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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중세 유럽의 심장, 파리_홍용진 프랑스 국왕 숭배의 성지, 랭스_성백용 두 왕국의 최전선 도시, 칼레_성백용 론강에 꽃핀 아비뇽_이영재 부르고뉴 역사를 품다, 디종_이정민 기억이 권력을 빚어 내는 마법의 도시, 아헨_차용구 중세에서 현대로 온 나움부르크의 우타 입상_차용구 영웅들의 도시, 보름스_오종현 성 마르코와 날개 달린 사자: 사라진 천년의 베네치아 공화국에 관한 소멸하지 않는 기억_남종국 순례의 도시, 로마_고故 변종찬·이상민 헤이스팅스: 노르만 정복과 헤이스팅스 전투_이상동 앵글로-노르만 시기의 성인, 던스탄과 캔터베리_장재경 토착민과 이주민의 공생의 현장, 런던_고반석 켈트 괴물의 붉은 피 위에 떠 있는 연옥의 섬, 스테이션아일랜드_주나미 누구나 갈 수 있는 순례, 산티아고_박용진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꾼 도시, 주네브_박효근 천년의 수도,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_김차규 · 주 · 더 읽을거리 ·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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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각지의 학생과 선생들이 파리대학으로 몰려들었고 그야말로 파리는 학문적 차원에서 국제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중세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소통하였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좌안의 파리대학 주변을 프랑스어로 ‘라탱Latin 구역’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 p.19 프랑스어로 노트르담Notre-Dame은 ‘우리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지칭한다. …성당 건설은 1163년부터 시작되었다.…중세 고딕 양식의 전형으로 파리 교구를 대표하는 이 대성당은 200여 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 p.19 박물관이 되기 이전에도 루브르 궁전은 문화·예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28년 프랑수아 1세(재위 1515~1547)가 궁전을 짓기 이전 중세 루브르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은 거대한 성채였다. --- p.24 랭스의 전설은…13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대연대기》에 기록될 정도로 왕국의 공식 역사가 되었다. 천상의 성유로 도유 받은 클로비스는 새로운 다윗이 되었고, 그 고귀한 왕과 더불어 그의 백성은 새로운 선민이 되었다. --- p.43 성왕 루이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그의 신유 의례를 처음으로 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후대의 왕들은 축성식 이튿날 랭스나 코르브니에서 의례를 행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랭스 북서쪽에 있는 코르브니 수도원은 본래 연주창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고 알려진 성 마르쿨의 유골을 보유했다. --- p.48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나서 랭스 대성당은 한때 군용 사료를 저장하는 창고로 전락했다. 1804년 12월 2일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교황 피우스 7세에게 도유 받은 다음 자기 손으로 복제된 샤를마뉴 황제의 관을 썼다. 축성식 장소는 랭스가 아니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었다. --- p.52 프랑스 남서부 영토와 칼레 지역을 영국 왕에게 넘겨 준 1360년 브레티니-칼레 조약이 에드워드 3세와 흑세자, 그리고 장 2세와 도팽 샤를(장래의 샤를 5세), 이렇게 두 국왕, 두 세자의 만남으로 비준된 곳이 칼레였다. 40여 명의 왕족 제후와 대귀족, 파리와 주요 도시에서 차출된 부르주아들이 이 조약의 이행을 보증하는 볼모로 한때 이곳에 억류되었고, --- p.61 이 부르주아들은 19세기에 와서 공화주의적 애국자의 표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1884년 칼레 시의회는 부르주아들의 동상 건립 계획을 공표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건립위원회는 조각가로 로댕을 선정했다. --- p.67 아비뇽에 교황청이 건축된 것은 베네딕투스 12세 때이다.…그는 교황과 쿠리아(교황청의 행정기구)를 위한 새로운 궁을 구상했는데, 수도원 건물처럼 회랑, 장식 없는 예배당,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 p.88 1348년 흑사병이 창궐하자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과 추방이 잇따랐다.…아비뇽은 추방과 몰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 중심인물이 교황 클레멘스 6세였다. --- p.89 1317년에 그는 “교황의 새로운 성채”, 즉 ‘샤토뇌프뒤파프’를 건축했다. 샤토뇌프뒤파프는 교황의 포도원으로 이곳의 포도주는 와인 애호가들은 물론 그 지역민들에게도 사랑받는 지역경제의 효자 품목이 되었다. --- p.98 ‘신의 도시Divio’라는 뜻을 가진 디종은…로마 시대부터 시장과 상인들의 활력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오늘날 꿀과 향신료를 넣어 구운 뺑 데피스와 프랑스식 겨자로 유명한 디종은…식도락의 본고장으로도 이름나 있다. --- p.299 탈랑 성 축조가 시작되었다.…축조 비용은 포도주 독점판매권과 포도 수확권 등을 양도하며 충당했다. 탈랑 성이 완성 되자…영주들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노들도 탈랑 성으로 향했다. 1216년 외드 3세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탈랑에 코뮌 특허장을 부여했다. --- p.109 이 궁전을 나와서 2분 정도 걸으면 디종 노트르담 성당의 ‘부엉이’를 만날 수 있다.…디종의 주요 명소를 쉽게 둘러볼 수 있도록 부엉이 발자국 모양의 표지판을 따라가는 ‘부엉이 트레일’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 p.121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에 오르려는 이는 먼저 제후들의 선출을 거친 뒤 아헨에서 독일 왕으로 대관되어야 했고, 이어 교황의 대관을 받아야만 비로소 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독일 왕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였던 아헨에서는 1531년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 p.125 1804년 나폴레옹은 ‘카롤루스의 왕좌’를 직접 보기 위해 아헨을 방문하였고, 석 달 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스스로 “나는 카롤루스 대제다”라고 선언했다. --- p.144 나움부르크의 중심에는 국경을 둘러싼 오랜 대립과 증오의 상징이라 할 성당이 하나 있다. 이 건축물은 밤베르크 대성당과 더불어 자연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유명하다. 나움부르크 성당의 서쪽 성가대석에는 1240년경 제작된 우타Uta 입상이 서 있는데, --- p.150 우타를…‘독일 민족의 전사’로 왜곡되게 묘사하면서…그녀를 독일 국민, 민족혼, 독일인의 공동체적 삶과 운명의 체화로 승화시켰다. 우타가 살던 11세기에는 독일 민족, 국민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였다. --- p.154 보름스 성당을 뒤로하고 걷노라면 보름스에서 영웅이 된 인물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오늘날에는 조용한 정원이 있는 이곳에서 마르틴 루터가 “내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이라는 말로 자신의 의사를 철회할 생각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고 전해진다. --- p.179 알렉산드리아에 안치돼 있던 성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로 옮겨 옴에 따라 그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도 함께 베네치아로 오게 된 것이다.…이송 이후 베네치아는…중세 말 지중해 전역을 누비는 강력한 해상 세력으로 부상했다.…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로 옮겨 오게 된 것은 도둑질 덕분이었다. --- p.196 베네치아 곳곳에 설치되어 있던 ‘사자의 입’이라 불리는 조형물은 공화국에 해가 되는 불법 행동을 고발하는 장치였다.…사람들은 고발장을 써서 이 사자의 입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사자의 입을 통해 들어온 고발장은 10인 위원회에 넘겨졌는데, --- p.213 베드로와 바오로에 대한 공경에서 전환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설립된 ‘콘스탄티누스 대성당’이다.…콘스탄티누스 대성당은 주교좌에 앉아 있는 주교를 중심으로 거행되는 전례 집회 장소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었다. --- p.223 “로마 관구에 있거나 로마 교회로부터 서품을 받은 주교들은 매년 교황을 방문하여 그에게 존경을 드려야만 한다.” 12세기에 등장한 이 교회법 규정은,…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보다 교황이 더 중시된 것이다. --- p.229 -교황 니콜라스 5세가 기획하고 그의 후계자인 율리오 2세가 1506년 착공하여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축성한 새로운 베드로 대성당은 영원한 도시인 로마의 소명이 교황들의 좌가 되는 것임을 재천명하였다. --- p.232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가 전사하면서 노르만이 승리하였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1070년에 센라크힐에 수도원을 설립했다.…수도원의 명칭도 배틀 수도원으로 정하였다. --- p.240 캔터베리는 영국 동남쪽에 있는, 도버해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도시다. 도시 중심에는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캔터베리 대성당이 있다. 캔터베리 대성당 내에는 12세기 중반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토머스 베켓(1118~1170)이 1170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재위 1154~1189)의 부하들에게 살해된 장소가 있다. --- p.259 서기 43년 로마군은 켈트족이 살고 있던 브리튼섬을 점령한 후 템스강 북안에 론디니움Londinium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만들었고 2~3세기경에는 이 마을을 성벽으로 둘러쌌다. 이 성벽을 경계로 조성된 론디니움이 ‘시티 오브 런던’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고, 중세 런던의 핵심적인 상업·도시 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 p.281 1348년부터 창궐한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는…임금 인상을 이끌었다.…런던은 소비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런던 토박이들 외에도 유럽 각지에서 런던으로 이주해 온 수공업자들이 성장하는 런던 제조업 시장의 공급자로서 자리매김했다. --- p.287 런던 시민들은…1319년 왕실로부터 헌장을 획득했다. 헌장에 따르면 런던시에서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시민권을 취득해야만 했다. 런던 시민의 이권은 런던시 관할권 내에서 소매 점포를 열 수 있고, 자신의 작업장에서 만든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에 시민권은 엄격한 취득 절차로 이방인들의 진입을 제한했다. --- p.291 유대인이 떠난 자리를 메우며 런던 교역의 중심 세력이 된 이탈리아 상인들은 현재 미국 뉴욕의 월가에 앞서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던 롬바드가에 정착했고…런던교 서편의 캐넌 스트리트역 인근 템스강 변에는 한자길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 p.297 이곳은 현재 아일랜드 순례길 협회가 선정한 12개의 참회 장소 가운데 하나다.…“누구든 참으로 회개하고 참된 믿음으로 무장한 자가 그 안에 들어가 하루 낮과 밤을 보내면 그가 일생에 저지른 모든 죄가 정화될 것”이라는 앞선 중세 작가의 말은 아직도 유효해 보인다.…더그 호수 수도원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150년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 p.319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이후 고해가 의무화되고 중죄에 대한 벌로써 순례가 부과되면서, 산티아고 순례는 전성기를 맞았다. 종교개혁 이후 순례의 열기가 시들기는 했으나,…1993년에는 에스파냐의 순례길이, 그리고 1998년에는 프랑스의 순례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p.327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콤포스 텔라라는 이름은 ‘들판Campus’과 ‘별Stellae’의 합성어로서 이러한 전설로부터 유래했다. 후일 이곳에 대 야고보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 p.328 칼뱅의 종교개혁 구현에 오른팔 역할을 담당할 집단이 목사회라면, 왼팔 역할을 담당할 또 하나의 핵심적 조직은 바로 치리회라 할 수 있다. 주네브 치리회는 1541년 교회법령을 통해 설립된 기관인데, 이에 따르면 치리회는 “주네브인들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준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감독하는 기관에 해당했다. --- p.355 칼뱅을 만나기 전 주네브는 스위스 연방과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프랑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연연하던 변경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칼뱅과의 조우 이후, 주네브는 종교개혁 2세대를 대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로마’라는 별명을 얻었고, 칼뱅파 교리를 공부하기 위해 전 유럽의 학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도시가 되었으며,…외부인들에게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국제적인 장소로 변화하였다. --- p.364 오늘날 이 도시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하에 1,550만 명(2020년)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역사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 p.370 발렌스(재위 364~378) 황제는 도시의 위상을 한껏 드높이기 위해 황금문 부근 프로폰티스 기슭에 헤브도몬 궁전을 건립했다. 이곳은 군영과 황궁이 있던 곳으로 많은 황제가 이곳에서 승리를 선포하거나 개선 행렬을 시작했고, 헤브도몬 궁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 p.376 1054년 교황의 특사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된 훔베르트 추기경과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의 대립은 그 마지막 도화선 가운데 하나였다. 양측의 협상은 실패했고, 훔베르트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제단에 케룰라리오스와 그 지지자들을 파문하는 문서를 올려놓았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측도 훔베르트와 그의 동료들을 정죄했다. --- p.382 1453년 이후 서유럽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현실의 도시인 동시에 점차 ‘잃어버린 기독교 도시’로 기억되기 시작했다.…교황청과 여러 군주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실을 오스만제국에 맞선 새로운 십자군을 촉구하는 명분으로 이용했다. 실제로 1453년 이후 반오스만제국 십자군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졌다. --- p.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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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경제, 종교와 문화의 핵심 17곳을 짚다
지은이들은 여행기의 현장감을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문명적 정체성이 형성된 시대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여러 민족과 국가 들이 제각기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 시대”인 점을 반영하는 ‘기억의 장소’ 17곳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리하여 왕권과 왕조의 상징적 공간 아헨과 랭스, 영국과 프랑스 간의 최전선이었던 칼레를 들어 정치를 이야기한다. 국제 상업도시이자 다문화도시 런던과 지중해 최강의 해상제국을 이룩한 베네치아에선 경제를, 가장 인기 있는 순례지였던 로마와 산티아고, 중세 말 교황들의 영욕이 깃든 프랑스 아비뇽, 종교개혁의 성지 보름스와 주네브(제네 바)에선 종교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유럽의 수도’ 역할을 한 파리와 중세의 봉건 제후의 권세와 영화의 기억을 품은 디종에선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넓이: 헤이스팅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책의 미덕 중 하나는 다뤄진 도시의 다양함이다. 중세를 관통하는 다양한 도시를 제대로 다루기엔 한계가 있다고 겸양을 보이면서도, 중세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을 폭넓게 골라냈다. 지역적으로는 서쪽 끝 산티아고에서 동쪽 끝 튀르키에까지, 북으로는 아일랜드와 북해 연안에서 남으로는 지중해 연안에 걸쳐 가능한 한 다양한 역사적 층위를 담아낼 도시를 이야기한다. 일반 관광객이라면 흔히 걸음하지 않을 영국 런던 인근의 해안도시 헤이스팅스를 다룬 것이 그런 예다, 잉글랜드 왕국의 전환점이 된 ‘노르만 정복’의 현장이라는 이유로, 당시 전투를 그야말로 실감나게 묘사하며 그 현장인 ‘배틀 수도원’의 의미를 풀어준다. 4세기에 동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가 세운 헤브도몬 궁전의 화려함이나 11세기 가톨릭 세계의 결정적 파탄이 벌어졌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야기도 단 권의 역사서 혹은 여행기에선 만나기 힘들 터다. 깊이: 나움부르크에서 스테이션아일랜드까지 책의 미덕은 필요한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낯선 도시를 찾아 역사를 파고든다. 독일과 폴란드 국경지대의 소도시 나움부르크로 안내하는 것은 민족주의란 ‘신화’의 허구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독일의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유명한 나움부르크 성당의 서쪽 성가대석에 서 있는 ‘우타Uta 입상’은 ‘독일 민족의 전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한데 1240년경 제작된 이 입상의 주인공인 우타가 살던 11세기에는 독일 민족, 국민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였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여느 책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아일랜드의 스테이션아일랜드도 마찬가지다. 현재 아일랜드 순례길 협회가 선정한 12개의 참회 장소 중 하나로 지난 150년 동안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낸 이곳의 신화가 실은 켈트인 전사 모험담이 기독교와 만나면서 이뤄진 ‘기억의 조작’ 결과라는 지적에선 역사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재미: ‘교황의 포도원’에서 성인 유해의 도둑질까지 의미도 의미이지만 ‘역사기행’이라 해서 ‘재미’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책도 여행기의 재미가 곳곳에 배어난다. ‘신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 디종의 명품 빵…일찍이 로마 시대부터 시장과 상인들의 활력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오늘날 꿀과 향신료를 넣어 구운 빵 ‘뺑 데피스’과 ‘부엉이 트레일’ 이야기가 그렇고 ‘날개 달린 사자’가 중세 지중해의 패자 베네치아의 수호 상징이 된 것은 9세기에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훔쳐 온 이후라는 이야기 등 놓치기 아까운 흥미로운 이야기가 책 곳곳에 스며 있다. 덕분에 책은 단순한 여행기를 뛰어넘는 진지함을 갖추었으면서도 읽는 이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읽는 맛을 갖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