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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길은 여름으로 (큰글자도서)
채기성
나무옆의자 202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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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원 큰글자도서

책소개

목차

눈 오는 길
경모와 해원
해원과 해령
말 없는 아이
마주침
세정과 해원
해령과 연서
경모의 기도
세정이 해원에게
해원의 일들
세정과 정욱
경모의 여름
해령의 마음
오래전의 편지
세정의 사명
자전거
라디오
그 여름의 일
기대 없이 사는 일
연서의 시선
뒷모습
빈자리에 남은 것
셋의 낮과 밤
Delivery Failure Notice
시간 속에 머무는 일
이어지는 삶
해령과 해원의 계절
5개월 후, 여름

작가의 말

저자 소개1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앙상블」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장편소설 『언맨드』로 제17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22년 장편소설 『반음』으로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2025년 『못갖춘마디』로 제23회 사계절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2024년 첫 소설집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 장편소설 『부암동 랑데부 미술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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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12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322쪽 | 200*296*30mm
ISBN13
9791199393493

책 속으로

“뭐라고 했어?”
“아냐, 아무것도.”
뒤에서 들려온 해원의 물음에 경모는 말을 얼버무리며 갑자기 생겨난 마음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온통 번들거리는 낯설고 희디흰 빛의 무늬와 같은 흔적이었다. 달뜬 마음이 되어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그처럼 부끄럽고 내밀한 일인지 경모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 무관하게 지금 자신이 인생의 어떤 한 순간을 통과한 것처럼 경모는 느꼈고, 그 느낌이란 더 이상 바로 전의 자신과 같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 p.27

경모에게 기도는 삶의 한 형태였다. 신의 존재는 교감과 실천을 통해 증명되는 거라고 경모는 늘 생각해왔다. 특별한 형식 없이도 일상의 매 순간에 스며든 기도를 통해 경모는 신의 뜻이 자신을 통해 육화되기를 갈망했다. 그런 기도가 결국 자신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는지 모른다 여기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따져 올라가다 보면 결국 그 맨 앞에는 해원이 있었다.
--- pp.56-57

어린애라고는 없는 마을에 아이가, 그것도 울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갓 태어난 아기 울음소리도, 자라나는 아이들도 찾아볼 수 없는, 사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가 올 거라는 얘기를 심심찮게 농담처럼 주고받는, 더 이상 다음 세대란 존재하지 않게 될, 그런 소멸을 그저 버텨내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다.
--- pp.76-77

둘이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그나마 겨울의 적막을 견디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해가 지면 진한 먹색으로 몇 번이나 덧칠한 것처럼 두터운 어둠이 집 안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서서히 번져갔다. 차가운 고요와 통증처럼 감각되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온기가 필요했다. 따뜻한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함께 사는 사람이 있다는 실감이 해령에게는 어쩐지 절실했다.
--- p.78

간밤에 서로를 가르느라 사용된 날카로운 언어들이 차고 눅진한 공기 중에 눌어붙어 있는 듯했다.
--- p.123

지난밤의 불행은 아침에 먹은 콘플레이크 속에, 거울 속 부쩍 늘어 보이는 얼굴의 기미 속에, 출근하자마자 만난 상사의 뾰족한 눈 속에,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빈틈없이 섞여 있었다. 마치 바위를 뒤덮은 무성한 초록의 이끼처럼. 불행은 이끼와 같아서 한번 생기면, 그 일대를 모두 포식하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아 하는 듯했다.
--- p.124

“우리는 같은 상처를 지녔네……. 무슨 훈장 같다.”
해원이 손을 뻗어 경모의 상처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경모 스스로는 위무할 수 없던 상처였다. 흔적조차 혐오스럽게 여기던 상처. 무모함으로 해원을 다치게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기록이었던 그 상처를 해원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 p.142

두 자매 사이의 거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황폐하게 멀어져, 언어는 서로의 폐부를 건드리고, 화석화된 감정을 긁어냈으며, 의도를 달리 해석하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여기는 일이 빈번해, 종종 마주치는 것만으로 그들은 아웅다웅하거나 서로를 견디지 못해 했다. 조금씩 침전되어 켜켜이 쌓인 과거의 시간 속에 높다란 성을 만들어놓고 그 뒤에서 두 자매는 늘 서로를 경계했다.
--- p.147

세기와 열기를 잃은 노르스름한 빛이 정욱의 얼굴에 쏘아 들었다. 정욱의 얼굴로 스며든 소멸할 듯 약한 빛 위로, 한 인간의 곤궁함과 나약함이 존재를 드러내며 동시에 떠오르는 듯했다.
--- p.157

페달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오래된 자전거를 모는 정욱의 뒷모습에서, 세정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오래전 기억과 상념을 환등기로 영사하듯 떠올렸다. 그건 청년 시절의 무모함이 깃든 정욱의 모습이기도 했고, 어딘가 세정 자신이 잡아줄 곳이 존재했던 그의 연약함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한때 그런 그를 지켜주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 한 조각이기도 했다.
--- p.184

교통방송을 들으며 잠이 드는 엄마의 밤과 밤새 전원이 켜져 있었을 라디오를 해원은 상상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퇴근길 차들로 가득한 서울의 도로를 걱정하고, 늦은 밤 한산한 도로 상황에 비로소 안도하는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차갑고 예민한 딸들에게 엄마는 그렇게밖에 닿을 수 없었을 것이다.
--- p.192

숨을 고르며 가만가만 얘기를 나누다 어느새 잠이 들곤 하던 어린 시절, 먼저 깜박 잠이 든 아이에게 잠들지 않은 아이의 말소리는 멀리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다림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서로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던 밤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안방에서 밤새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즈음 해원과 해령은 사춘기가 되었고, 어느새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밤을 이겨냈다. 각자의 속마음을 감춘 채 침묵을 지키며 밤을 지새우던 그 무렵부터 어쩌면 엄마에게도 두 딸은 먼 기다림이 되었을지 몰랐다.
--- p.199

- 상처는 괜찮니?
- 괜찮아.
엷은 웃음을 짓던 해원.
- 괜찮은데 안 괜찮아. 그냥 꼭 블랙코미디 같아.
- 나도 이제 괜찮아.
어깻죽지의 상처를 내보이던 경모.
- 우리, 같은 날 생긴 상처.
묘한 동질감과 내밀한 감정이 들숨과 날숨으로 뱉어지던 여름.

--- p.243

출판사 리뷰

기억 속에 봉인된 과거의 날들
찬란한 만큼 아프게 부서졌던 우리들의 여름

고등학생이던 해원과 경모는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다. 파업으로 버스가 다니지 않는 하굣길, 해원이 경모를 불러 세웠기 때문이다. 집까지 태워달라고. 같은 마을에 사는 해원과 경모는 얼굴만 알 뿐 말을 나눈 것은 그날이 처음이다. 핸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전거 때문에 망설이던 경모는 급하다는 말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해원을 태워 집으로 달리지만 결국 우려대로 사고가 나고 만다. 내리막길에서 휘청이던 자전거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것이다. 그 일로 경모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해원을 온전한 상태로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날 해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후 해원과 경모는 다시 성당에서 마주치고, 일주일에 한 번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며 낯선 감정을 키워간다. 어느 날,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는 바람에 집으로 가는 지름길인 덤불숲으로 들어선 둘은 ‘그날의 일’에 대해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자전거가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바람에 해원은 발목에, 경모는 어깨에 생긴, 다른 자리의 같은 상처에 대해. 해원이 경모의 어깨 위 상처를 어루만지는 순간, 그것은 증오의 기록에서 훈장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낯선 감정을 키워가던 둘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멀어지고, 경모는 수사가 되어 스페인의 수도원으로 떠난다. 얼마 후 집에 들른 경모는 해원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족까지 끊어내겠다 선언하며 한국의 짐을 모두 정리한 뒤 다시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러고 7년, 고향인 군에서 지원하는 이주민지원센터에서 해원과 경모는 속절없이 마주치고 만다.

소멸해가는 고향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
고통과 혼돈 속에서 찾아가는 간절한 기도와 위안


해원이 고향인 가흘면으로 돌아온 것은 이혼 후 생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생을 남편의 의처증과 폭력에 시달리는 엄마를 보며 자란 해원은 몇 가지 굳게 다짐한 게 있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것. 동생인 해령만큼은 폭력 앞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 두 사람에 대한 마음이 클수록 해원의 언어들은 더욱 가차 없어진다. 자신의 이혼을 반대하는 엄마를 향해 언어라는 칼을 곧추세우곤 사정없이 그어 내렸다.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연애를 하는 해령을 향해서는 날카롭게 벼린 표창을 던졌다. 그러나 해원은 죄책감을 해소할 길이 없다.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고, 해령과의 사이에 쌓인 높다란 성벽은 허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원이 이제 마음을 다할 수 있는 대상은 이주민지원센터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뿐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과하게 몰입하고, 당사자보다 더 분노하고, 관련기관을 찾아가 생떼 쓰듯 해결을 요구하는 해원은, 그래서 더 경모에게는 위태로워 보인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안식년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 경모는 이주민지원센터에서 일하며 해원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지우고 싶은, 지웠다고 생각한 그 여름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자기 안의 감정을 지칭하듯 고백했던 경모는 결국 해원을 배신하고 수사가 되어 스페인으로 떠났다. 해원에게는 한마디 설명도 없이. 마지막 만남 이후 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은 줄 알았던 그 여름의 빛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고, 도려내지 못한 채 시들었던 감정은 또다시 불꽃처럼 피어나 경모를 당황케 한다. 그리하여 경모는 한 번 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이제 스페인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안식년 휴가를 끝내고 수도원으로 돌아간 경모는 자신의 다짐처럼 모든 연락 수단을 끊어버린다.

“아낀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아?
좋은 마음이 깎여 나가지 않게, 그 마음을 지켜주는 거야.”


해령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다니던 병원에 한 달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상처 내기 바쁜 언니 해원이 이미 엄마 집에서 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해령에게는 쉴 곳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곳이 필요하다. 현재 해령은 아무런 의욕도 없이 무기력의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는 중이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땐 그렇지 않았다. 엄마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채찍질했다. 엄마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았으며, 엄마의 의지에 기대 한 발짝 한 발짝 지친 몸을 이끌고 힘겹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해령은 마을 초입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다. 돌아가신 할머니 집에 버려진 아이, 연서. 연서를 데리고 왔던 아빠는 현재 실종 상태다. 연서는 아동일시보호소로 보내지고, 해령은 자주 연서를 만나러 간다. 불안 때문에 툭하면 말문을 닫는 아이, 두려움 앞에 웅크리고 앉은 연서가 꼭 자기 자신처럼 느껴져서다. 해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서의 위탁부모를 신청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연서에게 다른 시간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하지만 위탁부모가 되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해령은 연서에게 완전한 가족을 만들어줄 수 없는 싱글이기 때문이다.

세정과 정욱은 고향인 가흘면으로 돌아온 뒤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툼을 벌인다. 군청의 별정직 공무원인 정욱에 반해 리조트에서 3교대로 일하는 세정은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생활의 균형을 원하는 정욱에게 세정은 대출금을 갚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논리로 맞선다. 그들 부부가 기어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정욱이 연서의 위탁 문제를 꺼냈을 때다. 연서를 데려와 키우자는 정욱과 반대하는 세정. 그런 세정을 가혹하게 몰아세우는 정욱. 정욱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세정은 마침내 이혼을 결심한다.

인간에게 타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오랜 질문에 대한 깊은 사유로서의 소설

『우리의 길은 여름으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각 타인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고도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미처 돌보지 못한 마음 혹은 의도를 빗나간 결과 때문이다. 누군가는 매일 타인을 떠올리며 후회하고, 또 누군가는 매일 그를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타인을 위해 떠나고, 또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인간에게 타인이란 어떤 존재일까에 대한 거듭되는 사유에 다름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존립할 수 없고 반드시 누군가의 돌봄을 통해서만 성장을 시작해야 하는 인간에게 타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인간의 삶은 타인으로 인해 채워지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라는 굴레 안에서 상처받으면서도 기대와 사랑으로 삶을 채워가는 건 아닐까. 때로는 타인과 불화하면서 또 때로는 타인에게 헌신하면서,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꽤 오래전부터 해온 생각을 이 소설에 담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선명한 이미지와 내밀한 열기로 가득한 이 소설이 어쩌면 잊고 있었을지도 모를 ‘당신의 여름’으로 데려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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