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제1~3부
|
Johanna van Veen
심연희의 다른 상품
|
나는 어린 시절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했었더라면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무엇보다 루트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동반자가 될 리 없었겠지. 루트 같은 혼령들은 행복하고 걱정 없이 사는 이들에게 절대로 끌리지 않는다. 그들은 피든 눈물이든 짠맛을 원한다. 다들 알고 싶어 묻는 게 있다. 내가 정말로 유령에 씐 건가, 아닌가? 하지만 이건 그리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 p.19 훗날, 모든 게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그래서 나의 뺨부터 가슴까지 봉인 밀랍을 부어버린 것처럼 짙고 끈적한 피로 뒤덮였을 때, 나는 그 순간을 참 많이 떠올렸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피를 흘리지 않았더라면, 루트는 다른 소녀를 찾았을까? 그래서 그 애를 사랑하고 안아주고 그 애의 피를 먹었을까? --- p.24 루트는 탐욕스럽게 내 입술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안으로 내려갔다. 그녀에게선 소금물 맛이 났다. 오랫동안 빙의한 경험을 통해 나는 숨이 막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루트를 다시 토해내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그랬다간 목구멍과 입속을 루트가 격하게 손톱으로 긁어대어 내 분홍빛 살점이 갈가리 찢기고 입에 피가 가득해질 뿐이다. --- p.45 그녀는 담배를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내 손에 닿은 그녀의 차가운 손길에 몸속이 갈망으로 죄어들었다. 아흐네스의 짙은 립스틱 자국이 필터에 묻어있었다. 담배를 함께 피우는 일이 이토록 내밀한 일이었다니, 미처 몰랐다. 어떤 면으로 이것은 키스 같았다. 나는 아흐네스의 입술로 촉촉해진 것을 내 입에 넣었다. 그것을 빨아들이고, 폐에 가득 연기를 채웠다. 곧바로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확 사로잡으면서 목구멍이 죄어들었다. 기침이 나오면서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 p.161 아흐네스는 마음껏 애정을 드러내었다. 하루 종일 나에게 소소하게 먹거리를 가져다주었고, 식사 중에는 내 손을 잡고 장난스레 만지작댔으며, 내가 잠자리에 들면 잘 자라고 입을 맞춰주었다. 아흐네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에게 몸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물론 전에도 배고픔과 추위와 고통 같은 감각을, 신체가 겪어야 하는 온갖 소소한 수모들은 느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무시해야 할 것들이었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뼈저리게 느껴질 때는 그냥 참았다. --- p.217 |
|
신비하고 기묘한 세계의 영매인가, 엽기적인 살인자의 뻔뻔한 연기인가?
이성과 본성, 억압과 욕망의 경계에 선 두 여자의 운명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도시에서 죽은 자들과 대화하는 척하며 강령회를 열어 살아가는 영매 소녀 로스. 그녀 곁에는 언제나 반려 혼령 ‘루트’가 함께한다. 피를 나누고 몸을 공유하며 살아온 둘은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자 구원이며, 사랑 그 자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둘은 오랫동안 외롭고 폐쇄된 세계 안에서 상대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견고했던 둘의 세계는 어느 비 오는 날 방문한 아흐네스로 인해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죽은 남편 토마스를 잊지 못해 강령회에 찾아온 아흐네스는 어딘가 기묘하고 불길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리고 그녀 안에도 루트와 비슷한 ‘반려 혼령’이 머물고 있다. 로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흐네스에게 강렬하게 매혹되고, 아흐네스 역시 자신과 반려 혼령을 이해하는 로스에게 점점 깊이 빠져든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는데… 살아있는 여자들과 죽은 존재들이 서로를 갈망하고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사랑은 점차 기이하게 일그러진다. 사랑과 구원이라 믿었던 감정은 어느새 소유욕과 광기로 변하고, 억눌린 욕망과 오래된 상처 속에서 마침내 토마스의 혼령까지 눈을 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