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AI가 그린 신조형주의가 우리에게 묻는 것
01 저자성의 자리 02 사진, 미디어아트가 받아들여진 길 03 신조형주의가 다시 호명되는 이유 04 검은 상자 속의 화가 05 프롬프트와 학습 데이터 06 아름다움의 두 잣대 07 측정의 결과, 그리고 그 너머 08 벨라미 이후의 경매장과 법정 09 김정기의 그림자, 엘닥슨의 거절 10 새로운 감상자 |
문수진의 다른 상품
|
AI 이미지의 저자를 묻는 일은 한 사람을 지목하는 일이 아니다. 학습 데이터를 만든 익명의 창작자, 모델 개발자, 플랫폼, 프롬프트 입력자, 결과 선별자, 감상자에 이르기까지 분산된 관계망이 한 점의 이미지에 얽혀 있다. 이 분산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미술사 안에서 같은 일이 이미 반복되어 왔었다. AI 이미지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놀라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감탄과 불편함, 호기심과 의심, 기대와 거부감이 동시에 뒤섞인 복합적인 감각이다. 이미지 자체는 충분히 정교하고, 때로는 인간이 만든 어떤 작품보다도 화려하다. 그런데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 이게 정말 예술인가라는 물음이 마지막에 남는다. 그 물음은 이미지의 품질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를 때 무의식적으로 전제해 온 어떤 조건에 대한 흔들림이다. AI가 만든 이미지 앞에서 우리가 흔들리는 자리는 어디인가. 흔들림의 정체는 기술에 대한 무지가 아니다.
---「01_“저자성의 자리”」중에서 그러나 신조형주의처럼 규칙 중심의 양식은 그 거부감이 약하다. 어쩌면 알고리즘과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다. 그 기대 자체가 흥미로운 신호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규칙 중심의 예술과 감정 중심의 예술을 다르게 평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장이 묻고 싶은 것은 신조형주의가 왜 AI 시대에 다시 등장하는가. 그것은 이 사조가 가진 어떤 성질이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과 닿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은 인간이 이 정도라면 AI가 따라올 수 있겠지라고 무의식적으로 골라낸 결과인가. 그리고 이 두 답이 모두 부분적으로 맞다면, 우리가 신조형주의에서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03_“신조형주의가 다시 호명되는 이유”」중에서 비어즐리의 작업은 한 줄로 정리된다. 미적 감정은 측정될 수 없다는 통념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 깨뜨리려는 시도. 그는 미적 감정을 다른 감정과 구분 짓는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 보았고, 그 기준을 통일성·강도·복합성의 세 가지로 정리했다. AI 신조형주의 이미지의 평가를 위한 첫 번째 잣대로 쓰였다. AI 이미지의 미적 가치를 측정하려고 한다는 말 자체가 처음에는 어색하게 들린다. AI는 감정이 없고, 측정은 감정의 가장 안쪽까지 닿지 못하리라는 직관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측정이 감정의 전부를 다루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를 들여다보겠다는 시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어즐리의 세 가지 잣대는 후자의 자리에 서 있다. 이 장이 묻고 싶은 것은 단순하다. 비어즐리의 세 가지 잣대는 AI 이미지에 적용될 때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가리는가. 그리고 그 잣대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좋은 작품이라고 부를 때 무의식적으로 사용해 온 기준의 어느 부분을 비추는가. ---「06_“아름다움의 두 잣대”」중에서 법적으로 화풍 그 자체는 저작권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저작권은 표현을 보호하지만, 아이디어나 양식을 보호하지 않는다. 인상주의자가 인상주의자의 화풍을 가지는 것은 그 양식의 한 사례를 만드는 일이지, 인상주의 자체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같은 논리로, AI가 김정기 스타일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해서 그 자체로 저작권 침해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한 가지 미묘한 자리가 있다. 화풍은 보호되지 않지만, 그 화풍을 김정기라는 고유명과 연결해 호출하는 행위는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작가의 이름은 그 자체로 인격권의 자리에 있고, 사후의 인격권은 한국 민법과 저작권법의 일부 조항에 의해 보호된다. AI가 김정기 스타일이라는 키워드로 이미지를 생성한다는 것은, 결국 작가의 이름과 그의 작업의 결과를 연결시키는 행위다. ---「09_“김정기의 그림자, 엘닥슨의 거절”」중에서 |
|
AI가 만든 몬드리안 앞에서 멈칫할 때
AI 이미지의 등장을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라 예술 판단의 위기로 읽는다. 흰 바탕, 검은 격자, 빨강·노랑·파랑의 사각형. 미드저니가 만든 신조형주의풍 이미지는 몬드리안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책의 관심은 “잘 그렸는가”가 아니다. 인간은 왜 그 이미지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가, 그리고 그 머뭇거림은 무엇을 말하는가다. 저자는 신조형주의를 일종의 실험실로 삼는다. 수직과 수평, 삼원색과 무채색이라는 분명한 규칙이 있기에 AI가 무엇을 학습하고 어디에서 멈추는지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미드저니로 생성한 이미지 100점을 비어즐리의 통일성·강도·복합성, 캐럴의 형식·미적·표현적·영역 속성에 따라 12개 변수로 평가하고 로지스틱 회귀로 분석한다. 그 결과 AI는 형태, 균형, 색채 구성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지만 무채색 처리와 여백, 절제의 미세한 결에서는 거리를 남긴다. 동시에 저자는 사진·미디어아트의 수용사, AI 이미지 시장, 저작권과 인간 저작자 원칙,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변화까지 살핀다. 결론은 기계가 예술가인가라는 성급한 판정이 아니다. 기술은 이미지를 만들지만, 그 이미지에 자리를 부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판단이다. AI가 따라온 자리보다 AI가 닿지 못한 자리를 통해 프롬프트 시대 예술의 기준을 다시 묻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