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 소설을 읽으면서 열목어(熱目魚-Brachymystax lenok)에 대한 생각을 했다. 열목어는 '경골어류 청어목 극지송어과의 물고기인데, 목은 길고 측편되었으며 몸 빛깔은 은색 바탕에 눈 사이와 옆구리, 등지느러미, 가슴지느러미에 크고 작은 자홍색의 불규칙한 작은 반점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산란기인 4~5월이면 온몸이 짙은 홍색으로 변한다.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 부분은 흑록색을 띤 무지개 모양의 광택을 내며 아름다운 무지개 빛의 지느러미로 변한다. 냉수성 어류로서 일생을 깨끗한 하천의 상류에서만 산다. 항상 수온이 낮은 곳을 좋아하므로 여름철에는 냉수를 찾아서 상류로 올라간다.'
열목어가 그렇게 냉수를 찾아 상류로 올라가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성정 때문이다. 소라 고동, 우렁이 고동의 나선이 시계방향으로 돌며 상승하는 것, 태풍의 눈이나 용오름이 오른쪽으로 도는 것, 나팔꽃 덩굴, 호박 덩굴의 손이 마찬가지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는 것이 다 그러하다. 모든 것들은 낮은 삶으로부터 좀더 상층에 있는 삶으로 나아가려고 꿈꾸며 발버둥친다. 그것은 우주적인 힘의 율동이다. 프로이트의 '고대의 잔재', 융의 '원초적이고 옛날부터 이어받은 유전적인 인간의 마음의 형태'도 같은 패턴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노자 '장자의 도(道)', '천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한 법칙(率)'이라고 한 주역에서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의 목적인 '비둘기집 사람들'의 주인공들이 결국에 이르는 곳, 시간이 없는 자궁으로의 슬픈 회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바다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탄생한 모태이다. 그것은 우리들 우주의 자궁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자궁으로의 회귀 본능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바다는 가시적인 것일 수도 있고 비가시적인 무의식의 바다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참담한 실존이 있을 뿐 종교적인 구원이 없다. 청미는 물고기가 되고 싶어 한 대로 바다 속으로 용해되고 있고, 형만은 고향을 버리고 밤길을 나섰을 때 물줄기만 따라서 일자로 갔듯이 이제 죽음을 앞둔 허허로운 바다 속으로 흘러간다. 열목은 원래의 빈손으로 돌아가고 있고, 성우는 청미가 없어진 다방에서 '마음 한쪽이 뭉텅 잘려나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간은 잔인한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 않은 것들을 파괴한다. 어떤 존재에게 미래가 없을 때 시간도 따라서 없어진다. 이들의 회귀는 미래 없음, 즉 시간이 지워진 공간으로의 회귀이다. 다만 성우에게 미래가 창조될 기미가 보일 뿐이고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의 희망일 수 있다.
이 소설의 끝 문장이 말해 주듯 '비둘기 여인숙'은 정적 속에서 숨을 죽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안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도는 음지식물 같은 현대인들의 비가시적인 시공 속에 존재하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청미를 위하여, 돌아가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많은 형만을 위하여, 매혈한 돈을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마셔 버리는 수많은 열목과, 싸구려를 부르며 시장통을 누비는 많은 성우를 위하여, 행상을 하다가 개에게 물린 상처에다 된장을 바르는 많은 어머니를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시공으로서의 그 바다와 자궁의 딴 이름인 '비둘기 여인숙'은.
--- 한수산(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