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주 운명 교향곡
1악장 라 캄파넬라 2악장 메피스토 왈츠 3악장 엘리제를 위하여 4악장 월광 소나타 5악장 파우스트 교향곡 6악장 장송 행진곡 7악장 다시, 라 캄파넬라 프로그램 북 작가의 말 |
Woo Shin-young,禹臣映
우신영의 다른 상품
|
천식을 앓던 나 때문에 엄마는 학위도 포기했다. 큰 희생을 치러 가며 키운 나는 기대에 못 미쳤다. 기저귀도 못 뗀 나를 피아노 의자에 앉혀 보았지만 악보에 침만 질질 흘릴 뿐. 아빠 닮아 머리라도 좋으려나 싶어 영재 검사를 해 보니 3퍼센트라는 평범한 숫자가 나왔다. 100명 중에 3명, 33.3명 중의 1명이라면 학급 1등 정도 아닌가! 절망한 엄마가 나보다 탁수현을 사랑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 p.35 “이 메피스토 님과 계약만 하면 넌 너희 엄마가 원하는 최우수 인간이 될 거야. 백설희 자신이 되려고 했던 그런 존재 말이야. 그럼 탁수현 대신 널 바라봐 주겠지. 그뿐일까. 맨날 서재에 틀어박혀 글자만 보던 너희 아빠도 너를 봐 줄 거고.” --- p.72 “나도 엄마 아빠 공부 타령 싫지만 다 우리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지. 부모한테 자식은 꺼내 놓은 심장이라잖아.” 래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기엔 애들 심장 터지도록 달리게 하는 경마장 같은데. 이 동네.” 수현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래현이 넌 애가 너무 래디컬해.” “래디컬? 그게 무슨 뜻이야, 탁수현?” “극단적이라고.” “흥. 메디컬에만 미쳐 있는 금마고가 더 극단적이야.” --- p.134 “그래, 해 봐. 탁수현. 마음가는 대로 쳐 봐. 건반에서 길 잃어도 돼. 내가 같이 길 찾으러 다녀 줄 테니까.” 래현이 자기 손수건을 삼각형으로 접더니 수현의 가슴에 행커치프처럼 꽂아 주었다. --- p.209 “그럼 이 마의산 산길이 다 우리 거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하아, 기래현. 도대체 네 기세의 비결이 뭐야?” 래현이 입을 쫙 벌리며 덧니를 가리켰다. “바로 요거지. 도깨비 뿔보다 단단한 이 덧니. 보철로도 교정할 수 없는 영산 촌닭의 기세!” 나와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p.241 |
|
“일단 길을 잃어 봐야 하는 걸지도.
건반에서든 산에서든.” 너를 따라가다 나를 잃었다면 그 끝엔 뭐가 있을까? 학생들의 현대소설 해석 능력을 함양하고 국어교육 과정을 보완, 발전시키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며 대학에서 예비 국어 교사를 양성해 오던 우신영은 2024년 소설과 동화 부문 공모전에서 각각 큰 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 깔끔한 유리로 가득한 도시 이면에 고층 빌딩을 청소하다가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는 책상물림에 머무르고 있다는 부채감 속에서 창작을 시작했다고 밝힌 작가의 인터뷰는 마치 출사표와도 같았다. 그간 우신영은 현대 도시 생활자를 짓누르는 억압과 욕망, 사회적 존재 조건에서 비롯한 체념과 히스테리, 시선의 일상적 폭력 속에 가두어진 식욕 등을 다룬 두 편의 문제작 『시티 뷰』, 『죽음과 크림빵』을 출간하였을 뿐 아니라, 초등 4학년 교과서 수록작인 동화 『언제나 다정 죽집』을 통해서도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짚으며 관점이 살아 있는 작품들을 상자해 왔다. 그의 첫 청소년 소설 『대치동 1등급 고미정이 망하면』은 무한 경쟁 트랙에 올라온 아이들의 불안과 극복 서사를 다루며 서울 제1학군의 풍속도를 하이퍼리얼리즘적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우신영의 두 번째 청소년 소설 『블랙 푸들』은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고전 『파우스트』와 만나 판타지적으로 전개되는 대담하고도 경쾌한 소설이다. 주인공 표우수는 엄격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친구 수현을 향한 질투에 짓눌려 끝내 악마와의 계약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친구들의 꾸준한 애정과 스스로 깨달아가는 삶의 이해들로 조금씩 성장을 향해 나아간다. 청소년이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감정들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추동하는 구조와 내면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고전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블랙 푸들』이 우리 청소년 문학의 새 성취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베토벤보다 무거운 ‘운명’에 눌린 소년 아무리 도망가도 악착같이 쫓아와 내 앞에 서 있는 그 녀석. 내 단잠과 평화를 몰수해 간 나의 비극적 〈운명 교향곡〉. 내게서 엄마를 훔쳐 가고, 피아노를 가져가고, ‘G’, 그녀를 앗아 가고. 조각처럼 아름다운 손이 빚어내는 선율에 목이 졸리며 생각한다. (p. 11) 살리에리에게 모차르트가 있었다면 표우수에게는 탁수현이 있다. 탁월한 능력과 수려한 외모를 갖춘 일생일대의 라이벌은 피아노 학원 원장이자 우수의 엄마인 백설희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공부, 피아노 연주, 사교성 어떤 분야도 도무지 수현을 이길 수가 없는 우수는 지독한 스트레스를 머리카락 뽑는 것으로 푼다. 철저히 통제된 식단과 엄격한 훈육을 고집하는 엄마, 밤마다 야근으로 도피하는 아빠 사이에서 우수는 결점 하나 없는 라이벌과의 상상 스파링으로 밤을 지새운다. “버둥댈수록 빠져드는 질투의 늪으로 당신 등을 떠미는 검은 발바닥. 악의도 자각도 없이 당신을 패배시키는 〈운명 교향곡〉”(p. 12). 열일곱 여린 생을 짓누르는 운명이 가혹하다. 검둥개와 추는 ‘메피스토 왈츠’ “이 메피스토 님과 계약만 하면 넌 너희 엄마가 원하는 최우수 인간이 될 거야. 백설희 자신이 되려고 했던 그런 존재 말이야. 그럼 탁수현 대신 널 바라봐 주겠지. 그뿐일까. 맨날 서재에 틀어박혀 글자만 보던 너희 아빠도 너를 봐 줄 거고.” (p. 72) 어느 깊은 밤 악마의 춤곡 〈메피스토 왈츠〉가 들려온다. 그리고 방 한복판에 나타난 구불구불한 털로 덮인 검둥개, 블랙 푸들의 모습을 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등장. 초록색 알약을 건네며 이 약을 먹으면 그토록 시기했던 탁수현의 능력을 옮겨 올 수 있다고 속삭인다. 단, 일단 시작하면 복약을 멈출 수 없고 ‘멈추어라!’고 외치는 순간 영혼을 악마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계약 조건이 붙는다. 순간 우수의 머릿속에서는 모두의 주목을 얻고, 엄마에게 인정받으며, 당당히 ‘주인공’이 되는 삶이 펼쳐진다. 우수는 계약을 받아들이고, 블랙 푸들은 계약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로 우수의 가슴에 초록색 멍을 새긴다. 금단을 베어 문 에덴 빌딩의 아이들 혼자서 도달하는 완벽함은 불가능하지만, 여럿이 만들어 가는 완전함은 가능하다는 것을. 가끔 서로를 질투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함께 바라볼 창공의 별이 있다는 것을. 음악이라는 별, 우정이라는 별, 사랑이라는 별. 악마처럼 검은 밤에도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친구일 것이다. (p. 237) 초록색 알약을 먹으며 우수는 자신이 바랐던 삶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고, 어떤 문제든 어렵지 않게 풀리며, 오랜만에 엄마 옆에서 피아노를 완벽하게 연주하여 칭찬도 받는다. 하지만 점점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며, 끝내 친구들과도 크게 부딪치고 만다. 에덴 빌딩 건물주부터 피아노 학원, 치과, 약국, 미장원집 아이들이 모여 이룬 ‘에덴 키즈’들의 오랜 우정은 그렇게 위기를 맞는다. 긴장이 절정에 이른 수현의 콩쿠르 날, 아이들은 결국 각자 숨기고 있던 결핍과 불안을 드러내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서로의 손을 잡는 결정을 한다. 질투하던 상대에게 손을 내밀고, 경쟁하던 친구의 아픔을 들여다보며, 우수는 처음으로 ‘이기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된다. 스스로를 바라보고 잘못과 부끄러움을 깨닫는 과정은 아프지만, 그렇게 억눌리고 현혹된 나를 이겨서 진짜 자신을 되찾는 성장을 우신영은 한바탕 아름다운 불놀이로 그려낸다. 정념의 미로에 빠진 자신과 친구를 건져 서로를 업고 돌보며 돌아온 이들은 이전과 같은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도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이 눈부신 성장담이 경쾌하게 세상을 향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