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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며 새벽을 향해 걷기 011
1⋮기억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가장자리 016 갈망 019 거두절미 022 기억 024 같은 027 골목 028 광장 029 굽은 030 기도 032 극단 036 귀환 038 2⋮그때 나는 죽은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꿈 042 닿는 045 나무 046 낮은 052 노래 056 너머 058 되다 060 딱딱 063 뒷길 066 둥 068 등 070 3⋮우리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막다른 074 먼 077 묘지 078 무덤 084 물꿈 086 발견 088 부끄러움 090 불생불멸 092 블라인드 095 빙빙 098 사람 100 사랑 102 4⋮오른발과 왼발 사이, 당신과 나 사이 사이 106 상세 108 설렘 110 순간 113 스텝퍼 114 스무 살 118 아해 121 앞으로 124 어슬렁어슬렁 126 시장 128 애틋 130 슬픔 134 5⋮세상에 나와 첫 산책은 엄마와 했을 것이다 얼굴 138 엄마 141 여행 144 울음 146 월요일 148 엄마손 151 월정 156 이상 161 작게 164 작은 166 자문 168 6⋮너는 가고 있어라 제멋대로 172 지향 174 창 176 질주 178 천진 181 침묵 184 턱턱 186 토닥토닥 188 헌신 190 흙냄새 192 큰길 194 홀연 195 나아가며 저물녘에 쓰는 편지 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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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시장의 한구석에서 고요를 만나게 될 때, 고요한 묘지의 한구석에서 고요 안의 고요를 만나게 될 때, 그 고요는 둘 다 잘 스며 있다. 묘지에서 만나는 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시장의 고요. 둘 다 잘 삭아 있다. 시장에 스미는 고요와 묘지에 스미는 고요는 닮아 있다.
묘지에서, 시장에서, 고요를 만날 때, 그것이 고요의 맨얼굴 같다고 생각된다. --- 「흙냄새」 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관한 아름다운 산책의 이미지는 지도를 들고 길을 잃는 풍경. 지도를 들고 찾아가는데 길을 잃는다. 지도 안을 들여다보고 가면서 번번이 길을 잃는다. 지도는 버리지 않고 한 손에는 여전히 지도를 든 채 길을 잃는다. 그러나 잃은 길 안에서 뜻밖의 풍경을 발견한다. (…) 사람 위로 하늘도 구름도 드리우고 몸 앞으로 옆으로 처음 보는 길도 생겨나고 그 사람의 상하좌우의 고독과 그림자가 생겨난다. 목적이 될 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조약돌과 무릎뼈는 같은 안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전 생애가 걸릴 수도 있듯이, 한 사람의 풍경을 발견하는 데 전 생애가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이라는 운동성은 가고자 하는 곳과 지금의 위치 사이에 간격이 있어야 가능한 것. 꿈이 존재하는 이유. --- 「사람」 중에서 갤러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내게 묵언을 가르친다. 입 밖으로 자신의 고통을 발설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그것을 잊는 또는 약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른 곳이 아니라 갤러리에서 알게 된다. 고통을 말로 꺼내지 않으면 그것은 내내 자신에게 머문다. 그런 시간 동안 고통이 열정으로 바뀐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통제가 되지 않는 내 목소리를 듣게 되는 날에는 어김없이 갤러리에 간다. --- 「어슬렁어슬렁」 중에서 침묵이라는 방식 속에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안쪽이 훨씬 잘 드러난다. 몸은 적어도 침묵 안에서는 말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 않아도 되니까. 침묵에서 말은 더 감추어지지만 몸은 더 드러나게 되니까.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타나는 것: 몸. 사람은 말속에 있지 않고 몸속에 있다. --- 「침묵」 중에서 한 편의 시 안에서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르게 써서 언어의 안과 겉을 보여주는 힘. 유사한 문장만을 가지고 세계의 역전을 보여주는 힘. 모든 움직임은 ‘도저히’라는 정지 상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언어로 증명하는 힘. 모든 것을 다 뚫고 들어가 끝내 남은 원형까지를 확인시키는 힘. 조사 하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론을 전복시키며 세계의 본질을 꿰뚫는 이 놀라운 아이러니라니! --- 「막다른」 중에서 명동의 이른 아침을 기억한다. 아침 여덟시에서 아홉시 사이의 명동의 길과 고요와 고요 속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소리와 햇빛을. 간혹 막 올려지고 있던 셔터와 비릿하고 알싸한 쇠 냄새와 물미역 같던 명동의 공기를 기억한다. 이른 아침의 명동의 고요 속에 서면 간밤의 소란이 더 잘 느껴졌다. 간밤의 발소리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장소도 존재도 시간도 사라지고 난 뒤가 더 생생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 아직 시작하지 않은 명동의 시간 속에서 갓 나온 신간의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막연하게, 글을 쓰는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매혹이 생겼다. --- 「갈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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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하루에 한 번 꼭 산책을 간다.
걸어야 얼굴이 밝아지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세상에 나와 첫 산책은 엄마와 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 엄마는 그날도 산책 나가고 시인 혼자 마루에 누워 있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어린 엄마와 나를 보았다. 우리는 함께 허공의 반달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사방은 푸른빛이었다. 이렇게 조그만데 어떻게 엄마가 되려고 해? 어린 시인이 물었다(30쪽). 엄마와의 첫 산책에는 풀도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함께했다. “이것 봐” 하면 엄마는 신기하게 그것을 함께 보고 있었으며, 구름을 손으로 가리키면 이미 구름을 잡아두고 있었다(146쪽). 그것은 최초의 혼자 걷기. 그때 시인은, 엄마 있는 소리가 나면 거기로 갔다. 엄마의 두 손을 믿었을 것이다. 아니 믿기 이전 엄마가 그곳에 있었다(142쪽). 그러니, 엄마와 목적 없는 산책을 자주 해야겠다. 최소한은 꼭 해야겠다. 그리 마음먹는다. 엄마가 굽은 허리로 펴지지 않는 무릎으로 마른 몸으로 걷다가 “이 꽃 좀 봐” 그럴 때, 내가 애기 때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보고 있는 시선이 되어야겠다. 엄마의 산책 어딘가에 그늘을 가진 나무로, 나무의 바람으로 있어야겠다(31쪽). 그렇게 엄마와 산책을 나서는 시간은 천천히 걸어야 한다. 엄마는 뒤에서 따라온다. 시인은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는 것에 예민하다. 등은 벗어나는 순간을 가지고 있기에. 또한 등은 헤어지는 순간을 내포하고 있기에(70쪽). 엄마가 앞에 가, 시인이 그리 말해도 엄마는 한사코 그를 앞세우고 한 두 걸음 뒤에 따라온다. 나란히 걷고 있으면 어느새 뒤에 가 있다. 시인이 빨리 걸었는지 엄마가 더 느리게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가 점점 멀어지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내 등 뒤에서 멀어지는 엄마를 보게 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엄마는 등을 보고 따라온다. 등에 눈이 달린다는 말을 알 듯도 하다(191쪽). 그러므로, 산책은 눈이 등에 가 있는 셈. 헤어지고 나서 뒤에서 오래 지켜보는 사람은 헤어지는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와 있는 사람,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등을 보면 안다. 헤어지고 난 뒤의 등은 얼굴보다 훨씬 더 많은, 솔직한 표정을 보여준다(71쪽). 그러므로 선생님들이 가신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곳이 자주 궁금하다. 선생님들께 바싹 붙어 있었던 시인에게 너머라는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 선생님들은 이곳을 어떻게 넘어가셨을까. 이곳에서 저곳 사이 무엇을 보며 건너가셨을까. 소리 하나 없는 침묵으로 내게 무엇을 보라고 하셨던 걸까(59쪽). 태어나고 자라고 다시 소멸해가는 방향을 ‘자연(自然)’이라고 하는데, ‘자연’은 ‘그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족(自足)의 방향을 이미 내장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곳은 가장 끝이 아니라 가장 처음은 아닐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시작되는 시간이 다시 있는 것일까(139쪽). 다만 내가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계속 모르는 것이야말로, 시인을 살게 하는 어떤 힘이 되기도 한다(101쪽). 알지 못한 채로, 오지 않은 시간에 먼저 가보는 것.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가보는 것. 있지도 않은 시간에 가보는 것. 그보다 먼저 그의 먼 시간에 가보는 것. 가서 살이 타고 뼈가 타는 것을 경험하는 것. 그리고 혼자 간 길을 혼자 돌아오는 것, 사랑의 안쪽으로 걸으며, 무수하게 걸으면서(102쪽). 지금 어두운 제 몸을 통과하는 제 언어는 불투명하고 가라앉지도 않았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밝음과 나직하게 몸을 바꾸는 시간은 아직 생각해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대척점으로서 밝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몸인 밝음을 기다리다보면 어느 순간 저물녘처럼 가장 나직하며 가장 격렬한 언어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제 눈앞은 어느덧 어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둠은 출렁이지 않아 창에 제 얼굴이 흐르지도 못한 채 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얼굴을 제 안에 새기는 것을 늘 잊지 않습니다. 선생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는 무겁게 쓰지 말아야지 했는데, 써놓고 보니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제 자신이 못마땅하지만, 그러나 바로 여기가, 제 몸이, 제 언어가 서 있는 지점입니다. (…) 저는 여전히 저물녘이 되어서야 편지를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도 제 몸은 언제나처럼 밝음과 어둠이 몸을 바꾸는 경이의 순간이 어떻게 저토록 나직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휩싸여 있을 것입니다. _「저물녘에 쓰는 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