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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악의 생일
2. 즐거운 여행이 되길 3. 감정의 옥수수밭, 기억 보관소, 그리고 이름 없는 문 4. 마법은 하루에 한 번만 5. 엄마의 마지막 날 6. 반짝이는 구두로 안전한 여행을 7. 겁쟁이 사자 8. 네가 초록색으로 보여 9. 소원이 이뤄졌다 10. 하늘정원의 아이 11. 작고 하얀 기억 12. 반짝임이 흐려지기 전에 13. 나를… 보내줘 14. 사랑해, 사랑해 15. 안녕, 서쪽 마녀 16. 운명아, 욕하지 않을게 17. 아직은 에필로그. 그리고 사랑한다고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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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이 신발이 널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텐데도?”
여자가 팔을 휘두르자 넓은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여자에게서는 젖은 이끼 냄새와 마른 낙엽 태우는 듯한 냄새가 났다. “원하는 곳으로요? 뒤꿈치를 세 번 맞부딪치고 외치는 거죠?” “정답.” 비꼬려고 한 말인데 여자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 p.10 “날 이호준의 마음속으로 보내 줘!” 힘껏 외친 순간 방 안의 풍경이 일그러졌고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몸이 허공에 붕 뜨더니 수영장 슬라이드처럼 좁은 통로를 빠르게 미끄러져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물컹물컹해지는 것 같았다. 위아래로 잡아당겨지듯 길쭉하게 늘어났다가, 거대한 손이 반죽을 누르듯 납작해지는 기분. 켁켁, 숨을 쉬기 힘들었다. --- p.27 사아악, 사아악.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커다란 옥수수 잎이 눈앞에 드리워 있었다.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봤다. 보이는 건 나보다 키 큰 옥수수뿐이었다. (중략) 그때 옥수수 사이에서 비쩍 마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푸라기 몸, 비딱하게 쓴 모자. 허수아비였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뇌 없는 허수아비와 닮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낯설지 않았다. 아빠가 주말마다 입던 다 해진 체크 셔츠와 구멍 난 청바지였다. --- pp.29-30 “이번엔 아빠가 화를 참고 있어.”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부짖으며 내려왔다. “엎드려. 내가 쫓아볼게!” 허수아비가 앞으로 나섰다. 까악까악, 내 말 좀 들어! 까악까악, 나도 한계라고! 까마귀들의 울음 속에 아빠의 성난 울부짖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옥수수 사이에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들어본 적 없는 말들이 자꾸만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 p.32 “엄마는… 언제까지나 네 마음속에 있을 거야.”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연보랏빛 바닥에 닿자 그곳에서 꽃잎 같은 작은 파동이 일었다. “사랑해, 사랑해.” 엄마가 솜사탕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아기 때 나를 품에 안은 엄마는 꼭 두 번씩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안개가 조금씩 옅어졌다. 나를 감싸고 있던 온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그곳에서 웅크린 채 한참을 있었다. --- p.148 박경민은 나랑 같은 교복을 입고 놀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벚나무 아래 선 박경민의 어깨 위로 연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았다. 나는 꽃잎을 살포시 집어 들었다. “꽃잎이 붙으면 행운이 찾아온다던데.” “그 행운 너 줄게.” 박경민이 말했다. 우리는 학교를 향해 나란히 걸었다. 마음속 세상을 여행하고 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여긴 어쩌면 먼 미래의 내가 찾아온 기억의 세상이 아닐까? --- p.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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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심은 판타지의 세계를 빌려야만 닿을 수 있다
상처받은 마음의 문을 여는 완벽한 주문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 던져진 십 대의 마음은 종종 길을 잃는다. 남유하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나의 은색 오즈』는 엄마의 죽음과 아빠의 성급한 재혼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상실과 갈등 속에서 길을 잃은 열다섯 소녀 ‘로희’의 내면을 섬세하게 탐구한 청소년 문학이다. 작가는 2018년 『푸른 머리카락』으로 한낙원 과학소설상을 받으며 데뷔한 이래, 단편 「국립존엄보장센터」가 미국 SF 잡지 〈클락스월드〉에 번역 소개되는 등 탄탄한 세계관 설정과 서사적 역량을 입증해 왔다. 또한 『다이웰 주식회사』,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나무가 된 아이와 푸른 노을호』, 『우리 할머니는 사이보그』 등 다수의 도서를 통해 소외된 이들의 감정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온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특유의 장르적 상상력을 십 대의 심리 묘사와 탁월하게 결합해 냈다. 고전 〈오즈의 마법사〉의 매혹적인 변주, 타인의 마음속을 걷다 소설은 주인공 로희가 최악의 생일날 마주친 ‘서쪽 마녀’로부터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의 ‘은색 운동화’를 얻게 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마법은 하루에 한 번만”이라는 제약과, 여행이 안전하지 않으면 운동화의 반짝임이 흐려진다는 규칙은 이야기에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로희는 이 마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빠와 새엄마의 무의식 세계로 과감히 잠입한다. 이 작품의 눈부신 성취는 무형의 감정과 과거의 기억을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으로 구현해 낸 은유의 힘에 있다. 아빠가 슬픔을 억누를 때마다 비가 내리는 ‘감정의 옥수수밭’, 오래된 아픔이 고여 발목을 잡는 ‘슬픔의 웅덩이’,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형상화한 무시무시한 ‘죄책감의 늪’ 등은 독자들에게 흡입력 있는 문학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더불어 로희의 내면 탐험을 돕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는 고전 캐릭터의 단순한 차용을 넘어선다. 이들은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아빠의 결핍을 상징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는 로희의 용기를 북돋는 입체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닫힌 무의식의 끝에서 마주한 묵직한 진실, 그리고 성장의 카타르시스 “색안경을 끼면 세상은 한 가지 색으로만 보이게 된다”는 서쪽 마녀의 경고처럼 소설 전반부의 로희는 분노와 배신감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어른들의 행동을 단편적으로 재단한다. 아빠가 엄마의 호흡기를 고의로 뗐다고 오해하거나, 이수진이 그저 아빠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믿는 식이다. 그러나 은색 운동화를 신고 아빠와 새엄마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 그들이 결코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던 기억의 방에 도달했을 때 로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묵직한 진실과 충돌하게 된다. 도대체 아빠는 왜 그토록 서둘러 새엄마와 재혼했던 것일까? 이수진은 왜 세상의 미움을 자처하면서까지 로희 곁에 남으려 했을까? 작가는 이처럼 오해와 침묵으로 엇갈린 가족의 엉킨 진심을 마법이라는 판타지적 매개체를 통해 서서히 복원해 낸다. 타인의 감정 밑바닥에 자리한 상처를 직접 목도하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로희의 여정은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모든 ‘로희’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 마법에 기대어 타인의 진심을 엿보던 소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더 이상 은색 운동화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누군가의 마음에 강제로 침입하는 대신 “마법의 은색 운동화를 벗고 비로소 자신만의 발로 현실을 걷기 시작”하는 로희의 결말은 먹먹한 감동과 깊은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현실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지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품고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로희의 모습은 짙은 여운을 선사한다. 『나의 은색 오즈』는 예기치 못한 상실과 갈등을 겪은 청소년들이 어떻게 슬픔을 건강하게 애도하고, 타인과 단단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할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이 세상 어딘가에서 슬픔을 안고 오늘도 단단하게 살아갈 모든 ‘로희’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애정 어린 당부처럼 오해의 장벽 앞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십 대 청소년들과 그들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부모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반짝이는 은빛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