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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모래 여자의 서 … 006
1장 목소리 쓰기, 받아쓰기 여자는 손의 메아리에 귀 기울이며 - 차학경 … 028 푸른 벼랑의 말을 들어라 - 아니 에르노 … 056 봄의 아침을 비추면 가을의 저녁이 나오는 - 한강 … 078 2장 경계의 쓰기, 번역의 쓰기 나는 내가 버린 나의 소녀이므로 - 다와다 요코 … 100 도플갱어, 두 개의 삶 - 소피 칼 … 126 별을 잇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별자리는 생겨난다 - 올가 토카르추크 … 154 3장 죽음의 쓰기, 유령의 쓰기 더러운 흼, 불가능한 흼 - 김혜순 … 178 불타는 부재의 편지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200 포르노그래피 여자의 서 - 엘프리데 옐리네크 … 222 OUTRO 여자의 묘비명 … 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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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세계가 지금 도착하고 있었다. 나의 삶은 거울 저편으로부터 이편으로 끝없이 오고 있으며, 무한히 쓰이고 있는 문장이었다.
--- p.92 그리하여 어느 날, 당신에게로 이 글이 도달하는 불가능한 일. 당신도 나의 기척을 느끼는가. 이따금 저곳의 당신을 생각하는 이곳의 나를 느끼는가. 여기 거울이 있다면, 나를 비출 때 당신이 나타나는 거울이 있다면, 그 거울은 우물처럼 깊은 것이어야 함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거울이 우물처럼 깊은 것이라면, 그때 나의 쓰기란 언제고 어둠 저 편에서 상(像)이 떠오르도록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이리라. 아직은 보이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는 일. 그러나,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타날 당신을 끝내 마주 보는 그런 일. --- p.97 그런데, 왜 가야 하는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그것이 우리가 삶이라 간단히 이름할 수 없는 삶의 다른 모습이리라. 우리는 알지 못하기에 간다. 알지 못하기에 만나고 사랑하고 또 흩어진다. --- p.109 우리는 알지 못하면서도 만나고, 또 만나기 위해 흩어지는 것이리라고. 그것이 삶이리라고. --- p.122 너는 그것을 기억하는가. 너의 작고 눈부신 새를 기억하는가. 한때 내가 너에게로 건너갔던 일을.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끝없이 건너가고 또 건너가는 일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너는 기억하는가. --- p.123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운 적도 없이, 인간은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 속 깊은 동굴 안에 고대인의 언어로 그것은 적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사랑임을 모르는 사랑처럼, 그 문자는 당신에게 해독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빛이 드는 순간 영원히 사라지고 말 삶의 비의처럼. --- pp.218-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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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설. 이 내뱉음. 이 쏟아냄. 이 토해냄.
이것은 자기 언어를 허락받지 못한 여자의 유일한 발화다. 모래는 운동에 의해 존재한다. 그 힘의 모태는 시간이다. 몇 억 년의 시간이 모래를 만든다. 억겁의 시간으로 원래의 형상은 사라진다. 바람 혹은 중력에 의해 모래가 된다. 모래는 움직이되 멈춰 있고, 멈춰 있되 움직인다. 어린아이들이 모래를 손에 움켜쥐고 버리고 하는 장난은 바로 그 형상의 실재 때문일 것이다. 모래의 질량을 느끼는 순간이란 손이 움직이지 못할 때, 가만히 부동자세로 멈출 때뿐이다. 바람이 불거나 움직이는 순간 다시 모래는 바닥에 흩뿌려져 본래 형상을 잃는다.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의 제목으로 연상할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것들이다. 손 안의 모래.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빠져나가버리는 모래. 바람으로 인해 날려가는 모래와 같은 문장들을 왜 장혜령은 필사적으로 움켜쥐려 하는 것인가. 그리고 장혜령이 움켜쥔 9명의 여성작가들은 왜 굳이 모래로 문학을 ‘쓴다’ 말하는 것일까. 역으로, 움켜쥘 수 없기에 모래로 글을 쓴다는 것인가. 사라질 걸 뻔히 알고 있음에 모래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불가능이 가능이 될 때까지. 살릴 수 없음을 살려낼 수 있을 때까지”(16쪽) 글을 쓰는 여자들. 이 책은 그 간략한 질문에 대한 여러 방면의 답이다. 우선, 목소리이다. 쓰기보다 말하기이다. 차학경, 아니 에르노, 한강. 세 작가의 작품에서의 ‘여자’의 음성성을 살핀다. 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전달하는 여자.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말하고, 그 기억을 대신 소리 내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더불어, ‘여자’의 목소리에 육체를 부여한다. 지워진 존재들 사이에 서 있게 한다. 지워진 목소리를 그들 자신에게 돌려준다. 차학경의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 아니 에르노의 자기 육체에서 새어나오는 신음, 한강의 역사의 파편이 깊숙이 박혀 꺼내지도 못한 슬픔 들을. “사실을 진실로 옮기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 사이의 시차를 견딜 수 있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그 점에서 여자의 텍스트를 읽는 일은 이중의 의미로 번역적인 경험이다. 외국어에서 옮겨진 한국어를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한편, 현실에서 초현실을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110쪽) 두 번째로 번역성에 대해 말한다. 다와다 요코, 소피칼, 올가 토카르추크의 ‘여자’들을 호출한다. 셋의 여자들은 나무, 짐승, 새가 된다. 또한 커피포트가 되어 말한다. 인간이 아닌 것에 의해 말해지고, 타자의 몸으로 갈아타면서 말한다. 현실에서의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봐야만 하고, 그 바라봐지는 것을 말하는 ‘여자’가 존재한다. 여자는 환승을 통해 현실에서 초현실을 읽게끔 한다. 인간의 시각의 한계를 넘어 보아야만 드러나는 세계가 있음을, 말한다. 일본어의 바깥을 열기 위해 독일어로 간 다와다 요코, 캐릭터와 자신의 이중 작가를 드러내고자 한 소피 칼,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을 보여주려 한 올가 토카르추크처럼. “그렇다. 텍스트는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하는 힘에서 왔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것, 여자의 것이다.”(199쪽) 마지막으로 세 명의 작가를 불러내 유령성에 대해 말한다. 죽음의 세계와 산 세계를 오고 가는 자. “죽음으로 죽지 않고 죽음으로 살고 있는”(김혜순, 《죽음의 자서전》) 자들을 불러낸다. 죽어서도 말하는 자의 의도를, 죽어서 저 세계에서 본 것을 이 세계에 건너와 말하는 것에 대해. 죽음으로 살고 있는 여성의 주체성에 대해 말하는 김혜순의 ‘여자’와, 존재하지만 존재되지 않는 삶을 생존하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여자’, 그리고 살기도 전에 이미 죽음과 폐허를 드러내 보이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여자’들을 통해 오직 한 번은 죽어본 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것들을 말하게 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면서도 만나고, 또 만나기 위해 흩어지는 것이리라. 다시, 모래에 대해 생각한다. 모래가 되기까지 원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상상한다. 거대한 돌 하나가 떠오른다. 그 돌은 억겁의 시간과 바람에 의해 지구를 맴돌다가 지금 내 눈에 모래로 존재해 있다. 그 작은 무게 속에 셀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들어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 시간성, 모래가 움켜쥔 그 장대하고 넓은 시간에 기대어 장혜령이 불러낸 9명의 여성작가들의 ‘여자’를 본다. 그 ‘여자’들이 토해내고 뱉어낸 단어들과 문장들을 읽는다. 결국에는 “어둠 저 편에서 상(像)이 떠오르도록 우물을” 들여다보는, 문학의 오래된 교양에 닿는다. 모래로 쓰는 글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 잉크 대신 모래로 글을 쓰는 ‘여자’들의 마음 저 깊은 우물 표면에 드리우는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도 아마 마찬가지 비슷한 일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