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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5
제1부 I 봄이 오는 소리 꽃바람 일던 날 17 어느 봄날의 일기 21 꽃을 피우는 마음 25 꽃의 영혼으로 30 꽃이 피는 향교 32 살구꽃 38 봄을 기다리며 43 곡선 47 달빛이 고와서 52 제2부 I 새싹과의 대화 오월의 새소리 59 푸른 오월에 64 화단에 물을 주며 69 왕버드나무 73 새싹과의 대화 80 대추나무 전지를 하며 84 벚나무 89 자귀나무 94 뻐국채야 뻐꾹채야 99 제3부 I 산을 오르며 가을의 독서 105 강의를 마치며 109 명륜당에 앉아서 114 문풍지 소리 119 비 오는 날 124 가을 빗소리 135 산을 오르며 140 생각나는 사람 145 삶의 의미 149 인생은 낙엽 152 제4부 I 사람다운 삶을 위해 행복한 인생길 159 인생의 화폭 161 정의로운 사회로 164 사람다운 삶을 위해 169 세심洗心 174 쪽 동백나무 180 가버린 세월 185 겨울이면 생각나는 얼굴 189 수레바퀴가 하는 말 195 |
金洪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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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의 신율봉 산자락에 오랜만에 신선한 꾀꼬리 울음소리다. 참으로 반갑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새끼를 쳐 가족들과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다. 꾀꼬리도 즐거운지, 노래를 부른다. 목청이 청량하다. 이 고운 소리가 숲속도, 마음도 상쾌하게 만든다.
중학교 영어 시간 처음 회화를 배우던 발음처럼 들린다. “아이 엠어 보이. 아이 앰어 걸. 하이, 오-케이.” 꾀꼬리 소리를 따라 말을 맞춰 보지만 잘 맞지 않는다. 꾀꼬리도 한마디 던진다. “문학회가 가꾸는 꽃밭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이치(理致)를 터득했소.” 이렇게 내뱉고는 황금 같은 몸매로 후루룩 몇 마리가 한 방향으로 날아가며, “득어망전(得魚忘筌)”하고 사라진다. 이 의미가 무엇이던가.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인심이다. 꾀꼬리가 사람다움의 도리를 일깨워줌이 아닌가. 인생이 살다 보면 자신의 이득만 따름에 통발을 버리고 사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생각하면 부끄러울 때가 너무도 많다. 꽃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는 평화로운 모습에서 순간, 내 인생도 꽃으로 피어나는 착각을 하였다. ---「꽃을 피우는 마음」중에서 푸르다는 것은 젊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파란 풀밭에 누워 사색에 젖을 때가 제일 행복스럽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강변에서 하늘을 우러러 그리움을 떨쳐내고 푸른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고픔은 젊음으로 살아남고 싶은 심정에서다. 인생의 삶은 청춘으로 오래 살기를 원한다. 청춘은 푸르게 숨 쉬는 봄이다. 봄은 색으로 비유하면 파란색이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청색으로 온 세상을 색칠해두고 싶다. 푸른 빛깔을 맛으로 느낀다면 살구요, 매실이다. 한 입 딱 물어뜯으면 풋내음이 도는 새큼한 맛이다. 금세 입안에 군침을 가득 채우는 상큼함이다. 생각만 하여도 입안에 신맛을 돌게 하는 매력적인 빛깔이다. 보통 과일에 대한 그림을 그릴 적에는 노랗게나 붉게 익은 열매로 먹음직스럽게 표현하는데, 천도(天桃)만은 파란 빛깔로 그려야 한다고 한다. 일명 천도복숭아라고 부르는 과일은 여느 복숭아와 다르게, 삼천 년이 되어야 꽃이 피고 삼천 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또 삼천 년 만에 복숭아가 익는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열매가 익으려면 적어도 구천 년을 지내야 따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니, 얼마나 긴 동안 푸른 빛깔로 달려있는 것일까. 이 열매를 따 먹었다는 삼천갑자 동방삭은 새파란 젊음으로 인생을 살았으리라. 이런 나무 열매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인륜의 덕을 쌓은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삼천 년만의 한 번씩 달리고 익는다는 열매는 서쪽으로 여행을 하면 맨 끝에 요지연이 있단다. 이 못을 건너면 서왕모라는 사람의 과수원이 있는데 그곳에 가야 먹을 수 있게 된다는 복숭아란다. 만약 내가 그동안 쌓은 덕이 있다면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신선이나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천도복숭아. 득도(得道)를 한 사람만이 먹을 수 있다는 천도. 득도한 사람이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이 복숭아는 푸른빛의 찬란함으로 조화된 영롱한 빛깔일 것이다. 삼천갑자 동방삭은 득도를 못 한 탓으로 과일을 훔쳐 먹었지만, 신선은 못되고 삼천 년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푸른 오월에」중에서 고향을 떠나온 이후 문풍지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문풍지 소리가 듣고 싶을 적마다, 가난해서 서럽던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꿈도 소망도 없이 주어진 운명처럼 살아가는 아름다움만을 지닌 소박함이 고향 사람들이라면, 야망과 욕심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시인들이 아닌가 싶다. 고향 사람들은 늘 다정하다. 아마도 시골의 은근하고도 투박한 문풍지의 울음 같은 슬픔을 담고 살아온 탓에서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계곡의 여울물 소리에 젖어 있고, 몸은 흙 내음이 배여 흙처럼 사는 흙같이 순박한 고향 사람들은 어디에서 만나도 늘 반갑다. 빛바랜 세월을 살아가는 도시의 모퉁이서 점점 허무하게만 느껴온다. 지난 삶들이 마음의 유리창을 차갑게 두들길 때마다 문풍지 소리 같은 울음을 터트리고만 싶다. 겨울밤은 달빛마저 차갑게 안겨 오는데 창공을 나는 철새의 울음마저 외롭게 들린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이는 연의 안타까움만큼이나 서글픈 인생살이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찢어진 문풍지처럼 바람 따라 울뿐이다. 인생은 살아있는 것만으로 값진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더 값지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라 후회스럽지 않으련만 옷깃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내듯 살아가는 자신의 텅 비어있는 삶이 오늘따라 애처롭다. ---「문풍지 소리」중에서 종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창문을 열고 시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무심코 비안개로 가득한 고향의 들길을 걸어가고 있는 마음 자락에서도 빗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들린다. 텅 빈 들녘은 허공으로 사선을 그으며 마구 쏟아지는 빗줄기가 끊어진 가야금 줄에서 나는 소리처럼 어미를 잃은 송아지 울음같이 서글프게 밀려온다. 산모롱이 길에 쌓여 진 상수리나무 이파리도 비에 흠씬 젖었어도 눅눅하게 가만가만 소리를 낸다. 언덕 너머로 흐르는 개울물도 불어났는지 여울물 소리도 자잘하게 들린다. 물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그 뜻을 새길 수가 없지만, 오래 듣고 있으면 그 소리는 다정하기만 하다. 가을 빗소리를 들으면, 신라 최치원의 추야우중이 생각난다. 가을바람은 괴롭게 울고 있는데, 길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깊은 밤 창밖엔 비가 내리고(窓外三更雨), 등잔 앞에 앉아서 고향 그리네(燈前萬里心)라고 읊었다. 어쩌면 인생은 옛사람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쓸쓸했던 심정은 같은가 보다.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수천 리 중국 땅에서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랴. 추야우중의 글을 읽다 보면 슬픈 마음이 그냥 가슴으로 스며든다. 가을비가 내리는 밤이면 부모님이 그립다.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웃집으로 마실 가셨다 밤늦게 돌아오시던 아버지가 뜰에 서서 젖은 저고리의 빗방울을 털어 내는 소리도 아련하게 들린다.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도 고요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건 가을비 탓만은 아니다. 알 수 없는 회심함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베갯머리는 추야장장빗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히 싸임에서던가. ---「가을 빗소리」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