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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2
· 중국에서 · 성도에서 보내는 엄마의 편지 ·10 · 고구려 유적지를 가다 ·24 · 일본에서 · 식민의 상처를 안고 ·46 · 육각정을 반환하라 ·49 · 조선인의 울음, 귀 무덤·코 무덤 ·56 · 원폭에 멈춘 히로시마의 시계 ·59 · 사찰의 종소리를 따라 ·66 · 필리핀에서 · 엄마도 어학연수를 ·78 · 유럽, 머무름 · 오래된 풍경 속으로 ·90 · 침묵 속에 서 있는 스톤헨지의 평원 ·95 · 천 년의 제국 콜로세움에서 ·98 · 화가들의 이야기, 오르세 미술관 ·100 · 암스테르담에서 길을 잃다 ·105 · 한국에서 · 강물 되어 흐르는 단종의 눈물, 영월에서 ·114 · 세월은 가도 아픔은 거창에 ·126 · 울릉도, 그리고 독도를 가다 ·139 · 팔만대장경의 숨결 ·155 · 잊힌 왕국, 대가야의 소리 ·163 · 돌다리 만년교 위에 서서 ·168 · 물안개 피는 우포늪 ·172 · 조선의 냉장고, 석빙고 ·177 · 권력의 정원 청남대를 걸으며 ·181 · 금병산의 가을, 김유정 문학관 ·186 · 곰배령 가는 길 ·193 · 어둠의 땅굴을 들어가며 ·198 · 평화의 마을 통일촌에 들어 ·202 · 경주, 대구의 선비처럼 ·204 · 소록도의 회초리 ·228 · 안동에 귀 기울이며 ·235 · 번잡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개심사에서 ·252 · 천 년의 숨결, 북한산을 오르며 ·257 ·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 지중해의 검은 대지 란사로테 ·266 · 나를 돌아보며 ·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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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태양의 도움 없이도 지구는 빛을 낼 수 있을까…?
어둠이 세상을 덮어도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너희들의 등불이 될 것이다. **성도에서 보내는 엄마의 편지 재이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헤어져 보낸 검은 밤들이 두렵지는 않은지 모르겠구나. 모든 생각을 너에게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성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는 아주 사소한 일로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관광객인 우리 일행의 일정에 마음이 급했던 가이드가 서둘러 이동하다 공항 여직원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직원의 스타킹이 조금 찢어진 것 같았다. 직원은 가이드에게 항의를 했지만 가이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직원은 사과를 요구하며 우리의 이동을 막았다. 가이드는 뒤늦게 사과했지만 직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국 영사관 직원이 나와서 해결한 후에야 유쾌하지 않은 마음을 안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겪은 작은 소동은 중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물론 한 사람의 행동을 한 나라 전체의 모습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때로 그 나라의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조금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참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품격도 지키고 서로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반복되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린다. 눈앞의 실익을 따지기 전에, 사람을 대할 때는 먼저 겸손한 말과 태도로 마음을 전해야 한다. 결국 사람의 품위는 갈등의 순간에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 드러나는 법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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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모든 생명의 근본 원리는 사는 것”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나는 단지 삶을 지탱하려고만 애썼다. 보잘것없이 강한 채 버티려고만 했다. 넘어지지 않으면 잘 사는 걸까? 그런 질문에 답을 구하지 못한 채 표류했던 긴 시간들이 있었다. 이렇게 좋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아이들은 나를 붙들고 허우적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매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아이들에 의지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햇살이 투명한 날, 차가운 바람이 부는 호숫가에 앉아 지나간 날들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돌아본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지만 봄은 성급히 다가오곤 했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면 더욱 조급해진 나는,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 채 환영받지 못한 문은 쉼 없이 두드려야 했다. 구직을 위해 경쟁의 장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가로막았던 것은 연령과 성별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기준이었다. 내 나이 겨우 40대 초반이었다. 결코 노동시장에서 물러날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나이는 곧 경쟁력의 한계로 재단되었고 노동의 가치 또한 남성과 다른 기준으로 구별되었다. 나는 자식이 살아갈 세상에서 내 경험을 단순한 개인의 실패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여성에게 가혹했던 고용 구조와 사회 인식이 얼마나 큰 장벽이었는지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여성으로서 존중받지 못했던 경험들을 여기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다. 단지 내 일 중의 하나였던 유적지를 답사하며 긴 침묵의 길 위에서 홀로 들었던 수많은 속삭임의 일부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내느라 애쓴 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또 한 시대가 저물어간 엄마로서, 이 작은 고백이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딸들에게 추억처럼 남기를 바라며 써내려갔던 편지들을 다시 펼쳐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