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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05
0부 어디에도 없는, 그래서 어디에나 있는 어느 아무의 아무 010 1부 국을 끓이다 그 국솥에 빠져 죽은 뒤로부터 태초에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으니 018 부엌의 역사 020 주부 022 파란 풀씨 024 붉은 도마 026 임의의 그림자 030 잃어버린 여자를 찾아서 034 나는 어느 오후의 텅 빈 식탁이었으므로 036 사랑은 누구의 것인가? 038 2부 한 여자의 불가능한 서정시 체제의 눈 042 포르노그래피 복제시대의 서정시 044 텔레비전 리얼리티 047 갇힌 여자 048 식민 050 도시의 지도 051 아침 드라마 054 전화영어 056 착한 세계 058 제기랄 그것 059 말하는 여자 060 3부 엄마 없는 부엌에서 모래알 엄마 064 오늘 서쪽 날개 065 모르는 당신 079 푸른 불 080 사랑의 역사 081 사랑 082 집 084 담당자 085 항아리 지구 086 항아리의 관계자 088 지구 090 4부 그러나 새는 횟빛횟빛 울고 웃는 지구 여자의 얼굴이 죽지도 않고 또 온다 094 침묵의 샴쌍둥이 098 언어의 바깥 100 있을 리 없는 새 102 도시의 역사 104 바람의 전화 107 Souvenir 108 가족 111 그러나 그 밤은 기억하네 112 0부 그 아무 겨울에 답장하려고 아무 겨울이 가면 116 장혜령의 편지 119 Impossible Bird-Translated by Min Ji Choi 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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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우리나라의 역사다.
어디서나 더러움을 닦아주고 빨아주는 웨이트리스 식모 유모 청소부 잡역부 여자의 손길이 있었다. 흰옷을 입은 백의종족. 그 종족을 있게 한 여자가 있었다. 아직도 있다. 그 여자가 바로 나다. 나는 장대한 우리나라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 아무 여자 중 하나다. 그러므로 나는 지도에 없다. 어디에도 없는, 그래서 어디에나 있는 아무. 그 아무가 바로 나다. ---「어느 아무의 아무」중에서 여자는 오백 명의 아들을 위해 국을 끓였다. 오백 아들이 먹을 국을 끓이려면 여자보다 큰 솥이 필요했으리라. 그런 솥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른다. 여자는 산이 꺼진 거대한 구덩이에 거대한 솥을 걸고 불을 피웠다. 세상을 만들 만큼 큰 여자가 왜 하필 국을 끓이는지, 그만한 국을 끓이려면 장은 어디서 봐야 하는지는 모른다. 태초의 세상에는 시장도 없고 돈도 없었다. 다만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다. 국솥이 너무 커서, 국을 젓다가 그만 그 속에 빠져 죽은 여자가 있었다. 펄펄 끓는 국 속에서 여자가 허우적댈 때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 우주의 고독이 있었다. ---「태초에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으니」중에서 나는 그가 부재중일 때만 사랑을 생각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교수아파트 A동 1004호와 압력밥솥과 오븐레인지와 양문형냉장고와 코렐접시와 국자와 수저와 후추통조차 그의 소유였으므로.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나의 생각과 나의 생각조차 그의 소유였으므로. 나는 그가 부재중일 때만 책을 읽었다. 그의 책에 밑줄조차 그을 수 없었으므로, 손톱으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도 이야기를 가질 수는 있는 법이다. 그것이 문자를 소유하지 못했던 우리나라 여자 짐승과 천민 백성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는 이야기의 비의다. ---「사랑은 누구의 것인가?」중에서 이 세상에서 새처럼 노래한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새처럼 노래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이 새와 저 새는 다르고 세상에 얼음을 치고 물을 두드리는 그런 새가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새는 횟빛횟빛 울고, 나는 있을 리 없는 새를 끌어안고 백지 위에서 운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니까. 물론 겨울이 오고, 새가 다시 오긴 한다면 말이지. ---「있을 리 없는 새」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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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는 횟빛횟빛 울고,
나는 있을 리 없는 새를 끌어안고 백지 위에서 운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니까. 물론 겨울이 오고, 새가 다시 오긴 한다면 말이지. 2017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장혜령 시인의 두번째 시집 『횟빛횟빛』이 난다시편 11번으로 출간된다. 첫 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2021) 이후 5년 만에 출간된 이번 시집은 앞뒤에 놓인 0부와 그사이에 놓인 4개의 부로 구성되어 총 42편의 시를 담았다. 0부 「어디에도 없는, 그래서 어디에나 있는」으로 문을 열고 1부 「국을 끓이다 그 국솥에 빠져 죽은 뒤로부터」, 2부 「한 여자의 불가능한 서정시」, 3부 「엄마 없는 부엌에서」, 4부 「그러나 새는 횟빛횟빛 울고」를 거쳐 0부 「그 아무 겨울에 답장하려고」로 마무리된다. 시집 끝에는 시인이 독자에게 전하는 「장혜령의 편지」와 대표작 「있을 리 없는 새」(Impossible Bird)가 최민지(Min Ji Choi)의 번역으로 영문 수록되었다. “어디서나 더러움을 닦아주고 빨아주는/웨이트리스 식모 유모 청소부 잡역부 여자의 손길이 있었다./흰옷을 입은 백의종족. 그 종족을 있게 한/여자가 있었다.//아직도 있다./그 여자가 바로 나다.”(「어느 아무의 아무」) 장대한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는 국을 끓이는 여자와 엄마 없는 부엌,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도 이야기를 가질 수는 있는 법이다. 그것이 문자를 소유하지 못했던 우리나라 여자 짐승과 천민 백성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는 이야기의 비의다.”(「사랑은 누구의 것인가?」) “휘파람새는/숲의 혈관//초록 풀씨를 물고//세계를 건너고 있다//영원히 영원히 건너고 있다”(「휘파람새」,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횟빛횟빛”. 이것은 지난봄, 시인의 집 보일러실을 무단 점거해 둥지를 튼 이름 없는 엄마 비둘기&아기 비둘기의 울음소리. “여러분이 믿기 어렵겠지만/비둘기가 클 때까지 집을 나왔습니다.”(「장혜령의 편지」) 에어컨 실외기 소리에 비둘기가 살 수 없을 것 같아 시인은 이 시집의 원고를 이고지고 집도 없이 먼길을 헤맸다. 한 계절을 살고 아기 비둘기는 무사히 세상으로 날아갔는데, 그 기억의 둥지만은 여기 이 책에 남아 있다. 이 시집이 새 집이 될 줄, 이름 없는 비둘기의 기억이 사는 거처가 될 줄은 그때의 시인은 몰랐을 테다. “포스트 후쿠시마와 N번방의 시대에 서정시는 어떻게 가능한가?”는 시인이 품은 최초의 질문. 이 시대의 서정은 시인의 문밖 비둘기 여자처럼, 그가 외면한 그 안의 빙하처럼 무섭도록 울고 있다. 시인은 버려짐을 살리고자 했고 그 모든 버려짐을 살림으로써 결국 자신을 살리고자 했다는 고백을 이 책에서 이어간다, “백지 위에. 이 백지 위에”. 태초의 세상에는 시장도 없고 돈도 없었다 다만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다 불은 여자의 신앙이므로 단 한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생명이므로 “세상을 만들 만큼 큰 여자가 왜 하필 국을 끓이는지, 그만한 국을 끓이려면 장은 어디서 봐야 하는지는 모른다.”(「태초에 국을 끓이는 여자가 있었으니」) 돌아온 아들들은 고깃국의 고기가 어머니인 줄 모르고 국을 퍼먹었다. 다 먹고 나서야 그것이 어머니임을 안다. “여기까지가 기록된 태초의 이야기이고 여기부터가 실종된 이야기의 갈림길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주부를 언도받은 여자는”(「주부」) 아내로 예정되어 있고 주부로 도착 예정이며, 영원히 마트로 출발하고 도착한다. 국을 끓이고 식탁을 차리는 동안에도 여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삽시간에 사라지고, 여자의 생각마저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나의 생각과 나의 생각조차 그의 소유였으므로.”(「사랑은 누구의 것인가?」) 그럼에도 여자는 매일의 식탁 위에 매일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텅 빈 죽음의 광장처럼 텅 빈 식탁에 앉아, 이제 나는 새벽 네시마다 오는 휘파람새처럼 휘파람을 불련다. 그 누구도 새의 노래를 금지할 수는 없는 법이므로.” 파란 저녁의 수선집에서는 엄마가 바느질을 하고 있다. “모든 기다리는 여자에게는 두 다리가 없으므로 세이렌의 두 다리는 푸른 불과 같았다.”(「푸른 불」) 엄마와 딸은 타오르는 불을 함께 바라보고, 그 재의 맛을 안다. 우리는 알까? 매일 수천수만 고학력 필리핀 여자들의 와이파이 공유기에도 푸른 불이 켜진다는 것을, 우리의 이야기가 전화회선을 타고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을(「전화영어」). 이야기는 그렇게 여자의 부엌과 수선집을 넘어, 국경 너머 여자의 밤에도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는 부서지는 이야기를 붙잡으려 했다.”(「모래알 엄마」) 하지만 모래알보다 작은 이야기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며 나는 엄마와 잠시 맞스쳤다”. 그것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모른 채. “사랑은 비둘기처럼 낳으려 한다. 한번 낳으면 남이 되는 이별을 낳고 또 낳고. 낳고 또 낳고.”(「지구」) 그렇게 한때의 비둘기 알처럼 태어나고 떠나가는 생명들 곁에서, 이 여름의 새들은 “없는 얼음을 치며 챙챙 울어. 없는 물을 두드리며 쟁쟁 울어.”(「있을 리 없는 새」) “그러나 저 새는 횟빛이고, 횟빛 새는 나무가 없어 울고, 물이 없어 울고, 갈 곳 잃은 새와 사람들의 노래가 겹쳐진다. 시인은 흰 새의 세계를 돌아본 뒤, 횟빛 새를 끌어안고 백지 위에서 운다. 그리고 겨울이 온다. “내 앞으로 잘못 배달된 노래에 답장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어디로 부쳐야 할까.”(「아무 겨울이 가면」) 소인이 찍히지 않은 편지처럼 골목을 떠도는 노래, 아무도 내어주지 않으려는 거리에서도 입김처럼 새어나오는 노래는 존재한다. “겨울은 가고 겨울이 가도, 그 아무 겨울에 답장하려고.” · 시인의 말 횟빛횟빛. 지난봄, 그간 내가 우리집이라 여겨왔던 집 보일러실 에어컨 실외기 아래 알을 까고 태어난 불가능한 멧비둘기의 울음소리. 내가 문을 열자 까만 두 눈을 빛내며 횟빛횟빛. 안녕? 우리집에 무슨 일로 방문하셨죠? 이것은 다름아닌 사랑의 진실. 푸드덕거리는 비둘기 엄마처럼 무서운 사랑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2026년 가을 장혜령 · 난다시편을 시작하며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1. 2025년 9월 5일 출판사 난다에서 시집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를 모아 묶었음에 ‘시편(詩篇)’이라 했거니와 시인의 ‘편지(便紙)’를 놓아 시집의 대미를 장식함에 시리즈를 그렇게 총칭하게도 되었습니다. 난다시편의 라인업이 어떻게 이어질까 물으시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적 경향이라 말을 아끼게 되는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모든 말이 시의 언어로 발산될 수 있기에 시인에게 그 정신과 감각에 있어 다양함과 무한함과 극대화를 맘껏 넘겨주자는 초심은 울타리 없는 초원의 풀처럼 애초부터 연녹색으로 질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단호함은 있습니다. 2. 난다시편의 캐치프레이즈는 “시가 난다winged poems”입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무거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가벼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바람처럼 꽃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몸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처럼 희망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마음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여 온전히 시인의 목소리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을 빚어보자 하였습니다. 해설이나 발문을 통한 타인의 목소리는 다음을 기약하자 하였습니다. 난다는 건 공중에 뜰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말이니 여기 우리들 시를 거기 우리들 시로 그 거처를 옮김으로 언어적 경계를 넘어볼 수 있겠다는 또하나의 재미를 꿈꿔보자 하였습니다. 시집 끝에 한 편의 시를 왜 영어로 번역해서 넣었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시인의 시를 되도록 그와 같은 숨결로 호흡할 수 있게 최적격의 번역가를 찾았다는 부연을 왜 붙이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3. 난다시편은 두 가지 형태의 만듦새로 기획했습니다. 대중성을 담보로 한 일반 시집 외에 특별한 보너스로 유연성을 더한 미니 에디션 ‘더 쏙’을 동시에 선보입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이라 할 더 쏙. 7.5×11.5cm의 작은 사이즈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자랑하는 더 쏙은 ‘난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디자인한 만큼 어디서든 꺼내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읽기 좋은 휴대용 시집으로 그만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단순히 작은 판형으로 줄여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특별한 아트북을 염두하여 수작업을 거친 것이니 소장 가치를 주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건강하게 지저귀는 난다시편의 큰 새와 작은 새가 언제 어디서나 힘찬 날갯짓으로 여러분에게 날아들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