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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형시

책소개

목차

제1부 | 초록빛 페인트로 쿡쿡 찍은 손자국들
시나위젓대
아버지의 만년필
북극곰의 눈물
담벼락 명화
한계령에 들어서며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
날지 못한 새
수원화성박물관
해당화
눈빛 목례
반구천 고래
가야의 가을
슬도에 가면
어떤 화마

제2부 | 연둣빛 바람이 흔드는 대숲
동백꽃 가등
오래된 팽나무집
국수 한 그릇
항아리 수족관
12월, 어느 날의 기억
학교 종
길 위의 생
느티나무 마음
뉠리리 걸음
복수초를 기다리며
흰 지팡이 주파수
이삿날
봉길리를 가다
불국토 기행

제3부 | 그리운 이름 외는 동백꽃
천성산 억새
밥에 대한 네 개의 이야기
산당화 손님
뻐꾹새 별사別辭
신화의 바다
대왕암
서운암을 거닐며
해운대에서
병풍산
동요되고 동화되어
그리운 아이들
도요새 사랑
랩 추는 부산
가을을 읽다

제4부 | 가을볕에 참깨 터는 소리
아침 바다
사람을 찾습니다
달고나
종갓집 풍경
어부의 무덤
동백섬에서
상족암
템플스테이
푸른 빛 숲길에서
유모차
아기님 오셨네
봄밤, 붓 들다
아들딸에게
화답

제5부 | 외롭게 울던 꽃 다 모여 피었다
갯마을을 읽다
철암 탄광촌을 다녀와서
새벽 배송
우주여행
벨루야, 안녕
절개지 파밭
콩죽
그늘을 지우다
도다리쑥국
봄꽃
바닷가 서재
봄 보자기 풀다
늪 왕국, 우포

해설_유성호
삶의 기원과 역사를 묵언처럼 담아낸 완미한 정형미학-정현숙의 시조미학

저자 소개 1

1990년 <문학세계> 신인상, 1991년 <시조문학> 천료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화포리에서』 『늘 바라보는 산』 『뒷마당 생각』 『아침 우포』 『유모차와 해바라기』가 있으며, 동시조집으로 『둠벙에 살던 물방개』 『돋을볕 웃음소리』 『강물이 그리는 음표』 등이 있다. 수상으로는 성파시조문학상, 부산문학상 대상, 한국문인협회 작가상, 한국시조시인협회 본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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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50*210*20mm
ISBN13
9788989224747

책 속으로

먼 길을 떠나시며 내 손에 쥐어주신
아버지 일부였던 생전의 만년필은
한 번도 꺾이지 않은 직필의 붓이었다

흐릿한 등불 아래 안경을 고쳐쓰며
그 많은 거친 세월 밑줄을 그어 오신
아버지 얼룩진 먹물 지워지지 않습니다

막막한 습작의 삶, 원고지 칸 건너가듯
세상일 힘들어도 되돌아보면 먹물 한 자락
오늘도 참회하듯이 시 한 편을 올립니다

백지를 메워가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몸의 가장 깊은 시간을 가로질러
아버지 만년필 잡고 언덕 하나 넘습니다
--- p.14 「아버지의 만년필」 중에서

다대포 모래밭에 쏟아지는 붉은 노을
세상의 모든 고요 평화를 거느리고
한 바다 장엄하게도 홀연히 입멸入滅한다

그 위에 빙하 떠난 북극곰과 철새, 펭귄
따뜻한 파도 타고 정박한 어진 그들
지구가 너무 뜨거워 난민처럼 된 걸까

어쩌리, 산성비가 잠든 이 해안에서
순금 빛 조각들의 눈물이 완성되고
인간이 벗어 둔 신발 신고 어슬어슬 멀미한다

소음을 깔고 누운 침묵의 언어 앞에
우리가 한 일들 앞으로 해야 할 일
우우우 지구를 위해 유서로 쓴 우화 한 점

* 2025.4.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김길만 모래조각가가 다대포해수욕장 모래사장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북극곰과 펭귄이 다대포 해안까지 밀려올 수 있다는 점을 모래조각 작품으로 표현, 기후 변화의 위기감을 담아냈다.
--- p.15 「북극곰의 눈물」 중에서

협곡의 고요마저 입적을 한 이 저물녘
갈 길은 저만큼인데 눈은 다시 쌓여가고
어스름 초저녁별이 서둘러서 하산한다

바람은 왁자지껄 솔가지의 눈을 털고
썰렁한 마음 마당에 홀로 와 들어앉은
오늘 밤 눈송이 하나 공중 속에 떠 있다

그 어떤 말과 빛깔 눈보다 진실할까
산맥에 갇힌 옷깃 기웃기웃 찾아드는
한계령 내경에 들어 한 사람을 생각했다

바서진 그대와 나 아직 남은 묵언들이
얼음장 꽝 깨지듯 열렸으면 참 좋은 날
봄 길목 내생을 깨워 녹의 한 벌 지으리
--- p.17 「한계령에 들어서며」 중에서

이제는 귀국선은 더는 오지 않았다
해 지는 비탈에서 하늘 쳐다보는 이
철모른 모든 파도를 데려다가 울었다

광복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련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향수병 앓아가며
버려진, 국적 잃은 채 눌러앉은 땅이다

반세기 망향 속에 박제된 사할린 섬
어둠의 막장에는 한인 징용 희생자들
산비탈 은빛 위령탑 파이프 배 솟았다

날마다 몸에 돋는 엉겅퀴 이파리처럼
칼바람에 휘청이는 눈발의 울컥임은
사무친 그리운 얼굴 낱씨되어 흩어진다

한 생각 밤이 되고 한 생각은 낮이 되는
짧은 여름 햇살이 유모차를 밀고 가고
정박한 배들의 침묵 그 항구는 말이 없다
--- p.18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광복 80주년에 」 중에서

팽나무 한 채 올려 외곬으로 지킨 종가
무성한 잎새의 기세 근방 십 리 떨칠 때는
세상의 모든 소식이 한가지로 모였다

앞마당 큰기침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부황 든 잎새들이 시나브로 쌓여갔다
한 가문 높푸른 정신 뿌리까지 흔들며

추녀 끝에 나앉은 남겨 둔 그늘 아래
적막을 걷어내듯 종부의 혼잣말은
오래된 팽나무집의 역사책이 되었다
--- p.30 「오래된 팽나무집 」 중에서

교회당 철탑 위로 또 하루가 깊어가고
세상 밝게 밝히는 성탄 트리 반짝일 때
아이들 착한 마음이 등불처럼 매단 풍선

성가대 복음 성가 흰 벽을 넘는 시간
서울의 밤거리는 검은 말言이 날뛰었고
달빛을 먹장구름이 놀란 듯이 가렸다

바람 편이었을까 애국 때문이었을까
잠들지 못한 가슴 하나둘씩 모인 광장
그들의 민의를 듣는데 왜 자꾸만 슬플까
--- p.33 「12월, 어느 날의 기억 」 중에서

삶이란 뒷골목을 함께 해온 낡은 구두
가장 슬픈 순간의 자식을 두고 오듯
걸어온 날들과 함께 수선집에 맡겼다

여전히 아득하고 선을 긋는 길 위의 생
가출한 시간들이 더듬더듬 저러했다
언제나 벽 너머 세상 발자국만 찍혔다

울퉁불퉁 으깨진 맘 다독이며 달래주던
어스름 골목 어귀 집으로 가는 그 길
고요 속 빛을 삼키며 뒤따르던 저 소리

아직도 옛 기억들 지워지지 않고 살아
다 해진 널 붙들고 마음조차 둘 데 없어
가던 길 되돌아와서 다시 신는 눈물이다
--- p.35 「길 위의 생 」 중에서

1.
네팔 서부 아이들에게 채석장은 하루 한 끼
책잡아야 할 손에 망치와 정을 든다
한 홉의 양식을 위해 굶주림의 돌을 깬다

2.
내일은 갓 지어 낸 따뜻한 쌀밥 한 술
배불리 먹는 게 꿈인 아프리카 어린 소녀
태양빛 죽음 사이에 눈망울은 살았다

3.
날마다 생을 짓는 폐지 줍는 최씨 아재
평생 들밥 지어 나른 팔순 끝집 어매도
고요히 죽음 사이에 밥 냄새는 평화다

4.
최서방 덕분에 밥걱정 없이 살았는데
힘겹게 말문 닫고 하늘로 오르다니
에미야, 밥이 하늘이다 식구 밥상 차리자
--- p.46 「밥에 대한 네 개의 이야기 」 중에서

해마다 이맘때쯤 뻐꾹새 찾아와 우는
숙부님 잠든 옆에 젊은 아들 잠든 그곳
숙모님 아흔의 삶도 두 부자父子와 함께 했다

다음 생은 하나 되어 오래도록 살고 싶어
뭉게구름 궁전 짓고 벌 나비들 불러 모아
사진 속 계급장별은 은하수로 반짝였다

마음이 자꾸 닿아 서로가 끌린 세월
붉었던 이름 불러 웅숭깊게 묵념하면
산 자의 슬픔까지도 봄 물결로 흘렀다

초록이 눈부신 날 그리움 풀어내어
늦도록 창가에 와 안부 편지 놓고 가는
애틋한 긴 이별사를 뻐꾹새가 쓰고 있다
--- p.48 「뻐꾹새 별사別辭 - 현충원」 중에서

땀 흘린 신역 삽질 아린 길을 가다듬던
꽃담 위 채송화꽃 까만 씨방 소담하다
낮은 곳 깃든 목숨이 겸손함을 더하다

흐르는 물살 소리 살 부비는 갈대 소리
맑은 볕 쏟아지는 수수한 산과 들에
온 세상 물감을 풀어 채색하는 중이다
--- p.88 「가을을 읽다」 중에서

막장 갱 화약연기 탄가루에 파묻혔다
“휘휘휘, 나가시요 일 바빠요 나가시오”*
그날 밤 광부 진혼가 창살문을 넘었다

한 치 앞 안 보이고 숨이 콱콱 막히는 곳
억센 손 외풍 막아 고된 노동 곡괭이로
갠노질 구멍을 내며 또 희망을 파냈다

하천에 까치발로 건물 벽 하나 사이
신혼을 아로새긴 단칸방 필름 한 컷
불 품은 검은 돌들이 구들장을 달궜다

이 거리 낯선 집을 떠날 수 없었으니
내 인생 목구멍에 검은 가래 끓고 끓어,*
한두 해 이놈의 청춘 열두 해가 되었다

“휘휘휘, 나가시오 발파하니 나가시오”
어린 샛별 자식 위해 또 한 삽 탄을 캐던
그날 밤 폭발음 소리 이명으로 울렸다

* 「광부진혼가」에서 인용.
--- p.78 「철암 탄광촌을 다녀와서」 중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고향서 온 꽃보자기
살며시 풀어보면 달래 냉이 연두 바람
앞 냇가 버들강아지 꼬리 잘잘 흔든다

겨우내 몰래 썼던 열일곱 손편지를
이제야 답장인 듯 하얀 이로 웃는 목련
아 흠흠 반쯤 감긴 눈 아껴가며 읽는다

--- p.89 「봄 보자기 풀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정현숙 시인은 1990년 〈문학세계〉 신인상과 1991년 〈시조문학〉 천료로 문단활동을 시작한 이후 『화포리에서』 등 4권의 시조집과 동시조집 『강물이 그리는 음표』 등 2권의 동시조집을 발간한 역량있는 시조시인으로 성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번에 발간된 새로운 정현숙의 시조집 「길 위의 생」은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성찰을 적극 수행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통한 기원origin 탐색의 열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미학적 결실이다. 시인은 자신이 겪어온 시간을 다스리고 그에 대한 심미적 수납과 초월을 열망하는 일관성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시편들을 ‘시간예술’의 정수精髓로 만들어간다. 이처럼 정현숙 시조의 내질內質은 ‘시간’과 ‘기억’을 되살피고 사유하는 원리에 의해 펼쳐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조집에는 이러한 원리가 서정적 순간성 속에서 펼쳐짐으로써 서정시가 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언어적 장관이 가득 담겨 있다. 그만큼 정현숙의 시조는 비밀스럽고 오랜 근원적 소리를 들려주면서 세계의 근원적 질서와 가치에 대한 상상적 탈환 작업을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전해준다. 이러한 작업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 지속되는 동안 필연적으로 견지할 수밖에 없는 시인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승화하고 있다.

대체로 우리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존재론적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하고 완성해가게 된다. 사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져가는 과정 자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 터이다. 따라서 인간은 철저하게 시간-내적 존재로 살아가고 그 조건 안에서 생을 마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리적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저마다 고유한 주관적 시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확장해가기도 한다. 계량적이고 한시적인 시간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재구성된 새로운 존재조건으로서의 시간을 사유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정현숙의 시조는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형을 심원하게 경험하게끔 해준다. 이번 시조집은 우리 시조시단에서 돌올하게 빛날 참신한 언어적 의장意匠을 여러 차원에서 갖추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을 때로는 역류하여 기원에 가닿고 때로는 확장하여 심원한 역사적 지평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선명한 감각과 사유로 짜올린 성찰의 시간이 정형의 육체 안에서 더욱 깊은 실감과 밀도를 갖추어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목도하게 된다.

정현숙 시인은 다양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경험적 실감을 정성스럽게 자신만의 언어적 화폭에 담아낸다. 더불어 일차적인 감각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유의 결을 펼쳐가는데 가령 세상이 서로 공존하면서 어울리는 삶의 화음和音을 들으면서 살아있는 것들의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한 역동의 고요를 통해 시인은 사물이나 상황의 본질로 잠입하게 되고 우리는 언어를 넘어 존재하는 어떤 본원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정현숙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섬세한 감각과 사유를 사물에 의탁하여 절실한 경험적 실감을 노래하는 일관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여린 마음이 움직여가는 정형의 리듬을 통해 삶을 은유해간다. 그렇게 그의 시조는 매우 미세한 경험 맥락이 숨쉬는 순간을 가져다주면서 자신만의 감각과 사유를 사물에 의탁하여 노래하는 독자적인 인생론으로 절절하게 다가온다.

[시인의 말]

내 안에 푸른 싹을 틔우는
언어의 뿌리를 탐색하면서
간직하고 싶은
시조 나무를 마음에 심었다.

이 시조집에 심은
예순아홉 그루의 시조 나무
불편한 가지는 잘라내어
자유를 주었고
잘못 내린 뿌리는
과감히 도려냈다.
-2026년 신록에, 정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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