 소개된 ‘랑데부 미술관’에는 관객과의 ‘소박하지만 운명적인 조우’를 위해 특별한 것을 마련해두었다. 자유롭게 감상을 적는 ‘방명록’이 있고, 관람 후 자기만을 위한 미술 작품을 신청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사연의 방’도 있다. 단 한 사람의 사연으로 제작한 단 하나의 작품만 전시되는 미술관에 어떤 사연이 들어와 있을까?

인생을 걸었는데도 실패했습니다. 희망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까요?

호수는 이 문장 아래 적힌 사연을 읽어내려간다. 직장 생활로 모은 돈으로 창업해 이끌어오던 카페를, 근방에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들과 재료 가격 상승 등으로 결국 폐업하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읽고 난 호수는 곧 작품으로 눈길을 돌린다. [저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라는 제목에 덧붙여진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구르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설명에 따라 호수는 작품으로 설치된 자전거의 페달을 땀이 나도록 굴리고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나타난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저는 당신의 자아입니다. 당신이 힘을 내는 동안만 목소리를 낼 수 있죠. 그러니 조금 더 힘을 내주시겠어요? 왜냐하면 꼭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거든요.”

목소리가 관람객 호수에게 간간이 말을 걸며 독려하고, 비바람을 맞거나 언덕길을 오르는 듯한 설정 환경을 한참 지난 끝에 모니터는 한 문장만을 남기고 암전된다.

‘희망은 제가 발견했어요, 당신 발끝에서.’

호수는 그 글에 아련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지난 6년간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언젠가는 잘될 거야 같은 비교적 성의 없는 응원과 걱정스레 다른 걸 해보면 안 되냐는 염려뿐,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었고,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암담한 시선에 몸을 움츠리곤 했다. 점점 호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걸 주저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일터가 된 이곳 랑데부 미술관에서 ‘희망’이라는 낯선 두 글자를 만났다. 그는 한편에 마련된 방명록을 넘겨본다.

-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희망인지 모르겠어요. 절망이 모든 걸 가리니까요. 그런데 일단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리고 발을 굴러 페달을 밟아볼게요.
- 사랑이 큐피드가 이어주는 거라면, 희망은 자기만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아요. 그게 어렵잖아요. 자신에게 잘 대해주기가요.
- 힘드시죠. 그 마음 저도 알아요. […] 저도 수도 없이 좌절한 후에도 일어섰어요.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시기를.

방명록 옆 ‘사연의 방’에 들어가보니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고 사연을 넣는 함이 따로 있다. 순간 사연을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은 자신이 없다. 마침 바깥에서 분무기와 마른걸레를 든 청소부 할머니가 호수를 향해 참 여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라고 말을 걸어온다.

“요즘 사람들 아니다 싶으면 쉽게 뒤돌아서기도 하잖아요. 너무 조급해하고 또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 “그런데 새로 오신 분은 안 그럴 거 같아.”

청소부 할머니의 미소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호수는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웃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더 일해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날 이후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면서 사연 신청자와 소통하고, 또 한 명의 관객으로서 작품을 맞닥뜨리고, 방문객과 사연 신청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을 깊이 배려하는 오영균 학예실장과 학예연구원 손다미를 바라보며 호수는 삶이 무엇인지,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나간다. 그리고 계절이 몇 번 바뀐 후 이 모든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누구인지도 비로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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