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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표
000 총류 100 철학 200 종교 300 사회과학 400 자연과학 500 기술과학 600 예술 700 언어 800 문학 900 역사 나폴레옹의 영향력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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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 코르시카 소귀족 보나파르테 가문 출신으로, 1785년 만 16세에 포병 소위로 임관해 발랑스의 라 페르 연대에 부임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통령 정부 수립의 중심에 섰고, 1804년 5월 18일 황제로 선포된 뒤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 「000 총류」 중에서 나폴레옹은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로 기억되지만, 그 의지는 일정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 51년은 외부자 의식에서 자기 형성으로, 자기 형성에서 자기 과신으로, 자기 과신에서 자기 부정으로, 자기 부정에서 자기 변호로 이어진 다섯 단계의 변화로 정리된다. 본토 학교의 외부자 소년은 혁명의 10년을 지나 전쟁과 정치의 감각을 익힌 청년이 되었고, 그 청년은 황제가 된 뒤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권위의 확대는 점차 한계를 잊은 과신으로 기울었고, 그 과신은 모스크바와 라이프치히, 워털루를 거치며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마지막 세인트헬레나에서는 권력을 되찾는 대신 자신의 삶을 변호하는 일에 남은 시간을 쏟았다. --- 「100 철학」 중에서 신앙에 관하여 나폴레옹이 속내에 감춘 믿음과 밖으로 드러낸 행보는 날카롭게 엇갈린다. 청년 시절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에서 벗어나 짙은 회의주의에 빠져들었던 그는, 1801년 교황 비오 7세와 정교협약을 체결하며 돌연 교회와의 화해를 선포한다. 나아가 1804년 12월 황제 즉위식에는 교황을 파리 한복판으로 직접 불러들였다. 신을 향한 통치자의 불신은 분열된 사회를 꿰매기 위한 실용적인 권력 의지로 탈바꿈했다. 종교는 조각난 민심을 하나로 묶어내고 새로운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치적이며 기능적인 도구로 작용했다. --- 「200 종교」 중에서 1804년 3월 21일 공포된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 des Français)」, 후일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éon)」으로 불린 법전은 36개 법률, 2,281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지역마다 달랐던 구체제의 관습법과 혁명 이후 뒤섞인 법의 기준이 이 법전을 통해 정리되었고, 혼인과 가족, 소유권과 상속, 계약과 채무처럼 삶과 재산관계를 다루는 기본 규칙이 프랑스 전역에 하나로 적용되었다. 나폴레옹은 법전 작성을 통치의 핵심 과제로 보았기에, 1800년부터 1804년까지 국참사원에서 민법전 초안이 논의되는 동안 여러 차례 회의에 직접 참석해 토론을 이끌거나 쟁점에 개입했다. --- 「300 사회과학」 중에서 1798년 5월 19일 툴롱 항을 떠난 프랑스 함대에는 군인 3만여 명 외에 약 160명의 학자, 예술가, 기술자가 동행했다. 군사 작전과 대규모 학자단의 동행은 국가 주도의 근대적 원정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획이었다. 학자단은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집트의 유적, 자연, 산업, 지리, 생물, 풍속을 측량하고 기록하고 수집했다. 1799년 7월 발견된 로제타석의 그리스어, 민중문자, 상형문자 병기는 1822년 샹폴리옹의 신성문자 해독으로 이어졌고, 1809년부터 1828년까지 출간된 23권의 『이집트지(Description de l'Égypte)』는 근대 이집트학(Égyptologie)의 출발점이 되었다. --- 「400 자연과학」 중에서 18세기 말까지 통신 속도는 사람이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속도에 묶여 있었다. 파리에서 릴까지 약 230킬로미터의 거리는 말 우편으로 하루 이상이 걸렸다. 이 한계를 깨뜨린 기술이 광학 통신, 곧 클로드 샤프(Claude Chappe)의 텔레그래프였다. 1794년 7월 파리-릴 노선이 완성된 뒤 군사 소식이 몇 시간 안에 도착했다. 광학 통신은 정부와 군대가 같은 정보를 거의 동시에 공유하게 만드는 장치였고, 넓은 영토를 중앙에서 지휘하려는 나폴레옹 체제와 잘 맞아떨어졌다. 제국의 확장과 함께 이 통신망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방면의 연결까지 뻗어 나갔다. --- 「500 기술과학」 중에서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가 있다. 1800년 5월 마렝고 원정 시기 그가 알프스를 넘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다비드는 사실보다 격상한 표현을 선택했다. 실제로 그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지만, 그림에서는 군마 위에서 몸을 돌려 보는 영웅적 자세로 그려졌다. 바위에는 BONAPARTE, HANNIBAL, KAROLUS MAGNUS, 곧 한니발과 샤를마뉴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나폴레옹의 이름을 한니발과 샤를마뉴가 다져놓은 정복자의 반열 위에 나란히 세운 것이다. --- 「600 예술」 중에서 "불가능은 프랑스어가 아니다(Impossible n'est pas français)." 1813년 7월 9일, 나폴레옹은 마그데부르크 방어를 맡고 있던 르마루아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독일 전역의 전세가 어려워지던 시기였고, 르마루아는 우세한 연합군 앞에서 마그데부르크를 지키는 일이 어렵다고 보고했다. 그 보고에 대해 나폴레옹은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그대는 쓰고 있다. 그런 말은 프랑스어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 표현은 후대에 "불가능은 프랑스어가 아니다"로 압축되었고, 한국어권에서는 다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로 널리 퍼졌다. --- 「700 언어」 중에서 나폴레옹의 독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전이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Vitae parallelae)』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 기록이다. 18세기 유럽 교양 교육의 중요한 교재였던 『영웅전』을 통해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를 만났고, 개인의 의지와 재능이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사고를 익혔다. 18세기 후반 유럽 문학 기류를 재편한 「오시안(Ossian)」 시집의 어두운 분위기, 안개, 전사들의 죽음, 영웅적 우수의 정서에도 깊이 끌렸다. 1815년 세인트헬레나로 향하는 벨레로폰 호에 있던 그의 책 가운데서도 오시안이 확인될 만큼, 이 취향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 「800 문학」 중에서 나폴레옹의 세계사적 위상은 단일한 영웅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는 구체제가 붕괴된 공백 위에 관료제와 법전이라는 근대 국가의 골격을 세우고, 1789년 혁명이 이룩한 시민적 평등과 사회적 유산을 법치 시스템 내에 안착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이 곧장 정치적 자유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폴레옹 체제는 일인 권력의 독점, 전방위적인 사상 검열, 권위주의적 국가 통제를 체제의 동력으로 삼았다. 요컨대 그는 혁명의 성과를 선별적으로 계승한 입법자인 동시에, 억압적인 체제를 통해 자유주의적 가능성을 통제한 독재자였다. --- 「900 역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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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황관을 쓴 혁명의 아들
200년 동안 멈추지 않은 재평가의 진자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나폴레옹은 수천 명의 신민과 외교 사절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 비오 7세의 손에서 왕관을 건네받아 스스로 머리에 얹었다. 천 년을 지탱해 온 신성 권위의 부여 절차가 전복되는 순간이었다. 혁명의 격동기가 배출한 코르시카의 포병 장교가 황관을 취하는 행위는 평생을 지배할 그의 모순을 예고한다. 봉건 신분제를 타파한 입법자가 왕조의 기원을 자처하며, 능력주의를 주창한 통치자가 혈육을 유럽 각국의 왕좌에 앉히는 역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생애를 짓누른 이 모순은 나폴레옹을 향한 평가를 영웅과 폭군의 양극단으로 쉴 새 없이 밀어붙인다. 1823년 라스 카즈의 『세인트헬레나 비망록』 출간 직후 민중의 향수를 자극하는 대상으로 소비되다가, 1852년 제2제국기에 접어들며 현실 정치의 표상으로 부활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권위주의 체제와 대규모 군사 동원의 선례로 도마에 올랐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노예제 부활과 여성 권리의 후퇴라는 치명적 오점을 마주하며 평가의 저울이 다시 요동친다. 200년의 세월을 통과하며 덧씌워진 해석의 외피는 고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인물도서관』 나폴레옹 편은 요동치는 양극단을 동시에 움켜쥐며 그의 실체를 지면 위로 끌어올린다. 코르시카 소년의 이탈리아식 본명부터 조제핀 및 마리 루이즈와의 연이은 결합, 만성 위장병을 다스리던 식이요법, 플루타르코스와 오시안과 괴테를 탐독하던 독서광의 행보, 세인트헬레나 유배지에서 13개월간 이어간 구술 작업까지 이질적인 발자취가 낱낱이 불려 나온다. 코르시카 소년이 세인트헬레나의 구술자가 되기까지 다섯 단계로 펼쳐진 51년의 자기 변형 나폴레옹의 51년 생애는 다섯 차례에 걸친 탈바꿈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1779년 본토 군사학교에 발을 들인 코르시카 출신 이방인을 향한 시선은 차가웠다. 낯선 억양으로 조롱받던 소년은 학업에 매달리며 수학과 포병학의 세계로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을 택했다. 태생적 한계가 주입한 외부자 의식은 도리어 본토의 학문 체계를 장악해 철저한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후 1793년 툴롱 포위전과 1796년 이탈리아 원정을 휩쓸며 변두리의 이방인은 총사령관으로 도약한다. 항구를 굽어보는 고지를 타격하는 전술을 밀어붙여 24세에 준장 계급장을 달았고, 물자 부족과 사기 저하에 시달리던 부대를 이끌어 몇 주 만에 북이탈리아 전역의 판도를 뒤집어엎었다.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와 1804년 노트르담 대관식은 기나긴 변신의 정점을 찍는다. 코르시카 태생의 장교가 프랑스 제국의 황좌를 차지하는 사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교황청과 정교협약을 맺고(1801),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루이즈와 결합해(1810) 혈통의 콤플렉스를 지워나갔다. 끝모를 자기 과신은 1808년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좌에 앉힌 결정에서 싹터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운명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은 이성을 마비시켰고, 모스크바 입성 직후 잿더미로 변한 도시 한복판에서 평화 협상을 고대하던 말로는 스스로의 판단을 맹신한 대가였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와 1815년 워털루의 참패를 겪으며 철옹성 같던 확신은 무너져 내렸고, 1814년 퐁텐블로 궁전에서의 자살 시도는 극단적인 자기 부정의 밑바닥을 증명한다.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에서 보낸 마지막 6년은 자기 변호에 바쳐졌다. 측근들에게 생애를 구술하며 패배의 의미를 유리하게 재배열했고, 자신의 통치를 혁명의 질서화 과정으로 포장하는 기획에 몰두했다. 십진분류법의 방법론 인물이라는 도서관 전기물은 통상 생애를 연대기순으로 나열하거나 정치사·사상사·심리사 같은 특정 분야의 프레임으로 가공한다. 하지만 『인물도서관』 시리즈는 인물의 삶을 장서가 꽂힌 도서관에 비유하며 대안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한국십진분류법의 열 개 영역(000 총류~900 역사)을 뼈대 삼아 인물의 생애를 직조하며, 연대기적 서술을 배제하고 분류 체계 자체가 서사를 이끌어 간다. 시대의 복합성을 흡수한 나폴레옹을 다룰 때 이 방법론은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간다. 100 철학 장은 외부자에서 자기 변호자로 이어진 다섯 단계 심리 변환을, 200 종교 장은 회의주의자가 정교협약을 체결하고 황제 즉위식에 교황을 부른 역설을, 300 사회과학 장은 「프랑스 민법전」과 5대 법전, 도지사 제도가 만들어 낸 국가 행정의 표준을, 400 자연과학 장은 이집트 원정 학자단이 남긴 23권의 『이집트지』와 로제타석을, 500 기술과학 장은 샤프 텔레그래프와 라리의 기동 야전 구급대, 제너의 우두법을 거쳐 나폴레옹 시대의 학문 지형을 펼쳐 낸다. 사라진 제국, 살아남은 법전 21세기가 다시 묻는 두 유산 평생을 바쳐 얽어맨 제국의 지배 체제는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두 차례나 권좌에서 쫓겨난 사이 혈육들을 앞세워 세운 위성 왕조들은 1815년 빈 회의를 거치며 깡그리 쓸려나갔다. 라인 동맹과 바르샤바 공국, 베스트팔렌 왕국과 일리리아 주 등 제국의 영토적 팽창은 모조리 해체 수순을 밟았으며, 메테르니히 주도로 재편된 질서는 30년에 걸친 억압적인 보수 반동 시대를 낳았다. 무력으로 대륙을 집어삼키려던 야심은 200년의 세월 앞에 덧없이 스러졌다. 반면 체계적으로 입안한 법과 행정 시스템은 두 세기를 통과하면서도 거뜬히 살아남았다. 1804년 공포된 「프랑스 민법전」은 점령지였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라인란트에서 고스란히 존속했고, 이탈리아부터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의 민법 제정 모델로 이식되었다. 1800년에 정비된 도 단위 행정 구역과 도지사 제도, 프랑스 은행 설립과 리세 중등교육 체계는 현대 프랑스 행정의 근간으로 굳건히 작동한다. 워털루의 패배가 모든 영광을 소거할지라도 민법전만큼은 영원하리라던 회고는 빗나가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이 엇갈린 유산을 동시에 심판대 위에 올린다. 2021년 사망 200주년 추모식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노예제 부활을 계몽주의에 대한 역행으로 못 박았듯, 학계와 시민사회는 민법전이 여성을 남성의 종속물로 전락시킨 과오와 정복 전쟁이 대륙에 안긴 출혈, 점령지 대상의 무자비한 자원 수탈을 나란히 도마에 올린다. 찬란한 행정적 성취가 노예제 부활과 인권 후퇴, 전쟁 범죄와 동일한 질량으로 저울질되는 분기점에 다다랐다. 『인물도서관』 나폴레옹 편은 끝없이 뻗어 나가는 담론의 줄기를 거침없이 끄집어내어 펼친다. 십진분류법의 틀로 대상을 엮어내는 해체 작업은, 혁명과 제국의 경계에서 폭주했던 권력이 현대 사회에 던지는 무거운 과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