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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5
연표 18 도입 한국과 제국의 전통 제국의 모습ㆍ26 | 한중관계사 속 의례와 수사ㆍ33 제국 국가가 아닌 제국 전통ㆍ37 외교의 레퍼토리: 접근 방식과 출처ㆍ47 1부 | 공유된 과거 1장 위대한 자를 섬기다 사대와 유원ㆍ65 | 외교 표문ㆍ72 ‘제통 전승’을 인정하다ㆍ78 | 명나라 표전문 사건ㆍ86 2장 권위의 조건들 실지회복주의의 그늘ㆍ99 | 의례 참월ㆍ104 주권으로서의 ‘성교’ㆍ111 | 세종의 하늘ㆍ117 세종의 알파벳ㆍ123 | 세종의 악사들ㆍ129 2부 | 외교의 실천 3장 겉모습의 이면 수양의 사명ㆍ144 | 요동을 통하는 길ㆍ147 | 황제의 조정에서ㆍ152 이중적 진실ㆍ155 | 책봉을 받다ㆍ165 4장 제국의 이름으로 황실과 경쟁하다: 1459년 진가유의 사행ㆍ177 낭발아한의 죽음: 장녕의 1460년 사행ㆍ180 중개자로서의 명: 마감의 1461년 사행ㆍ186 정의로운 전쟁: 건주에 대한 공격ㆍ197 3부 | 에큐메니컬 경계 5장 제국을 구슬리다 황제의 우월감ㆍ215 | 중개인의 몫ㆍ219 | 관료의 생각ㆍ226 6장 조선을 표현하다 바다를 표류하다ㆍ244 | 변무 운동ㆍ249 | 문 밖에 서다ㆍ261 7장 의례를 다투다 불안정한 신호들ㆍ272 | 교외에서의 영접ㆍ276 왕의 면복ㆍ283 | 말로 오랑캐를 복종시키다ㆍ293 4부 | 문장의 제국 8장 눈부시게 빛나는 꽃들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사행시ㆍ317 | 산수와 역사ㆍ324 동점지화인가, 동방지화인가?ㆍ331 | 『시경』의 재현ㆍ340 9장 사신의 미덕 기생을 물리치다ㆍ352 | 평판의 정치학ㆍ360 상상된 정자들ㆍ371 10장 복종하지 않는 동방 기자신화의 설화 체계ㆍ381 | 공간의 생산ㆍ388 조작된 고대ㆍ394 | 고전의 재해석ㆍ402 결론 도덕적 제국이라는 신화 임진전쟁과 그 이후ㆍ415 과거에는 ‘올바른 이름’이 없다ㆍ423 왕조와 통치자들 431 미주 436 참고문헌 516 옮긴이 후기 552 찾아보기 575 |
Sixiang Wang
Ilsoo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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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대 민족주의적 관점(중국이든 한국이든)에서 보면 다소 역설적이지만, 조선의 외교 전략은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중국이 상상해 온 ‘제국’의 모습 자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이는 오늘날 철학, 정치학, 국제관계학 같은 학문 분야에서 논의되는 제국의 관념, 혹은 대중문화와 인터넷 담론 속에서 재현되는 중화 제국의 이미지들 역시, 그 일부는 조선의 사신과 관료들이 중화 제국을 특정한 시각으로 묘사하려는 오랜 노력의 결과였음을 시사한다. 이 책은 그러한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길고 미묘하며 복합적인 흐름 속에서 드러내고자 했다.
--- p.12 이러한 수사적 전략은 조선의 외교 기록에 생생한 제국의 존재감을 유지했다. 조선의 외교 관행에서 구체화된 이 기록은 외교 서한, 시집, 여행기, 편람, 사절 보고서 등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후대에 참고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단 하나의 행동이나 순간적인 행위라도 기록으로 남겨지면 미래에 준거할 수 있는 선례가 되었다. 이러한 누적 효과를 통해 외교 활동 기록은 그들이 개입하고자 했던 바로 그 제국 전통의 일부가 되었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자료들과 실록을 비롯한 조선과 명나라의 공식적인 편년체 사료를 바탕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이 자료들은 조선왕조가 수동적인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필수적인 이해당사자로서 명 제국의 건설 과정에 어떻게 동참했는지를 보여준다. --- p.50 1413년 영락제가 몽골을 공격했을 때, 명 제국의 실지회복주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명나라 궁궐에서 일하던 조선 태생의 환관 윤봉尹鳳(1400-1450년 활동)은 몽골 원정이 끝나면 황제가 바다를 통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3천 척의 군함을 건조하도록 명령할 것이라고 조선에 알렸다. 신빙성이 불확실한 정보였지만 이 이야기는 태종의 조정을 경악하게 했다. 일부 신하들은 이것이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도 침략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압록강과 조선 동남부 해안에 군관들을 파견하여 전쟁 준비를 하자고 제언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위협에 대해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태종은, 황제가 “최근 조선을 대함에 있어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논쟁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조선의 대신 하륜河崙(1348-1416)은 왕에게 역대 황제들이 경쟁자들에게 거짓 약속을 건넨 뒤, 하나하나 공격해 나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하륜은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秦始皇帝(재위 기원전 221-210년)의 이름만 언급했지만, 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분할 정복 전략을 취한 사례는 부지기수였다. 하륜은 왕에게 수도를 요새화할 것을 강력히 주청했고, 다른 신하는 일본과 방어 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 p.100~101 조선은 이 순간을 기다려왔으며, 변경의 군대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공격에 대비해 왔다. 명군은 건주의 허약한 저항을 격파했으며, 약 1만 명의 조선군은 이만주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그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고납합古納哈과 여러 친척들을 죽였다. 조선은 총 286명을 참수하고 가축을 도살했으며, 수백 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그리고 조선은 참수된 이만주의 수급과 다른 자들의 왼쪽 귀, 그리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한 포로들을 명나라로 보냈다. --- p.197 이렇게 모순적이면서도 동시에 존재한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조율이 필요했다. 1508년 명나라 사신들이 중종의 책봉을 위해 왔을 때, 그들은 ‘퇴위한 왕’에게 줄 황실의 선물을 가져왔다. 그 무렵 연산군은 이미 죽은 지 거의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신들이 ‘병든 왕’을 방문하겠다고 말하자, 조선 관리들은 이를 거부하며 (지시받은 대로) 왕이 “일상생활에서 전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라고 알렸다. 그는 혼자서 음식물 섭취나 대소변 조절조차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내궁에 머물며 대비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왕은 황실의 사신을 맞이할 형편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퇴위(그리고 계속된 존재)는 조선과 명나라가 공유하는 외교적 사실이 되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명나라 사신들은 계속해서 ‘퇴위한 왕’에게 선물을 가져왔고, 조선은 연산군이 살아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 p.251 이 고발로 인해 조선 출신 환관을 사신으로 파견하는 것에 대한 공식적인 유예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곧 해제되었거나 애초에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81년, 조선 출신 환관 정동이 조선으로 갔을 때, 그는 10년 전 후영이 문제 삼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 정동이 궁궐에서 왕을 접견했을 때, 그는 조선 국왕이 남향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그러한 “선례를 어기는 행위”가 조선이 “여진족이나 몽골족과 다를 바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정동은 자신이 조선의 ‘토민土民’이기에 ‘군신의 예’를 지키기 위해 ‘북향’하는 것이 옳다고 반박했다. 그런 다음 정동은 동행한 다른 조선 출신 환관들을 이끌고 조선 왕에게 절했다. 그들은 조선의 통치자가 절을 받아들일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한 채 바닥에 엎드린 채로 머물렀다. --- p.275 많은 사신들이 비슷한 시를 썼지만, 고윤은 그중에서도 유독 노골적인 위선으로 인해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고윤은 세속적인 재물과 흠잡을 데없는 명성을 모두 갈망했다. 상투 가발부터 식기까지 고윤은 “끊임없이 물건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윤은 대중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물건으로만 제한하는 데도 신중을 기했다. 그랬기에 왕이 그에게 자루에 담기에 는 너무 큰 물건이었던 말과 안장을 주었을 때, 고윤은 서거정의 예측대로 시를 지어 거절했다. 서거정은 이러한 행동을 “기만적이고 배신적이며, 사신으로서의 체통을 잃은 것”이며,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이렇게 이럴 수가 있을까”라고 적었다. 젊은 서거정에게 더욱 화가 치밀었던 것은 조선 관리들이 고윤의 허세에 비위 맞추어 주었다는 점이었다. 서거정은 한탄하며 “어찌 조선이 약소하다 한들 한 사람도 시비를 분별할 자가 단 한 명도 없어, (고윤이) 감히 이처럼 속인단 말인가”라고 적었다. --- p.370 이렇게 경쟁하는 민족주의의 이면에는 깊은 아이러니가 있다. 한국 민족사에서 기자를 배제하려는 움직임과, 중국의 영토주권이나 문화적 영향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자의 역사성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은 모두 기자신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양측 모두 기자를 ‘중국’을 대변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맥락에서 기자신화를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며, 이는 식민지와 탈식민지, 그리고 민족주의적 맥락이 기자의 모든 상징적 의미를 박탈하고, 기자를 쇠퇴한 ‘중국’ 제국 체제를 가리키는 텅 빈 이정표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공간을 조작하여 자국과 기자의 연관성을 강화하고, 이를 명나라 사신들로부터 인정받으려 했다. ‘중국’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기자는 조선의 엘리트들에게 조선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대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계보를 제시했다. 사실 기자가 수행한 역사적 기능은 바로 후대 비평가들이 비판했던 그것과 정반대였다. 즉, 중국과 구별되는 조선의 독립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 p.411~412 제국에 포함되는 것은 제국을 설득하는 데 필수 조건이었다. 수 세기 동안 조선의 엘리트들은 외부인이 아닌 이해관계자로서 제국적 전통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일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아이러니는 중국의 도덕적 제국 신화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부분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조선 외교관들이 중국의 제국적 선조들에게 그 신화를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신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쏟아진 엄청난 양의 수사와 행해진 의례들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조선 사절과 문서 작성자들이 애초에 ‘도덕적 제국’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황제와 그 대리인들에게 조선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이야말로 제국이 되는 최선의 길임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 p.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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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와 의례를 통한 조선의 지능적인 대중국 외교
이 책의 시작점인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등장은 고려와 조선에 실존적 위협이었다. 1394년, 조선의 국왕이 황제의 신하로 인정하는 새로운 인장과 고명을 요청했을 때, 홍무제는 “경솔함, 무례, 모욕이 섞여 있다.”며 조선 사절들을 구금, 매질하거나 귀양을 보냈다. 나아가 서한 작성자인 정도전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가 조선에 ‘자위성교(自爲聲敎)’를 하라고 했던 것은, 조선을 오랑캐 취급하며 조공 받을 가치도 없다며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 영락제가 베트남을 침공하고 몽골을 원정한 것처럼, 먼 옛날 한사군을 설치했듯 옛 영토 회복을 위한 군사적 침공도 할 수 있다며 위협한 것이기도 했다.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을 겪은 터에, 조선은 중국이 통일된 이상 핵심 지역인 북중국 평원과 지리적으로 이어져 있는 너무나 가까웠다. 따라서 중국에 ‘강대강’으로 맞설 수 없었다. 마치 코끼리와 함께 잠을 자는 것 같은 상황에서, 조선은 긴장하며 외교적으로 대응했다. 여기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의 군신들은 때때로 중국 황제의 가장 충순한 신하를 자처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가장 회피하고 싶은 이‘사대’를 어떻게 봐야 할까? 기존 위계질서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일 뿐일까? 이러한 틀로서는 조선의 의례 및 수사 활동은 기껏해야 정치 이념의 부수적 반영에 불과할 것이다. 또 조선 조정이 외교적 노력의 대부분을 여기에 집중했으므로 그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조선의 주체성을 선험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왕쓰샹은 200여년 동안 이어진 조선과 명의 유례없는 긴 평화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외교의 수사와 의례에 쏟은 결과이며, 이는‘조선이 만든’ 것이라 강조한다. ‘사대’와 ‘자소’가 고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바로 약소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고, 조선 또한 고전적 모델에 따라 정해진 설계도를 따르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조선-명 외교 담론에서 ‘사대’가 공공연했던 것은 외교의 수사적 구체화의 결과로, 조선의 외교관들(과 명나라 대담자들)이 사대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규범과 선례를 만들어낸 ‘의도적인 산물’임을 강조한다.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와 같은 세대로, 한국계 미국인으로 북미에서 한국사를 공부한 옮긴이 조일수(미 브랜다이스대 연구원)는,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의 주둔으로, 북한을 제외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국의 침략을 상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사대’에 대한 조선과 21세기 한국의 인식 간극을 키웠다고 옮긴이 후기에서 밝힌다. 또한, 한국 학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주장, 즉 중국이 처음부터 문화적인 기준에 따라 조선을 특별 대우했다거나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질서가 서양이나 일본에 비해서 평화주의적이라는 주장은 조선이 사대주의에 빠졌다는 주장만큼이나 결과론적이며 실증될 수 없다며 예리하게 비판한다. 더불어 이 책이 기존의 ‘한중’관계사나 ‘중한’관계사와 다른 역사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조선의 전략은 제국 건설에 참여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여기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이 빛을 발한다. 조선과 명 관계의 특성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 약자인 조선은 명나라와 단순히 일개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제국 전통’의 무게를 등에 업고 고대의 과거를 주장하는 경쟁자로 맞서는 방법을 통해 조선의 지위를 협상해 갔다. 조선의 입장에서 효과적인 외교란 고토를 회복하려는 명나라의 야망을 물리치고, 보편적 권위의 상징에 대한 제국의 질투 어린 독점을 해소하며, 공동의 국경을 둘러싼 갈등을 피하고, 경제적·정치적 접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은 갈등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왕권을 보존하고 명의 주장을 제한할 수 있는 포용 전략을 모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략은 제국 건설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자신보다 20배나 큰 이웃 나라를 마주하며 거대한 힘의 차이를 실감할 때, 제국 건설 참여는 약자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방향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 외교의 의례 및 기록 관행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을 형성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대의 역설, 조선이 만든』은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외교를 단순하게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조선왕조의 외교 전략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역사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선례는 송나라가 아닌 요, 금, 원 비한족 왕조에서, 조공 관행은 몽골-고려 시대에서 유래했다 이 책은 13세기부터 17세기 전반까지와 동아시아 전역을 시공간으로 한다. 책의 시작은 조·명 관계의 전사(前史)를 통해 공유된 제국 전통이 어떻게 외교적 지침이나 갈등의 원인이 되었는지 보여준 다. 양국 모두 불안정했던 조선왕조로 이어진 서술에서 흥미로운 점은 조선이 취사 채택한‘제국 전승’이 송나라 같은 중국식 관행이 아닌 요, 금, 원 등 북방의 비한족 왕조와의 대면에서 나왔으며, 조선-명의 조공 관행, 예를 들어, 국왕의 ‘교외 영접’이나 사신이 상석인 남쪽을 향해 앉는 의례 등 대부분이 몽골-고려 시대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선례를 선별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도덕적 제국의 상을 그려냈고, 제국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사대의 역설, 조선이 만든』은 국왕과 황제의 결정보다 그 사이를 소통했던 사신들과 통역관 같은 양국의 중개자와 그들의 수사와 의례에 초점을 맞추며, 평화 시대로 보이지만 무수한 변곡점을 맞았던 조선 전기, 200여 년에 걸친 조선과 명의 외교사를 풀어낸다. 명나라 표전문 사건, 의례 참월, 왕위 찬탈, 책봉, 여진 정벌 등 중요한 외교 사안에서 천문, 한글, 여성 악사, 기생, 선물, 난파선 처리, 금은 조공, 무기 거래, 이동의 자유, 그리고 역사 서술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사절과 관리들이 사실상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안과 사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어떤 수사적·의례적 전략을 사용했는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15세기와 16세기에 등장한 ‘도덕적 제국’이라는 신화가 그 이후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조선이 제국과 교류하고 제국적 전통에 개입한 것이 한국사의 흐름을 변화시켰을까? 임진왜란이란 예측 불가능한 전쟁이 터졌을 때,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방어하는 데 역할을 한 것은, 그동안 조선-명 질서의 견고함을 입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명 제국에 200년 동안 투자한 것은, 유사시 명군을 소집하여 조선을 방어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은 중원과 북방의 위협이었고, 이를 이미 막아냈기에 권근, 변계량, 신숙주, 서거정 등 15세기 조선 외교의 설계자들은 명의 원군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대의 역설, 조선이 만든』은 결론에서 임진왜란의 발발부터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기까지 조선-명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결국 파탄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좇으며, 한중 관계의 길고 미묘하며 복합적인 흐름을 마무리한다. 미국의 절대 위치가 흔들리고 중국의 부상이 부딪치는 동아시아의 전환기를 맞아, 조선과 같이 중간 정도의 힘을 지닌 한국이 어떻게 생존을 도모하며 미래를 열어야 할지 조선의 전략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조선 출신의 경계인들, 공녀와 환관에 주목 『사대의 역설, 조선이 만든』이 흥미로운 또 다른 주제는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조선 출신 ‘경계인’들이다. 명나라에 보내졌던 친언니가 영락제를 따라 순장 당한 이후에도 오빠에 의해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던 한계란韓桂蘭(1410-1483)을 비롯한 공녀들도 있고, 정동鄭同(1415?-1483)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들도 나온다. 자신이 팔아넘겨졌다고 생각한 한계란은 오빠를 비롯한 친정 가족들을 저주했고, 약소국에서 태어난 데다 미천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면 남성성을 잃지는 않았을 소년들은 비자발적으로 거세당해 중국으로 보내지면서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한계란은 조선에 있던 그녀의 친족들과 함께 조선과 명나라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조선 측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조선 출신 환관들은 명나라의 사절단을 이끌고 조선을 오가며 양국 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했다. 이 책을 옮긴 조일수는 “한국 학자들은 이들이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면이 있다고 하면서도 특히 환관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협조마저도 물질적인 보상을 바란 의도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들의 ‘탐욕’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시각에서 이들은 부모의 나라마저 자신의 사익을 위해 팔아먹은 도덕적 단죄斷罪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가 책(7장)에서 지적하듯, 그들이 명나라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음에도 때때로 조선의 왕에게 절을 올리며 본래 조선 사람임을 말한 그들의 고국에 대한 애정 표현은 실제 정서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은이의 말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 급우, 친구, 이웃들과의 만남을 통해 필자는,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중국과 미국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깨달았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기독교와 불교, 쌀과 햄버거, 알파벳과 한자, 효심 깊은 아이들과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공존하고 있다. 한국은 권위주의의 유산과 씨름하면서도 활기찬 민주주의를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들은 필자의 세상을 가렸던 이분법적 시각을 벗겨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모든 젊은이들처럼, 필자 또한 자신을 성장하게 하는 것들에 매료되었다. 옮긴이의 말 스스로 ‘강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국민들에게 ‘약소국’으로서의 역사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강대국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역사의 전개에서 약소국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으며, “꼬리가 개를 흔든다.”라는 영어 숙어가 나타내듯, 약소국의 기민한 움직임과 전략에 강대국이 휘둘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천하’나 ‘화華’ 같은 개념에 나타나는 보편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제한이 있는 모순적 지평을 지적하며 이 책을 시작하는데, 그 주장의 핵심은 조선이 그 모순을 지능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