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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첫 번째 장 - 늦여름 : 예술가와 화도의 붓 두 번째 장 - 가을 : 지킬 앤드 하이드, 솔태 세 번째 장 - 늦가을 : 거울을 가진 소녀와 냥돌 네 번째 장 - 겨울 : 사신 PD와 향랑각시 다섯 번째 장 - 설날 : 꽝, 인어의 삼색 경단 여섯 번째 장 - 귀신의 날 : 케이크와 불청객 에필로그 - 일 년 후, 정월 대보름 외전 - 대금 소리 흐르는 숲 작가 노트 참고 문헌 |
범유진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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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르고 살던 스물일곱 살과 열네 살은, 서로에게 요괴보다 더 낯선 존재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pp.66-67 “귀찮게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지.” 타인과 함께 사는 건 원래 귀찮은 거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건 김수빈이 했던 말이었다. --- p.80 “아뇨. 어, 저 남자. 갑자기 우네.” 허공에 비친 이단지가 휴대전화 액정을 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 남자, 괜찮은 건가요? 혹시 게스트하우스 왔다가 요괴랑 매칭 안 되면 페널티를 받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얘 좀 봐. 여기가 클럽이니? 매칭이 뭐야. 없어, 그런 거. 말했잖아. 애초에 한 있는 자들만 여길 발견할 수 있다고. 그래도 저 남자는 괜찮을 거야. 저기 봐. 아, 넌 안 보이겠구나. 저 남자가 길렀다던 고양이가 등 뒤에 딱 붙어서 나쁜 게 못 오게 막고 있잖아.” --- p.146 “흥. 난 귀여우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묘아두는 날개 위로 냉큼 올라탔다. “뭐, 이젠 내가 아니라도 저 아이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생겼으니 괜찮겠지.” --- p.153 “나는 더 이상 내 취재 탓에 누군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서태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미는 끝까지 서태림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태림은 결국 자기를 붙잡은 모미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하나씩 떼어냈다. “도망치실 건가요?” 모미는 마지막 손가락에 힘을 주고 버티며 한 음절씩 스타카토로 끊어 말했다. 할 수 있다면 말을 화살촉처럼 깎아서 태림의 가슴에 박아 넣고 싶었다. “책임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더더욱 도망가서는 안 되잖아요.” --- p.229 “가마구 님 납시오!” 몇백 마리의 새가 날갯짓하는 듯, 숲이 폭풍에 휩쓸려 윙윙거리는 듯, 동굴 안에 메아리치는 맹수의 울음과도 닮은 외침이었다. 고개를 든 모미는 거실 바닥에 검은 홀이 생겨나는 걸 봤다. 블랙홀처럼 새까만 심층을 중심으로 파란 기운이 일렁이는 원 안에서 사람이 솟아올랐다. 등에 세 쌍의 커다란 검은 날개를 단 남자였다. 이제는 웬만큼 괴이한 일에는 익숙해진 모미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발끝까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의 날개가 크게 펄럭였다. --- p.200-201 “나는 어떻게 남들이 그런 걸 보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어요. 왜냐면 나도 모르니까요. 나는 그게 너무 싫고… 한심해요.” “나경아.” 모미가 이불째 나경을 옆으로 굴리자, 나경은 버티지도 않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스르륵 옆으로 넘어갔다. 모미는 그런 나경의 몸을 덮듯이 끌어안았다. “이제 나는 네가 맛없는 걸 먹거나 배고픈 게 싫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 그러니까 네가 내 음식을 먹는 데 자격 같은 건 필요 없는 거야. 알았니?” 나경은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 p.231 “허락받지 않았는데도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인간은.” 그건 악귀나 다름없는 존재일 것이다. 나경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도와줘, 이모. 그러나 목소리조차 엉켜버린 건지 안간힘을 써도 말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손이, 지독한 악취가 점점 가까워졌다. 탕. 문 닫히는 소리가 총성처럼 울려 퍼졌다. --- p.242 김수빈의 말대로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고양이처럼 발소리 죽여 걷는 작은 아이.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모미는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지켜봐 주는 사람 없이 혼자 어른이 되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어른이 되는 걸 지켜보고 싶어.” 알 속에서 어린 새가 깨어나듯 웅크린 몸을 편 나경이 모미를 끌어안았다. 낙화처럼 흩날리던 불꽃도, 검은 날개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pp.250-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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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의 인간, 한을 품은 요괴
낯선 존재들이 건네는 기묘하고 따뜻한 위로 도깨비불 게스트하우스는 요괴들을 위한 숙박업소지만, 간혹 절망에 잠식된 인간들이 음기에 이끌려 찾아온다. 이곳에 다다른 인간들은 하나같이 삶에 지쳐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다. 딥페이크 피해자의 진실을 좇다 좌천된 PD, 성소수자이자 스토킹 피해자였던 딸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 그리고 실연의 상처를 안고 떠도는 이주 여성까지. 서로 다른 사연을 품은 이들은 절망의 끝에서 도깨비불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두드린다. 이 소설 속 요괴는 인간의 어둠을 먹어 치우는 존재들이다. 단, 인간이 품은 어둠과 요괴의 한이 비슷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만약 운이 좋다면 요괴는 인간의 어둠으로 배를 채우고 인간 손님들은 한결 가벼워진 채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나서게 된다. 수백 년을 살아온 요괴는 인간보다 먼저 비슷한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낸 존재들이다. 때로는 나보다 먼저 같은 고통을 살아낸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이 소설은 인간 손님들이 낯선 존재들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속에 억눌러 놓은 감정을 조금씩 마주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찾아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삶이 지치고 버겁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앓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소설 속 요괴들이 건네는 위로가 힘이 되어줄 것이다. 같은 고통을 겪은 이들과의 연대는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니까. “타인과 함께 사는 건 원래 귀찮은 거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 가족이 되기까지 으스스하지만 다정한 요괴 힐링 판타지 “평생 모르고 살던 스물일곱 살과 열네 살은, 서로에게 요괴보다 더 낯선 존재”(66쪽)다. 이모와 조카이지만 생전 처음 만난 모미와 나경은 서먹하기만 하다. 모미에게는 나경이 요괴 손님들만큼이나 어렵고, 나경에게도 모미의 존재가 갑작스럽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미가 도깨비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180일 동안 꼼짝없이 함께해야 하는 운명이다. 모미와 나경은 한 달 동안이나 서로 본체만체하며 피해 다니다가 결국 모미의 언니이자 나경의 엄마, 이승을 떠난 다미의 사십구재를 두고 크게 다투고 만다. 두 사람의 관계는 모미가 나경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서서히 변화한다. 모미가 용기를 내서 나경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동거인이자 그 누구보다 각별한 존재였던 수빈에게서 “타인이 있어 채워지는 삶도 있다는 것”(85쪽)을 배웠기 때문이다. 보육원을 전전하며 타인을 믿지 않는 삶을 살아온 모미가 수빈을 만나 둥그렇게 원이 되었듯, 고양이처럼 잔뜩 사람을 경계하던 나경도 모미를 만나 함께하는 삶의 온기를 배워간다. 우리는 종종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하면서도 상처받기 싫어서 타인으로부터 숨곤 한다. 이 소설은 “타인과 함께 하는 건 귀찮은 일”(93쪽)이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을 때 펼쳐지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다정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