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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문을 닫아주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2. 누가 바스키아를 죽였는가 3. 봄날은 간다 |
황주리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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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서평 위원 정은숙
황주리의 그림이 그렇듯이 그의 에세이들도 밋밋한 통찰력,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미지근한 통찰력으로 넘쳐난다. 밋밋하다는 것은 아무 감동도 줄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하리라. "싫음 말고"라고. 그런데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그녀의 에세이는 안달하지 않고, 자신의 사유를 타인에게 강요하듯 말하지 않고 또 그대로 여유로우면서 적절히 할 말을 하는 드문 예이다. 그녀는 이제 막 출간된 <날씨가 너무 좋아요>을 통해 화상도, 동상도 주지 않는 그저 감기약을 먹을 정도로만의 따뜻한 물이고자 하는 태도로 담담하게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시달릴 대로 시달려서 이제는 완전히 잊고 싶은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실도, 사실은 여전히 어딘가에 닿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뒷모습을 보거나, 그와 비슷한 말투를 쓰는 사람을 볼 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우리들 괴로운 시간들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그녀는 여러번 반복하여 삶의 또다른 얼굴인 죽음, 혹은 다른 생에 대해서 적고 있다. 밀란 쿤데라와 잉게보르크 바흐만을 인용하거나 거론하면서 그녀는 마치 유서를 쓰듯이 살고 있다. 책의 전편을 통해 숱하게 떠올리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애틋한 한 시절에 대한 반추이면서 남겨진 자신에 대한 연민의 발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딱히 바람직한 삶, 더 보람된 삶을 향해 진전되지 않는다는 아픈 인식이 숨겨 있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고 꼽는 곳은 뉴욕에 있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안에 있는 이층 카페다. 그곳에서는 1백여 개의 무덤이 있는 작은 묘지터가 잘 보인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산 자와 죽은 자들이 가장 근접해서 놓여진 그곳에서 그녀는 한 번이라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묘지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저렇게 종종걸음을 치며 무언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적고 있다. 이 책에는 화가 특유의 뛰어난 사생력과 직관력으로 아로새겨 놓은 빼어난 표현들이 많다. 가령 '트럭 위에 꽁꽁 묶인 채 실려가는 이삿짐들을 보면 슬퍼진다'거나, '심플 라이프가 가장 진화된 삶의 형태'라거나, '나이가 들면서 쓸쓸해지는 건 마음에 드는 사람뿐 아니라 사고 싶은 물건조차 없어진다'거나, '유독 자기 자신을 향한 동정심이 많고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이 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런 표현들을 둘러싼 정조는 그녀의 그림이 그렇듯이 모노톤이다. 이 글들 적고 있을 때 그녀는 아주 많이 가라앉아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해 본다. 모노톤의 글 사이로 다소 알록달록한 감상이 묻은 이런 내용도 있다. 사실은 이런 지적에는 다소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마음이 가난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의 시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서 몇백만 부씩 박테리아처럼 공중에 퍼뜨리겠다고 해도, 시인은 그렇게 많은 시를 매일 써내지는 못할 테니까." 이런 시인들의 시보다는 너무나 가볍고, 거짓 위안이나 주는 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우리 상황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그녀는 시인에 대해서만은 현실을 좀 낙관적으로 보고 있나 보다. 이 책의 제목 <날씨가 너무 좋아요>는 어느 사람의 유언에서 따왔다고 하니 제목만 보고 화사한 이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화사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어려운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 깊은 위안이 될 때도 많다. 화려한 꽃들이 뿜어내는 짙은 향보다는 담백한 빛깔의 꽃의 향이 더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담백한 빛깔의 꽃처럼 강한 여운을 남긴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임종시에 했다는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창문을 닫아주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이 에세이를 다 읽고 나서 창밖을 보니 정말이지 날씨가 너무나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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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시대가 가고 경제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이 달라진 동전의 앞뒷면과 같을지 모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름 역시 다른 경제 체제를 선택함으로써 시작된 구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자신이 가진 그 무엇을 팔 수 있는가에 존재 의의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사람, 말을 파는 사람, 지식을 파는 사람 등 정말 우리는 무언가를 팔지 않고는 살 수 없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엔 배가 고파서 피를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피를 팔아 끼니를 이을 쌀을 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피보다 값나가는 신장을 팔기도 한다. 1960년대 우리는 가난했고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겼으며, 젊은이들은 월남전에 참전해 한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고스란히 송금했다. 그들은 젊은 목숨을 담보로 하루에 1달러 50센트씩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사한 군인들의 유가족들에게는 소 한 마리씩 돌아갔다고 한다. 그 이름도 용감한 맹호부대 용사들아, 그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아련한데, 아들을 잃고 우는 어머니들의 눈물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우리는 2000년을 바라보는 20세기의 끝에 서 있다. --- pp. 178-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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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내 편 네 편을 쉽게 가르지만, 적도 동지도 없는 세계는 어쩌면 더욱 쓸쓸한 어른의 세계네요. 세상의 막막한 벌판을 향해 돌을 던져 봤자 , 빙 돌아서 곧 내 이마 위로 떨어지는 돌. 결국 자기 자신의 동지도 자신뿐이고 자신의 적 또한 자신뿐이란 걸, 난 이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아요. 그래도 쓸쓸한 세상을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라고.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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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란,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이 험난한 삶을 헤치고 살아 남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남녀가 모두 넉넉한 생활을 누리고,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결혼이란 몹시 불필요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족이란 단위는 때로 어쩔 수 없는 힘을 지닌다. 마치 한 나라라는 단위가 가지는 울림처럼.
--- p.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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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황주리는 국내외 화단으로부터 지속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일급의 화가이다. 연배로나 활동 사항으로 보나 그는 가히, 화가로서의 어떤 전성기에 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하거나 게으름을 피울 줄 모른다. 황주리라는 확실히 열정적이며 게으르지 않은, 성실한 화가이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가 원색의 관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관능은 말하자면 병적이고 기괴한 광기가 아닌, 그의 성실한 열정에서 유발된 것들이다. 성실함이 화려함의 관능적인 본질을 수식하는 경우란 흔하지 않다. 그가 원색을 즐겨 쓰는 것은, 이를테면 삶과 세상에 대해 피하지 않는, 성실하고 단호한 입장의 반영인 것이다.
책갈피마다 들어 있는 그림들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사람을 즐겨 그린다. 그의 밝은 눈에 사람의 육체성은 즉각적으로 포착된다. 그의 그림 속에는 수많은 육체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익명으로 일그러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다. 달리는 육체, 술 마시는 육체, 운동하는 육체, 노젓는 육체, 담배 피우는 육체, 이 모든 육체는 일종의 만화경을 만들며 개별과 집단의 경계 없이 혼융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다양하고 현란한 육체들을 통해 그는 과연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건 어떤 자유에의 강박이었을까. 혹자는 그런 육체들에서 문명비판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실존주의를 읽고 가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인간 소통의 열망을 읽기도 한다. 황주리는 육체에 집착하지만 그것을 도발하려 들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그 육체들은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배치되어 원시의 생명력을 가진 고무인형처럼 '꼬물꼬물'댄다. 이 낯설고 기이한 풍경을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글도 그의 그림만큼 한없이 자유로운 몽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황주리의 글들은 그의 그림들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필요한 영리한 주석이거나 혹은 그 그림들이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황주리의 글에서는 풋풋한 물미나리 냄새가 난다. 장치와 수사로서의 어떤 가식도 허위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글에서는 매우 단호하고 염결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는 병든 할머니의 임종을 목도하면서 그 삶의 엄숙한 종료에 대해 진저리를 치기도 하고, 실연을 안긴 남자이 직장 근처를 지나면서 느낀 상실의 아픔을 담담히 고백하기도 한다. 그리고 딸자식에게 옛다 하면서 담배 한 갑을 던져주던 아버지를 정말 그립게, 그립게 추억하기도 한다. 그리고 맨하튼의 창 밖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묘지의 풍경과 음울한 동구의 도시 바르샤바에서 맞은 서른다섯의 생일, 그 고독의 이색을 말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새벽비처럼 소삭이고 어 떤 때는 북풍처럼 분노하고 또 어떤 때는 강물처럼 흐느끼는 그 열정에 찬 다성적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어떤 정직한 사람의 맨살을 마주 안는 것 같은 정감 어린 착각이 들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