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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가우디 서거 100주년 기념판
가우디 서거 100주년을 맞아 탄생한 역작. 스페인 내전으로 소실된 기록들을 추적해, 신화와 전설 뒤에 가려졌던 가우디의 삶과 사상을 복원해냈다. 가우디가 건축을 통해 어떻게 신에게 가닿고자 했는지, 그 여정을 따라갈 수 있는 책.
2026.05.29.
소설/시 PD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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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추천의 글 레우스에서의 유년기, 소년기, 십대 초반 (1852~1868) - ‘레우스 출신’의 탄생 - 리우돔스 출신이라는 견해 - 가족의 집 - 세례, 견진성사 그리고 영성체 - 영감의 원천이 된 교리서 - 레우스에서 보낸 어린 시절 - 십대 초반의 청소년기 - 바다와 공간 - 포블레트 수녀원 설계 계획 - 레우스의 사회 바르셀로나에서의 학생 시절 (1868~1878) - 증등학교와 과학부 (1868~1874) - 주립 건축학교 시절 (1874~1878) - 초기 작업 건축가로서 활동의 시작: ‘대성당’의 꿈 (1878~1883) - 레우스 원고 (1878) -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1878~1885) - 가우디, 당대의 사회로 진출하다 - ‘위대한 성당’의 꿈과 ‘카사 파이랄’의 구상 사이에서 - “나는 결혼해야겠다는 소명을 느껴본 적이 없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영적 변혁으로 (1883~1898): 창의력과 내면 탐구 사이에서 - ‘대성당’의 시작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첫 번째 건축 시기(1883~1893) - 걷잡을 수 없는 창의성 (1883~1889) 카사 비센스 (1883~1889) 엘 카프리초 (1883~1885) 구엘 별장 (1884~1887) 구엘 저택 (1885~1889) - 내면 탐구 (1887~1893) 아스토르가 주교궁 (1887~1893) 간두셰르의 데레사 수녀원 학교(바르셀로나) (1888~1890) 보티네스 저택(레온) (1891~1892) 탕헤르 가톨릭 선교회 설계도 (1892~1893) - 위기와 영적 변모(1894~1898): 사순절의 단식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두 번째 건축 시기 (1894~1898) 폭발적인 창작에서 질병으로 (1898~1911) - 새로운 관점 - 상징적 관점 - 미학적 관점 - 바르셀로나에서 폭발한 창조력 카사 칼베트 (1898~1900) 베예스과르드 저택 (1900~1908) 구엘 공원 (1900~1914) 카사 바트요 (1904~1906) 라 페드레라(카사 밀라) (1906~1910) - 종교 건축에서 폭발한 창의력 콜로니아 구엘 교회 (1898/1908~1914/1918) 마요르카 대성당 복원 (1902/1904~1915)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세 번째 건축 시기 (1898~1911) -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가우디의 답변 - 파리에서의 성공과 심각한 질병 (1910~1911) 신비주의의 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우디의 유일한 목표 (1911~1926) - 친구들의 죽음 - 토라스 이 바제스의 영적 지도 - 조카딸의 죽음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네 번째 건축 시기 (1911~1926)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의 삶 - 생애 마지막 시기 가우디, 유일무이한 존재 - 사람과 작품 - 타인의 평가 - 가우디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았는가 - 성격, 태도 그리고 생활 습관 - 절제된 생활 - 이상 - 하느님과 하나 된 삶 - 얽매이지 않은 삶 - 유리 너머의 얼굴 세 개의 서명에 대한 에필로그 - 세 개의 서명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
Armand Puig i Tarr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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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는 기술이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고, 건축과 상징은 함께 어우러져야 하며, 모든 건 항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뜻과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실 상징은 독립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에, 어떤 역사에 기대고 있는지, 어떤 맥락에 속해 있는지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좌표를 잊게 되면 심각한 해석의 혼란이 초래된다.
많은 사람이 완전히 꾸며내거나 너무나도 경건하게 추측하거나 사상적으로 추론하여 가우디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가우디는 분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자기 작품을 엄격하게 해석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을 혼동하고 뒤섞어 서로 관련이 없는 요소들이 관계 있다고 추정하고 설정할 위험이 있다. 특정 요소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상징적 차이를 간과할 수도 있다. 마타로 노동자 협동조합 깃발에 있는 벌은 근면함과 공동 노동의 정신을 상징한다. 반면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에 새겨진 신앙의 문에서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서 피를 빨아먹는 벌들은, 아들의 죽음을 겪게 될 예수의 어머니가 겪는 고통과 고난을 상징한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거나 근거가 불충분하다면 가우디의 상징성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으며, 그의 강함과 미묘함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다. 조안 베르고스의 표현대로, 가우디라는 인물과 인품과 그의 작품, 그의 업적과 통찰력, 또한 그 기반을 이루는 모든 것에 접근하고자 한다. 방법론적 관점에서 이 책은 “소 앞에 수레를 놓지 않는다”라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가우디에 관해 깊이 연구하지 않거나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모든 것을 검증하지 않고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우디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특히 서른 살 이후에는 전혀 쓰지 않았다. 또한 1936년 그의 작업실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공방이 무정부주의자 대원들의 습격을 받으면서, 그의 메모와 도면, 스케치와 연구 자료, 작품 모형과 분필로 그린 그림을 비롯해 모든 게 불탔거나 파손되었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그의 작품과 종교적인 작품의 대부분은 보존되어 있으며, 이것은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역사적 자료의 도움을 받아 기록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자료들, 즉 가급적 그와 동시대의 자료들과 그의 작품 덕분에 가우디의 정신적·역사적 면모를 그려보려는 이 전기를 쓸 수 있었다. --- 서문 중에서 레우스 원고(1878) ‘레우스 원고’라고 불리는 가장 긴 문서는 바르셀로나의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는 1878년 8월 10일과 1878년 9월 22일이라는 두 날짜가 적혀 있다. 그리고 〈장식〉이라는 일반 명칭이 붙어 있다. 가우디는 그해 여름과 가을에 스페인어로 이 문서를 썼다. 아마도 그해 여름에 레우스나 리우돔스에서 쓰기 시작했을 것이고(첫 번째 부분은 8월 10일에 시작), 그해 가을에 바르셀로나에서 마무리했을 것이다(두 번째 부분은 9월 22일에 시작). 건축가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그는 건축가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원고에는 가우디가 첫 번째 건축 사무실(칼 거리 11번지에 위치함)에서 사용하기 위해 의뢰했던 책상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것이다. 이 원고는 장식에 대한 광범위한 생각을 적은 글이며, 시상 詩想 을 떠올리거나 무늬를 만드는 대상이나 주제의 표현으로 장식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 순수 조형 예술을 넘어 상징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우디는 외젠 비올레르뒤크 (1814~1879)와 그의 책 『건축에 대한 인터뷰』(1863)를 인용하며, 건축학교에서 엘리에스 로젠트의 수업에서 공부한 리옹스 레노, 제르맹 보프랑, 장 루이 뒤랑과 같은 저자들을 언급한다. 〈장식〉은 내용과 구조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쓴 글이라서 다소 반복된다. 그렇지만 이 글은 가우디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여기서 작가는 내면에 품고 있던 모든 걸 쏟아내어 글로 담아내고자 한다. 이 원고는 건축가의 과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개략적으로 선언한 것이며, 특히 건축, 조각, 회화 사이의 관계 설정, 색채의 존재 이유, 역사와 자연과 기하학을 구성하는 전체, 거리와 시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원고의 주된 주제는 ‘위대하고 훌륭한 교회’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이다. 가우디는 이것이 건축가의 이상이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라우라 메르카데르 는 1878년과 1883년 사이에 집필한 가우디에 관한 또 다른 글 〈성전 건축〉에서 “종교의 문제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모든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쓴다. 〈장식〉(1883년 11월)을 쓴 지 5년 후에 조세프 마리아 보카베야와 성요셉 신심회는 그에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을 의뢰하게 된다. 크고 훌륭한 교회 건축은 물체의 아름다움을 사전에 고찰하면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 형태에는 불필요한 요소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장식은 건물의 기능이나 ‘특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공공건물이나 종교 건물은 ‘중후함’, 즉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에레크테이온 신전처럼 ‘단순한 형태와 웅장함’을 가져야 하며, 개인 주택과 같은 개인 건물과는 달라야 한다. 종교 건물에서는 ‘종교적 성격’이 표현되는데, 종교의 목적이 신비이기에 그 성격은 가장 웅장하고 장엄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신비는 “피조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외의 하느님”의 신비이며, 그 하느님은 전능함으로 “수백만 수천만 개의 땅뙈기를 품으시고”, 그렇게 종교 건물 혹은 교회는 ‘피 흘리지 않는 희생’의 장소가 된다. 가우디는 희생의 개념을 구원과 성체성사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이 성사 속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의 희생이 피 흘리지 않고 자비롭게 실현된다고 보았다. --- 건축가로서 활동의 시작: ‘대성당’의 꿈 1878~1883 중에서 구엘 저택 (1885~1889) 구엘 별장 작업과 함께 안토니 가우디는 에우제비 구엘에게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지금의 노우 데 라 람블라 거리에 있는 400제곱미터(18미터×22미터) 부지에 후원자의 사회적·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웅장한 저택’을 짓는 일이었다. 구엘 별장에서 보여준 뛰어난 솜씨 덕분에, 가우디의 보호자이자 친구인 구엘은 가우디가 1888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를 찾을 방문객들이 감탄할 만한 저택을 설계할 적임자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실제로 박람회를 보러 왔던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와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저명한 귀빈들이 구엘 저택 El Palau Güell 을 방문했다. 저택은 1888년 봄에 만국박람회 개막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선을 보였지만, 공사는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초기 설계 도면은 1885년 여름에 완성되었지만, 최종 도면은 1886년 6월 30일에야 확정되었다. 가우디는 파사드를 스무 번이나 스케치했는데도, 현재의 파사드는 바르셀로나 시청에 제출된 최종 설계도와 차이를 보인다. 끊임없는 수정을 통한 완벽함의 추구, 즉 완벽주의는 가우디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구엘 저택은 모든 면에서 세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가 돋보인다. 한편 가우디의 작품에서는 창의력이 폭발하듯 드러난다. 가우디는 일관성과 끈기로 언제나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았다. 그 결과는 전통 안에서 혁신을 이루고 그래서 매우 독창적이다. 가우디의 손길이 닿은 모든 곳에는 그만의 개인적인 흔적이 남는다. 모든 건 관찰과 사색, 그리고 동화 작용의 결과이기에, 반복이 아니라 ‘되부름’만이 있을 뿐이다. 구엘 저택 건축에서 가우디는 목공 장인 조안 오뇨스와 철공 장인 에우달드 푼티 같은 뛰어난 장인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는 15세기와 16세기의 이탈리아 귀족 저택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파사드는 연한 회색의 다소 거친 돌로 제작되었고, 현수선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출입문은 카탈루냐의 문장과 그 위의 투구와 독수리로 장식되었다. 또한 뱀과 야생 장미 무늬는 연철로 되어 있고, 귀빈층은 유칼립투스 목재에 금박을 입힌 석조물이며, 응접실 발코니에는 베네치아식 목재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구와 집안 생활용품은 건축가 카밀 올리베라스가 협력한 것이었다. 이 모든 요소가 구엘 저택을 고급스럽게 장식되고 뛰어나고 독특한 건축적 해결책으로 돋보이는 장소로 만든다. 예를 들어, 건물에는 두 개의 출입문이 있어서 마차가 건물의 다른 쪽 문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비교적 협소한 건물 안에서 마차가 방향을 돌려서 나갈 필요가 없게 해주었다. 구엘 저택에는 마구간으로 사용된 돔 지붕의 지하층이 있는데, 이 공간은 옥상으로 이어지는 통풍관을 통해 환기되며, 나선형 경사로로 드나들 수 있다. 평 돔 천장 구조의 1층에는 관리실이 있고, 중이층에는 에우제비 구엘의 집무실과 서재가 자리한다. 그 위는 2층, 즉 귀빈층 또는 주요 층으로 거실과 주요 공간이 있으며, 3층에는 침실과 욕실이, 4층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숙소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상이 있다. 건물 구성은 중심 안뜰을 중심으로 배치되는데, 이 안뜰은 1층이나 중이층이 아닌 2층(귀빈층)에 자리하고 있다. 안뜰은 위로 돔 형태의 천정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꼭대기에는 원추형 첨탑이 솟아 있다. 건물 구조는 127개의 기둥(120개+7개), 그리고 천장과 아르테소나도와 같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요소들은 순전히 장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지지 기능을 담당하고 들보를 대신하기에 실제로 건물 구조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모든 것 때문에 구조적으로 가벼워 보여서, 건물 전체가 우아하고 거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으며,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건물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대연회실과 옥상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2층의 대연회실은 가로세로 9미터씩의 정사각형이며, 전체 높이는 약 18미터(정확히는 17.5미터)에 달한다. 두 개의 위층과 연결된 계단 맞은편에는 예배실이 있는데, 그것은 제단과 전례 용품이 있는 깊이 1.5미터의 작은 방이며, 두 개의 문으로 여닫게 되어 있다. 문짝에는 알레이스 클라페스가 열두 사도를 그려 넣었다. 예배실 옆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도 클라페스의 작품인데, 그중에서도 커다란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농부 가족의 그림, 철학자 하이메 발메스의 초상화, 그리고 특히 유명한 작품으로 에우제비 구엘의 아내인 이사벨 로페스와 그들의 딸 이사벨의 수호성인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트가 자기 왕관을 가난한 이에게 내어주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눈에 띈다. 정면에서 볼 때 예배실 왼쪽에는 중앙홀 높이까지 원래의 오르간 건반이 있다. 오르간 파이프는 4층에 설치되어 있고, 그 옆의 별도 공간에는 연주자들을 위한 발코니가 있다. 이 덕분에 대연회실과 오르간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즉, 예배실의 문이 열리면 성스러운 용도로, 닫히면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된다. 넓고 여유 있는 옥상은 건물의 남은 자투리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 한가운데에는 대연회실 위에 세워진 원뿔 모양의 중앙 첨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쌍곡포물선 형태의 내부 돔 위에 얹혀 있다. 둥근 돔 천장에는 타원형 창문이 있는데,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이중 돔(외부 돔과 내부 돔) 체제를 따른 것이다. 원뿔 모양의 탑은 네 개의 포물선형 창문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창문들은 자연광을 받아들여 대연회실로 보낸다. 또한 채광창 형태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은 돔 천장의 원형 유리창으로 투사된다. 가우디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항상 적절한 양의 빛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원뿔형 탑 꼭대기에는 철과 황동, 그리고 구리로 만든 장식 깃털이 얹혀 있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영적 변혁으로 중에서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가우디의 답변 가우디는 아무 이유 없이 재활용한 것이 아니라, 건축적·실용적·예술적·경제적 동기로 그렇게 했으며, 기발하게 재활용하여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그는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적 인물이 되는데, 이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확인된다. 그 성당은 사치나 과도한 장식이 없다. 거기서 아름다움은 기능적이며 기능성은 곧 아름다움이다. 마요르카 대성당, 특히 닫집에서는 그와 비슷한 점을 볼 수 있다. 가우디가 재활용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작품은 콜로니아 구엘 성당이다. 그에게 재활용이란 가까운 곳에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공사 현장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콜로니아의 방직 공장에서 필요한 재료를 손쉽게 제공했고, 따라서 운송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하 소성전의 나무 벤치들이다. 벤치 좌석과 등받이에 사용된 영국산 참나무 판자는 에우제비 구엘이 콜로니아의 방직 공장에서 사용하려고 구매한 자동 방적기의 나무 포장재였다. 벤치의 금속 부품들은 수작업으로 단조한 강철 띠였다104. 가우디는 쇠못 사용을 철저히 배제했는데, 그것은 쇠가 참나무에 포함된 탄닌 성분과 반응해 결국 나무를 부식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무못, 핫멜트105,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만 황동 못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참나무가 벤치 다리로 쓰기에는 내구성이 약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리는 털가시나무로 제작했다106. 가우디의 재활용은 재료의 물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서 출발했다. --- 바르셀로나에서 폭발한 창조력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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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추기경의 요청으로, 가우디 연구자이자 성서학자가
방대한 기록과 자료를 근거로 되살려낸 20세기 유일한 가우디 전기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가우디 서거 100주년을 맞아 국내에 소개되는 본격적인 가우디 연구서이자 전기이다. 도상학적 상징들을 오랫동안 분석해온 대표적인 성서학자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주교 후안 호세 오메야 추기경의 공식 요청을 받아 가우디의 시복 절차에 필요한 생애와 신앙, 영적 여정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맡아왔다.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이러한 교회의 공식적인 지원 하에 방대한 실증 자료, 동시대 기록과 최신 연구를 바탕으로 신화와 전설, 자의적 해석에 가려졌던 가우디의 실제 삶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낸 결과물이다. 가우디의 고향 레우스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성장한 저자는 가우디가 보고 자란 지역의 빛과 흙, 지중해의 풍경과 민간 신앙, 카탈루냐 문화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집필된 이 책은 단순한 전기를 넘어, 가우디를 둘러싼 문화적·정신적 풍경까지 함께 담아냈다. 가우디는 살면서 자신에 대해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그의 작업실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방이 불타면서 메모와 도면, 모형과 연구 자료 상당수가 소실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가우디를 둘러싼 수많은 신화와 과장, 불분명한 해석들이 반복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베일에 싸여 있던 거장의 흔적을 집요하게 추적한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말 대신 건축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가우디의 삶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복원해낸 단 하나의 안내서다. 아울러 이 책의 원서는 가우디 서거 100주년 기념 미사 봉헌을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교황 레오 14세에게 헌정될 예정이다. 삶과 작품이 하나가 된 건축가 책은 가우디의 삶을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먼저 레우스의 자연과 빛 속에서 감수성을 키운 어린 시절을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젊은 건축가로 성장하던 초기, 폭발적인 창작 활동 속에서 사순절의 단식과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내면의 변화를 맞이하는 중기, 점차 신앙과 상징, 전례적 의미에 깊이 몰두하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삶 전체를 바치게 되는 말년까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저자는 가우디를 단순한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빛과 공간, 재료와 형태를 자신만의 미학으로 다루는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로 바라본다. 가우디는 자연을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으로 보았고, 자신의 건축이 주변 환경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으며, 자연 속에서 건축의 원리를 발견하려 했다. 또한 고딕 건축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조를 고민했다. 기울어진 기둥과 하중 전달 구조를 통해 기존의 건축 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건축 언어를 구축했고, 이는 콜로니아 구엘 교회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카사 바트요, 라 페드레라(카사 밀라), 구엘 공원, 콜로니아 구엘 교회, 마요르카 대성당 복원 작업 등 가우디의 주요 작품들은 개별 건축 해설이 아닌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읽힌다. 나아가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십자가와 묵주, 복음서의 상징, 자연과 빛의 의미, 카탈루냐 문화와 건축적 전통까지 세밀하게 추적하며, 왜 가우디의 건축이 지금까지도 독보적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1894년 사순절의 단식과 정신적 위기를 겪은 이후,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 안에 가톨릭 신앙과 상징을 더욱 깊이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생애 말년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공사에만 전념하다시피 했고, 직접 성당 건축 기금을 위한 모금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926년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우디에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단순한 건축 프로젝트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한 세기를 넘어 완성되는 가우디의 세계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동시대의 자료와 그가 만든 작품을 바탕으로, 가우디의 삶과 작품, 사상과 신앙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며, 인간 안토니 가우디의 내면과 사유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에 더해 본문에 수록된 가우디 건축 작품 사진과 미공개 스케치 작업물은 글로 설명된 가우디의 건축 세계를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며, 그의 생애 여러 순간들을 담은 사진은 독자를 100년 전 가우디의 시간 속으로 이끈다. 속도와 효율이 당연해진 시대에, 한 인간이 삶과 신념, 상상력을 바쳐 세운 건축은 어떤 시간의 깊이로 남게 될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지금 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가우디는 끝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건축은 한 세기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이는 위대한 건축이란 한 사람의 재능에서 시작되어, 시간을 건너 이어지는 믿음 속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26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완성을 향해 가는 지금,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가우디라는 거대한 세계를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가우디 연구와 이해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린 기념비적 역작!” - 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천재의 성격과 신념, 그리고 그의 작업 방식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 호르디 파울리,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 감독 “엄밀함과 명료함으로 가득 찬 서사. 상투적인 표현과 고정관념을 깨고 ‘신의 건축가’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기” - 프란세스크 토랄바, 철학자·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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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비로소 가우디에 관한 제대로 된 책이 나왔다. 가우디의 인기를 반영하듯 그동안 우리나라에도 십여 종의 가우디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지만 모두 힘들었던 그의 삶과 특이한 건물 등 단순한 호기심 차원의 외적 현상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거의 모든 책의 내용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다. 어떤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이 책 저 책을 서로 옮겨 놓은 정도에 불과했다.
나 역시 가우디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늘 안타깝게 지켜봐 왔다. 이러한 한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책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이 모든 한계를 넘어 가우디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이 책은 가우디 연구사에서 스페인 건축가 세자르 마르티넬(Cesar Martinell, 1888~1973)의 연구에 이은 두 번째 쾌거라 할 만하다. 그 세 가지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책들에는 가우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인 ‘종교성’이 빠져 있다. 가우디는 결코 ‘종교성’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건축가다. 가우디는 독실한, 숫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가톨릭 신자였으며, 가우디의 집안은 물론이고 이 책에서 밝히듯 태어나 자란 레우스 역시 가톨릭의 도시였다. 그는 성장기 때부터 가톨릭의 영성을 온몸으로 체화했고, 이후 그의 건축 활동 역시 이런 종교성의 발로였다. 그가 평생 독신으로 살고 질병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치열한 예술가의 삶을 고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종교적 힘, 즉 ‘영성’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삶과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어떠한 경건하고 성스러운 큰 힘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종교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신앙생활이자 구도의 여정이었다. 마치 종교 건축의 결정판인 중세 성당을 건축한 장인들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우디 사망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의 제목인 ‘가우디의 삶과 일’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직업군은 건축가 이전에 가톨릭 사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아르만드 푸치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가톨릭 신부이자 당대 뛰어난 신약학자로서, 예수 연구의 권위자이며, 교황청 산하 성좌 학문기관 질서평가 홍보국장직을 맡고 있다. 또한 그는 가우디의 대표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신학 자문 위원으로도 활동해왔다. 가우디 연구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적임자가 나온 것이다. 둘째, 가우디 개인에 관한 자료의 취약성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던 가우디 관련 지식 콘텐츠는 그의 일생을 다루는 데 있어 ‘조금 자세한 백과사전’ 수준을 반복하는 현상이 관찰된다. 심지어 스페인 유학 경험이 있는 한국 건축계 사람들도 스스로 영어권 연구자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가우디에 관련한 지식 콘텐츠 생산에서 이렇다 할 발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가우디가 스스로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본고장인 사람이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가 자료에 접근할 가능성이 클 텐데, 이 책의 저자 아르만드 푸치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우선 바르셀로나가 고향이며 앞서 언급한 가톨릭 사제 경력에 더하여 카탈루냐 신학대학 학장과 바르셀로나 산 파치아 성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 책의 ‘감사의 글’에서 드러나듯, 그가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은 물론이고 유럽 전역의 여러 기관과 개인을 통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우디 관련 자료를 모으는 데에 얼마나 열심이었는 알 수 있다. 30쪽이 넘는 방대한 주석과 그 안에 담긴 수준 높은 인용 자료는 이를 잘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셋째, 가우디 건물 자체에 관한 건축적 설명의 부실함이다. 가우디 건물은 창의성 넘치는 극단적 비정형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기존의 책들은 이런 가우디 건물과 관련해 대부분 간단한 배경 이야기만 반복할 뿐, 정작 건물의 작품성과 조형성에 대해서 심도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건축 전공자가 아님에도, 건물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웬만한 건축 전공자들보다 더 충실하고 치밀한 전문성을 보여준다. 수준 높은 건축사가이자 예술사가로서의 면모마저 느껴진다. 이 책 《안토니 가우디, 삶과 일》은 지금까지의 여러 한계를 뛰어넘어, 가우디의 예외적 인생과 독특한 작품 세계를 종교성, 개인 전기, 건축적 작품성 등과 결부해서 풀어낸 수작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가우디와 관련해 심도 있는 중요한 내용을 제쳐 두고 ‘괴짜’라는 상업적 타이틀을 붙여서 하나의 대중 상품으로만 소비해왔다. 이제 이 수준을 뛰어넘어 가우디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약을 가져온 역작이 나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 임석재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