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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나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 기분 나쁠 때도 웃었다 분노는 이해하기 쉬웠다 생각은 빨랐고 말은 느렸다 친구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 왕따인 줄 몰랐다 감정을 학습했다 감각은 지나치게 예민했다 시간개념 없이 태어났다 좋아하는 게 달랐다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동족을 찾은 줄 알았다 1 동족을 찾은 줄 알았다 2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를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별에서 온 너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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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을 위한 지구살이 가이드
예스24 청소년 PD 배승연
2026.09.09.
지구에서 고생이 많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여기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잘 살아 보자.
이 단순한 문장이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시간과 고민이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재치 있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 때, 모두 즐거워 보이는데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 나를 불편하다 못해 울렁이게 만드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평생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인간 사회에 섞여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마구 도망치고 싶었다. 작든 크든,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런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청소년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감정을 겪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낯선 세상에서 새로운 일들은 밀려오는데 그 일을 겪는 나 자신도 아직 단단하지 못해서 상처받는다.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자라야 할지도 모르는데 시간은 흘러가고 숨 가쁘게 자라야 한다. 영문을 모르고 이 행성에 태어나버린, 그래서 얼떨결에 이곳에서 살아가게 된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앞서간 이의 항해일지이자 같은 마음을 지닌 친구의 편지처럼 든든하고 다정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곳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아도 이곳에 살 수 있다. 외계 행성을 찾은 방문자의 마음으로 즐겁고 선하게 살아가면 된다. 운이 좋다면 언젠가는 같은 행성에서 찾아온 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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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다. 기다리면서 나누는 밑도 끝도 없는 대화,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흙을 긁으며 보내는 시간이 무리를 무리답게 만든다는 걸. 내가 낭비라고 생각한 시간이 그들에게는 관계를 다지는 의식이었다는 걸.
--- 「나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 중에서 분노, 그거 알아? 너는 까칠하고 따끔거리는 촉감이었어. 포근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너무 뻣뻣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 그래도 난 너를 원망하지 않을래. 너는 지하 감옥으로 자꾸만 내려가던 나를, 경기장으로 끌어올린 힘이었으니까. 안녕. 이제 나는 경기장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어. --- 「분노는 이해하기 쉬웠다」 중에서 한순간 그 애의 얼굴이 굳었다. 하얀 볼이 새빨개지더니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입꼬리는 파라락 떨렸다. 나의 승리라고 확신한 순간, 그 애가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 --- 「친구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 중에서 나는 필순이였다. 학창 시절 따돌림을 당한 거였다. 그들은 나를 노골적으로 밀치거나 놀리지 않았다. 칭찬처럼 들리는 말, 걱정처럼 포장된 말로 돌려서 이야기하며 나를 바깥에 세웠다. 나는 텍스트 그대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놀리는 줄도 몰랐다. 크나큰 충격이었다. 내가 왕따였다는 사실보다, 왕따였다는 사실을 수십 년 동안 몰랐다는 것이. --- 「왕따인 줄 몰랐다」 중에서 지각은 내가 늦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늦는 동안 누군가는 내 빈자리를 계속 의식하고 있다. 단지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다리느라 자기 시간을 조금씩 내준 것이다. 아마도 그때 깨우쳤던 것 같다. 시간 약속은 시간 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관계의 문법이다. --- 「시간개념 없이 태어났다」 중에서 일어난 일을 집요하게 복기하고,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머리로 계산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상하는 건 결국 작가의 일. 그러기에 글쓰기는 내가 지구에서 찾아낸 가장 그럴듯한 생존 방식이다. --- 「동족을 찾은 줄 알았다 2」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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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만들어진 지구인이 아니라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라면? 나는 왜 남들이 웃을 때 왜 같이 웃지 못하지? 왜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왜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려울까? 말은 왜 이렇게 느릴까? 왜 시간 약속도 잘 지키지 못하고, 속옷을 뒤집어 입어야 할까? 나랑 비슷한 사람은 정말 없을까? 어린 시절부터 어딘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감각을 안고 살아온 남유하 작가는 고민 끝에 새롭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내가 애당초 잘못 만들어진 지구인이 아니라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 아닐까? 그래서 지구에서 살아가는 게 하루하루 숨가빴던 거라고. 우주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종족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걸러서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인사치레를 곧이곧대로 알아듣거나, 옷에 붙은 라벨이 거슬려 하루를 망치는 종족. 혼자 있으면 외롭지만 함께 있으면 괴로운 종족이. -9쪽 작가는 지구에서 지구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지구의 규칙을 배웠다. 암기하고 여러 번 반복 학습해 몸에 익혔다. 그렇게 지구에 적응하면서 겪은 온갖 시행 착오를 유쾌하게 풀어 놓는다. 다른 별에서 와서 지구인들과 어울려 사는 게 힘든 누군가에게 진심이 닿기를 바라며. 힘들지만 함께 지구에 적응해 보자고, 여기서 잘 살아 보자고 이야기한다. 지구에서 고생이 많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다가 한 아이가 “야, 그거 있잖아. 그거.” 하면 나머지가 일제히 “아아~” 한다. 그게 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그게 뭔지 알고 있다. 여기서 나만 모르는 것 같아 좌절한다. 아이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 웃겨 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혼자 남는 시간이 많아진다. 대학에 가서도, 회사를 다니면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외로움이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친구가 없어도 괜찮다고 여겼고, 왕따를 당하면서도 왕따인 줄 몰랐다. 나의 삶에는 오래 쓴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처럼 무수한 작은 흠집들이 더해졌다. 문제는 어디가 긁혔는지 그 자리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왜 그들이 그런 발화를 하는가에 집중했다. 텔레파시 능력도 없으면서 남의 생각을 헤아리고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다. 그들이 아닌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건,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며 알게 되었다. - 28쪽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상담을 받고, 병원에서 검사를 해 봐도 명확한 진단명을 찾지는 못했다. 아스퍼거증후군이라고 확신했지만, ‘남색 잉크 한 방울’ 정도의 미미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고, 혹시나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의심했으나 바퀴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동족을 찾고 싶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과정은 흥미진진하게 그려졌지만, 그동안 작가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쉽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내고, 회사 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던 남유하 작가에게 남은 길은 글쓰기밖에 없었다. 글을 쓰면서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글을 쓰며 지구에서 살아가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 일어난 일을 집요하게 복기하고,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머리로 계산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상하는 건 결국 작가의 일. 그러기에 글쓰기는 내가 지구에서 찾아낸 가장 그럴듯한 생존 방식이다. -140쪽 작가가 풀어 놓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꽤 아프게 다가온다. 일평생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사회성 부족, 융통성 없음, 특이함 같은 말로 규정되었던 시간을 보내 온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말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나를 이해하고 세상에 적응하기까지, 남유하 작가의 이 치열한 지구 생존기는 인간관계의 중요한 팁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어딘지 모르게 남들과 다르다는 고민을 해 봤거나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모두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다만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나를 지구에 더 머물게 해 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 타닥타닥, 오늘도 나는 자판을 두드린다. 책과 택배 상자가 가득 찬 방에서 불을 켜는 것도 잊은 채. 여전히 지구의 공기는 희박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숨을 쉰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산다. 그리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 -15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