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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말들
깡통, 기계, 로봇 돌아갈 순 없지만 언제나 현재인 것을 붉은 실 에필로그 추천의 말: 둘 자리를 모르던 작은 진실_이주란 작가 해설: 비커밍 포스트휴먼-마인드웨어 업그레이드_황유지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슬픔 같은 것들만 먹고 자라는 듯한 기억_전민식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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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리에 남아 끝없이 영혼을 갉아먹는 기억을 누군가에게든 내뱉어야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기억상회는 훌륭한 기억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었다.
---p.20 기억상회에 기억 기록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거의 나 이외에 다른 외인이 참석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기 부인은 물론 다른 가족 역시. 그들은 평생을 같이 살 비비고 살아온 부인이나 자식이나 형제들조차 자신의 지난 시절에 대해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열에 아홉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기록이 공개되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영원히 묻히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p.23~24 “듣고 있어? 나모는 차 박사 작품이라고. 인공지능 그러니까 휴머노이드란 말이야. 뭐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나모는 AI인간인 거야. 차 박사가 아들 생각하면서, 아들이 청년이 되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은 외모로 만들어낸 거라고.” ---p.49 “사람은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따로 있다는 거야. 그걸 강요하면 할수록 진실은 몸을 낮추고 숨는다고.” ---p.83 나이 든 노인들은 기억상회에 전화해 기록원을 불러 유언 같은 걸 남겼다. 변호사를 앞에 두고 늘어놓는 유언과는 달랐다. 후대에 전달될 재산에 대해선 다른 방식으로 유언을 남기는 듯했다. 그러니 기억상회의 기록원을 부르는 건 이생에서 말하지 못했던 생의 넋두리 같은 걸 늘어놓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기록 과정이 끝나고 봉인이 된 후 공개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리라. ---p.92 ‘오늘 하루의 기억은 거의 잊히고 불과 1, 2분짜리의 영상이나 이미지만 부패하지 않고 남아서 뇌에 각인되지. 어떤 날은 아무것도 각인되지 않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증명할 만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절망하기도 해. 기억이란 게 그래. 굉장히 많고 넓은 마당을 가진 것 같지만, 사실 하루면 한 사람의 기억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지.’ ---p.105~106 “언니는 참 단순하다. 저 안에 누가 뭘 프로그래밍해놨는지 어떻게 아냐고!” ---p.111 “인간한테는 폐기해버리고 싶은 순간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 영원히 감추고 싶은 순간들이 있어. 그렇다고 그 순간들을 아예 폐기해버리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다워지지 않을 거야.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은 반성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거든. 아름다운 지식이나 효용가치가 있는 지혜나 학습만으로 성장하면……” ---p.151 루미가 서둘러 나간 뒤 나도 일어나려는데 나모는 꼼짝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와 나모가 방에서 나오지 않자 엄마와 루미가 방문 앞으로 다가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루미는 나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척 홱 뒤돌아섰다. 엄마는 잠깐 동안 나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방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리곤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p.216 그동안 기억을 저장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떠났다. 세상에 풀어놓을 수 없는 기억들. 실은 그런 기억들이 그들을 살아가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잔혹했으며 때론 비열했고 서글픈 기억들이. ---p.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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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지 않고 바다로,
그렇게 훌훌 날아가버린… 사람… 기억 『기억상회』의 표면에는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이질적인 공존이 놓여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이면에는 제주 4·3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루시는 꾸준히 속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모에게 질문한다. 왜 내게 온 것이냐고. 왜 나를 보호하려는 것이냐고. 루시가 기억을 담아내는 몇몇 의뢰인의 이야기에 제주 4·3의 기억이 함께한다. 루시는 의뢰인들이 자신과 얽혀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타자기로 가만가만 담아낸다. 기실 끈질기게 묶인 인연 앞에 루시가 보여주는 태도는 이런 인연 앞에 으레 있을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는다. 루시가 자기 가족과 다른 이의 가족, 심지어 자기 가족을 망가뜨린 이의 가족을 모두 같은 태도로 대하는 부분은 전민식 소설이 지향하는 지점을 잘 보여준다. 뻔한 번민과 미움, 쉬운 복수와 용서 따위로 점철되지 않은, 더 크고 깊은 마음을 작가는 그리고 있다. 기억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는 『기억상회』 속 이야기에,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마음을 더하려는 노력, 그건 이 소설을 읽는 이유로 충분하다. 작가의 말: 슬픔 같은 것들만 먹고 자라는 듯한 기억 어떤 기억들은 망각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자라버린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집어버리고 만 거짓말, 오랜 사랑에게 버림받았던 어느 밤, 서울역 한복판에서 어렸던 내가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의 손을 놓쳤던 시간, 몹시 배고파 시장 빵집에서 빵을 훔쳤던 일, 나보다 먼저 떠날 줄 몰랐던 동생에게 악담을 늘어놓았던 그런 기억들……. 잊어버리고 싶고 잊어버려도 좋을 만한 기억들은 질기고도 질겼다. 아프게도 기억은 고통, 쓸쓸함 그리고 슬픔 같은 것들만 먹고 자라는 듯하다. 즐거운 기억들도, 행복한 순간들도 수없이 많았을 텐데 그런 기억들은 희미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프고 슬픈 기억들만 선명해졌다. 기억을 뒤져보면 깊은 곳 어딘가에 기뻤던 순간들도 자작하게 깔려있으련만 그런 기억들은 꽁꽁 숨어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슬퍼하지 않는 건, 그런 기억들이 있기에 앞으론 슬퍼하거나 후회하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_전민식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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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자리를 모르던 작은 진실
그의 소설은 사실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 없다는 것을, 무언가를 잊은 적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 삶이라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는 일임을 믿게 한다. 마음을 돌려, 다시 한 문장을 쓸 수 있게 한다. 말할 수 없었던, 한 번은 꼭 말하고 싶었던 기억과 진실은 때로 불편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마주하게 한다. 너무 아름답기에 슬플 수 있다는 것을, 그 슬픔이 얼굴을 바꿔가며 이어질 거라는 것을, 처음이 때로 마지막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한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그의 소설은 나를 혼자 두지 않는 방식으로, 소설 속 인물들을 내 곁에 두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니까. ⟪기억상회⟫를 읽은 뒤로 한동안 루시와 나모의 타자기 소리를 떠올리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밤엔 혼자서 조용히 한 가지 기억을 세상에 꺼내놓았다. 그리고 알았다. 둘 자리를 모르던 나만의 작은 진실이 이제야 자리를 찾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읽는 일은 현재를 다르게 감각하는, 조금 낯선 내가 되는 경험이 될 것이며, 기쁨과 고통의 나날들, 비밀스럽고 위험했던 시간을 다시 살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전민식의 소설이 만들어놓은 그늘에서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작지만 하나의 존재로서, 기억 앞에서, 두려움 없이, 조금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 이주란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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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 포스트휴먼-마인드웨어 업그레이드
모호한 경계에서 의심스러우나마 낙관을 보는 루시와 달리 루미는 무분별한 팽창 가능성과 비윤리의 가능성을 이유로 기계와 ‘함께’하는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다. 나모로부터 인간의 면모를 보고자 하는 루시도 혼란을 겪는 중이지만 루미의 우려를 과도한 것으로 젖혀둘 수만은 없다. 현실의 AI와 마찬가지로 능동적 학습이 가능한 나모를 두고 통제 불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은 마냥 기우는 아니다. 다만 루미의 염려는 기계 자체에 대한 비윤리성을 전제한다는 면에서 기계는 그 자체 중립적이라는 점만은 짚게 한다. 다만 루시가 대응하는 바대로, 기계의 윤리성은 인간이 비윤리적일 수 있는 한 완전히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것이다. 나모처럼 고도화된 휴머노이드의 형태가 아니라도 우리는 실로 많은 부분을 보철성에 기댄다. 아날로그적으로는 종이와 펜에서부터 휴대전화를 비롯한 전자 디바이스에 이르는 디지털 기록, 저장 매체는 모두 인간의 두뇌를 대리한다. 거기에 안경에서부터 의치나 의족, 휠체어 등 우리 존재가 보철성에 기대는 만큼 인간의 사이보그화는 사실일뿐더러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키메라(chimera), 사이보그다. 이때, 사이보그란 이질적인 것들이 잔뜩 뒤엉킨, 정보과학 시대의 잡종적인 주체성을 상징한다. - 황유지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