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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삭막한 삶의 황야에서 잠시 몸을 녹일 온기를 찾을 수 있을까?
1부 ‘일상적인 나’는 누구인가 치유의 철학 ‘일상적인 나’는 누구인가 반복되는 권태, 좌절하는 삶은 영원한가 사람의 성격은 결코 변하지 않는가 자아는 영원불변하는 개체인가 현실은 불변하고 확고한 자아의 세계인가 역사는 발전하는가 돈의 힘과 인간의 힘, 어느 것이 더 강한가 2부 느림과 여유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 정의로움의 결정체, 이상 국가는 가능한가 느림과 여유의 삶을 누릴 수 있는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삶은 존재하는가 ‘너 자신을 알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끝없이 배우면 허무함이 사라질까 무엇을 배우는가, 어떻게 배우는가, 왜 배우는가 이론과 실천의 벽을 허물 수 있을까 망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3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잊고 버리기 위해 배운다고 말해도 되는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인가 지성과 역사는 확고한가 전쟁의 참상은 인간의 숙명인가 통일의 열망은 어느 시점에 확대되는가 창조와 파괴는 문화의 두 얼굴인가 아름다움은 권력인가 추함은 극복 가능한가 4부 일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아름다움을 향한 무한한 욕망의 근원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은 어떻게 아는가 창조적 예술미는 실현되는가 시간이라는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삶에서 느끼는 무의미와 무가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론과 실천을 합일시킬 수 있는가 나와 우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일생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철학과 함께 사는 삶을 음미하는 최상의 길은 무엇인가 에필로그: 자기성찰의 문을 조금씩 두드릴 때, 비로소 그 문이 조금씩 열리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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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나눔의 철학을 농담 반 진담 반 우스갯소리로 ‘비빔밥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자는 성인, 군자를, 석가모니는 성불을,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소크라테스는 불변하는 정의를 가르친다. 어느 한 가지만 부르짖는 것이 내게는 너무 피곤하고, 더군다나 그 한 가지가 절대적이며 완전하다고 외치는 것은 속을 깊이,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허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는 팔십 중반의 나이에 들어서서야 조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성인, 군자와 성불과 영원한 생명, 불변하는 정의에다 앞집 아주머니가 독거노인 불쌍하다고 가끔 나에게 가져다주는 열무김치에 담긴 마음을 함께 비빈다. 어느 때는 위층에 사는 어여쁜 여사님 권 박사가 가져다주는 마른 빵도 부스러기로 만들어서 비빔밥에 함께 비빈다. 또 어느 때는 칸트도 조금, 헤겔도 조금, 그리고 내 스승 루돌프 베를링거 교수도 조금, 그리고 정석해 교수도 조금 함께 넣고 내 비빔밥 철학을 비벼보기도 한다. 왜? 입맛에 맞으면서도 건강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 p.16 일상적인 나는 곪을 대로 곪고 썩을 대로 썩어 있기 때문에 너무 지쳐 있다. 말로만 자기반성, 자기비판, 자기 창조를 이야기할 뿐, 실은 기진맥진하여 거대한 ‘사회 벨트’가 실어 나르는 대로 막연히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도 일상적인 나는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까? 지배욕과 이기욕이라는 원초적 욕망이 욕망 충족을 강하게 원하므로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으면서도 숨을 헐떡이면서 사회라는 벨트 위에서 끈질긴 생명줄을 놓지 않는다.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일상적인 나는 더 이상 인격체로서의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할까? 일상적인 나는 사방에서 엄습하는 불안을 극복할 힘이 없다. 어쩌다 보니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아이를 가져야 할지 고민한다. 대기업에서 일해도 몇 년 버티면 퇴직해야 하니 미래가 항상 불안하기만 하다. 삶의 절망은 쓰나미처럼 자주 일상적인 나를 덮친다. 불안과 공포가 한꺼번에 나를 억누른다. 공포는 대상이 뚜렷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막연한 두려움이다. 공포의 원천은 불안이다. --- p.21 키르케고르의 불안의 씨앗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에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해변에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 저는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왜 가난과 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나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저같이 성실한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예 하나님이 없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신앙의 대상이 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불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절대자에 대한 아버지의 저주가 키르케고르의 삶에 불안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목사가 되고도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가 된 결정적인 사건은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 및 파혼이었다. 키르케고르는 현모양처감인 레기네 올센과 결혼하면 불안의 씨앗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항상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던 키르케고르는 약혼한 이후 줄곧 고뇌에 시달리다가, 파혼을 선언하고 덴마크를 떠나 독일로 향했다. --- p.30 성격에 관한 심리학 이론으로는 유형론, 특질론, 프로이트의 성격론, 융의 성격론, 성격역동 이론 등이 있는데, 이는 개인의 성격이 일관성이 있다는 입장과 일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으로 나뉜다. 사회 학습 이론가들은 개인의 성격이란 관찰자가 보기에 일관성 있는 것처럼 여겨질 뿐, 사회 상황에 대한 사고와 행동 방식이므로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비정상적인 성격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개인이나 반사회적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개인을 이해하려는 심리학자는 성격의 일관성을 주장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사회 학습 이론가들은 공통적인 행동과 심리 과정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개인의 성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기주의를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p.36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에 의해 자아가 명백한 관념임을 밝힌다. 자아가 불변하는 보편적 관념임을 밝히기 위해 의심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는 가장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을 꿈이라고 보았다. 제아무리 위대한 진리, 엄청난 권력이나 대단한 아름다움도 한낱 꿈속의 대상이었다면 무의미하다. 꿈이 첫 번째 의심의 대상이었다면, 두 번째 대상은 감각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만지며, 맛을 본다. 그러나 감각적 지식은 수시로 변하므로 확실치 않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확실하며 불변하는 진리일까? 수학적 지식은 확실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2+3=5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을 속이기를 좋아하는 신이 있어서 이것이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런데 의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주체(주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 p.45 현대로 접어들며 인간은 개인 내지 개체가 되었다.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은 인간인 개인들이 마주하는 절박한 삶의 단면이다. 후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전문 분야의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외모와 학연, 지연, 인맥 등을 두루 갖춘 개인은 우월한 자아의 소유자로 인정받는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자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인 관습, 곧 사회적 편견의 노예가 되어 굳어버린 자아를 세습하면서, 왜 살아가는지도 모른 채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게 된다. “산다는 게 별거야? 혼자 중뿔나게 잘난 척해 봐야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남들도 바보라서 그렇게 사는 줄 알아?” 결혼하고, 집 사고, 자동차 사고, 자식 낳고, 연금 붓고, 퇴직해도 안정되게 살 수 있는 자아를 키우고 소유하는 것이 일상적 개인의 견고한 자아가 지닌 생각의 전부일까? --- p.52 프로이트가 꿈을 해석하는 이유는 이성적 꿈은 조작된 것이지만, 원래 꿈의 내용이나 재료는 기존의 꿈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아 역시 꿈처럼 여러 가지 합리적인 껍질을 덮어쓰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술을 먹어봐야 해! 술 먹으면 본심을 이야기한다니까!”, “연애할 때는 상대를 제대로 알 수 없어. 일단 결혼하고 나면 상대방이 어떤 인간인지 확실히 드러날 거야!”라고들 한다. 인간의 자아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개념으로, 인간의 지능은 매우 길고 복잡한 역사를 통해 일상적인 자아 개념을 확고하게 간직한다. 신생아들을 보면 지각과 성격을 발달시켜서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리 내어 울고 웃으면서 지각, 사유 및 언어의 순환 고리를 삶의 수단으로 택하는 아기들의 행동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인간의 삶에는 본능과 문화가 교묘히 결합되어 장구한 시간에 걸쳐서 자아를 확고하게 만들어왔다. --- p.56 인류 역사와 사회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더욱 굳히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쉽게 말해 상식의 틀이다. 진리와 허위,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은 대표적인 이분법의 예다. 그러나 진선미에 관한 인간의 지식은 역사 문화적 맥락, 사회 상황, 권력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거대 담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즉, 진선미는 영원불변하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이데아이고, 그 그림자인 참다운 학문, 선한 행동, 아름다운 여성 등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플라톤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빈 구멍과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굶주림으로 발버둥친다. 욕망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전성과 절대성이다. 욕망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충족을 바란다. 그러나 욕망 자체는 빈 구멍이기 때문에 아무리 채워도 여전히 비어 있다. --- p.82 어떤 사상가의 사상은 그가 처한 사회 상황과 단절될 수 없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회 상황이었으므로 소크라테스는 불변하는 자아와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테고, 그러한 그의 생각은 플라톤에 이르러서 꽃피우기 시작했다. 플라톤의 『변호』와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독약을 마시게 된 이유가 기록돼 있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청년 및 정치가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무지를 폭로했기 때문에 암암리에 적개심을 샀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는데,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소크라테스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위법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아폴로기아(Apologia)’를 흔히 ‘변명’이라고 번역하는데, 『변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리스 신들을 믿으며 청년들을 정의로운 길로 이끌었으므로 전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므로 구차스러운 ‘변명’이라기보다는 당당한 ‘변호’다. --- p.94 오랜 관습과 전통에 따라 전쟁은 악이고 평화는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 현실을 접하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전쟁 상황에서도 선과 악은 상대적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에서는 아동과 부녀자들의 인명 피해가 엄청난 숫자에 달한다. 그런데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총격을 가해서 인명 피해를 발생하게 했으므로 대응하는 것뿐이라고 성명을 발표한다. 대개 사람들은 살인을 가장 나쁜 죄라고 여겨서 살인자를 재판하여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한다. 그런데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나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는 선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악한 사람들인가 이스라엘 군대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살상하고 팔레스타인 군대 또한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을 살상하면서, 각각의 군대는 자기편이 선하고 상대가 악하다고 강변한다. 일상생활에서 강도짓 하는 것은 악이고, 전쟁에서 상대 국가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선인가? --- p.142 왜 평화를 추구해야만 하는가? 평화는 모든 적대 행위, 곧 전쟁의 종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는 낙천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답게 현존하는 군대의 해체를 주장한다. 군대는 전쟁을 위한 인간의 집단이고, 전쟁에서 인간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단순한 기계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전쟁은 법률로 정당하게 판정할 수 있는 법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다. 본래적인 선한 인간성과 도덕법칙이 결여된 자연 상태인 것이다. 전쟁에 의해 영원한 평화가 가능하다면 그 평화는 엄청난 인류의 묘지를 세우고서야 가능하기 때문에 전쟁과 아울러 전쟁 수단의 사용은 철저히 허용해서는 안 된다. 칸트는 평화 상태는 인간의 숙고와 노력에 이해 구축되는 상태이므로 자연 상태인 전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이는 근대 영국 경험론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의 견해를 계승한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인간의 자연 상태이고, 이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다. 그러나 홉스에 의하면 인간은 이성의 기록에 의해 가능한 한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계약이 성립하고, 계약에 의해 모든 사람들의 권리는 완전한 힘을 소유하는 군주에게 이양되어 권력이 된다. --- p.154 독일은 원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 비해 문화 수준이 낮았다. 근대 이전에 르네상스를 겪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르만족은 200~300개의 봉건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독일은 서너 개의 봉건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프로이센은 통일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르네상스를 겪지 못한 독일은 야만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꽃피운 르네상스 문화를 송두리째 흡수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독일의 마지막 통일을 위해 프로이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와 같은 인물이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통일의 마지막 에너지들로서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같은 철학자들과 바흐, 헨델과 같은 음악가들, 그리고 괴테와 실러 등의 대문호들의 문화적 업적이 커다란 기여를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 p.160 노자의 『도덕경』을 읽다 보면 움직이는 태극(太極)의 그림이 떠오른다. “세상 사람들이 미(美)를 미라고 하는 것에서 추함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이 선(善)을 선이라고 하는 데서 불선(不善)이 나온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음과 양이 왜 하나의 태극이면서 동시에 둘로 나뉘는지 이해할 듯하다. 『도덕경』의 내용은 심오하고 난해한 듯하지만, 실은 단순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도덕경』에서 말하는 느림과 여유의 삶은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우리가 지나치게 고매하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낄 뿐이다. 『도덕경』 상편 3장을 살펴보면 “현자(賢者)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을 경쟁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얻기 어려운 보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욕망하게끔 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면,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할 수 있다”라고 한다. 4장의 첫머리에는 “도(道)는 빈 그릇이지만 아무리 퍼내어 사용하더라도 다시 채울 필요가 없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을 천천히 읽으면서 눈을 감고 지금 현실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서 뜻을 새겨보면 갑자기 환한 빛이 퍼져오는 것을 느낄지도 모른다. --- p.169 미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연이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이해타산이나 계산 없이 순수하게 대상을 느끼면서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쾌감과 아울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와의 곡선, 저녁해가 넘어가는 산마루의 능선, 고려청자의 신비스러운 광채, 거문고의 청아한 음 등을 접할 때 감각적인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는데, 감각적 쾌감은 감각적 가치다. 그러나 예술이 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 이후로 아름다움의 가치에서 가장 비중 있는 기준이 된 것은 형식적 가치다. 형식적 가치는 감각적 가치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외모의 아름다움은 감각적 가치로 그치고 만다. 그런데 형식적 가치는 대상(자연과 예술작품)의 조직, 색깔 또는 음조 등을 포함하면서 조화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음악의 경우, 장조와 단조의 가락은 많은 음으로 구성되는데, 서로 다른 음이 연관되어 동일한 음 관계의 연속이 성립한다. 동일한 음 관계의 연속은 감각적 가치를 넘어서서 형식적 가치를 나타낸다. --- p.195 플라톤이 보는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대화편 『필레보스』에서, 아름다운 사물은 수학적 척도에 의해 부분과 부분의 적절한 비율에 따라 신중하게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척도의 성질과 비율은 변하지 않고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구성한다. 아름다움 자체는 수학적 척도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데아계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예술작품은 모사의 모사이므로 예술에 해당되는 지식은 참다운 인식이 될 수 없고 속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예술은 추측이나 신념에 해당된다. 영원한 이데아계에 대한 지식은 참다운 인식이지만, 이데아계를 모방한 현실의 현상계는 모사다. 이데아계의 모사인 현상계의 사물을 또다시 모방하는 예술은 모사를 모사한 것이므로 낮은 단계의 속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호메로스는 위대한 서사시인이지만 그 자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왜 자신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낮은 단계의 지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 p.201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범주를 끌어들여서 아름다움을 다음처럼 정의한다. 첫째,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름답다. 계산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질(質)에 따라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유쾌함이나 선과는 질적으로 다른 만족을 느끼게 한다. 유쾌함은 감각적 욕구의 대상이고 선은 도덕법칙에 따라서 추구하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아무 이해 관계없이 만족을 준다. 둘째, 양(量)에 따라 개념 없이 보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름답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발견할 경우, 나는 다른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것을 기대한다. 셋째, 관계에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목적과 상관없이 형식에 의해서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여겨진다. 칸트는 여기에서 자유로운 아름다움과 종속적 아름다움을 구분한다. 우리는 산이나 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그것들의 본질에 관한 어떤 개념도 가질 필요가 없으니 이 경우 산이나 강의 아름다움은 자유로운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건물의 아름다움은 대상과 개념의 일치가 전제되어야만 아름답다. 예컨대 사찰이나 한옥의 아름다움은 대상과 개념이 일치할 때 성립한다. 넷째, 양태에 따라서 개념 없이 필연적으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름답다. 즉, 감정에 의해서 규정 가능한 공통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름답다. --- p.210 『바가바드기타』의 원래 제목은 ‘가장 고귀한 자의 노래의 가르침(Srimad-bhagavad-gita-upanisadas)’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기원전 5세기쯤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특히 형이상학(존재론)과 윤리학에 관한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욕망이 산야사(명상을 추구하는 자)의 욕망과 같다고 말한다. 아르주나는 왕자이고 전쟁터에서 왕자의 의무는 전투 참여다. 명상을 추구하는 자(산야사)는 험난한 현실을 극복하기보다 도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르주나 역시 힘든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한다. 아르주나는 가족, 친척, 가까운 사람들의 선(善)을 위해 맞서서 싸우는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쟁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세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부 크리슈나는 처음 전쟁에 참여하기로 작정했던 아르주나의 결심을 상기시키고 본래의 의무를 다할 것을 충고했고, 결국 승리를 위해 왕자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결단을 내리게끔 한다. --- p.254 나가르주나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사물을 분별하는 지성을 넘어서서 우주 자연과 자아의 내외, 전체와 부분, 형식과 내용 등을 통찰하는 지혜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깨달음, 곧 해탈이나 열반으로 보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2~3세기의 인물이므로 이미 베다, 『우파니샤드』, 소승불교 등에 정통했고, 대승불교의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중관론의 시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말은 일상적 의미의 공, 허가 결코 아니다. 산스크리트어 ‘순야(sunya)’는 ‘빈, 상대적인, 우연적인’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사 ‘순야타(sunyata)’는 ‘상대성, 우연성’ 등을 뜻한다. 우주 만물과 자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상대적이고 우연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문으로 우주와 자아를 모두 공(空)과 허(虛)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가르주나의 열반관은 원효의 깨달음에 관한 언급과 일맥상통한다. “깨달음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이 세상과 극락은 본래 한마음이다. 생사와 열반은 두 가지가 아니다.” --- p.2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