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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달동네와 그 변두리에 사는 친구 집을 들락거리던 ‘배고픈’ 시인 함민복.
시인은 어느 순간 함께 가난하면서도 기꺼이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는 이들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때마침 1996년 우연히 찾은 강화도 마니산 끝자락에서 보증금 없이 매월 10만원에 살 수 있다는 폐가를 한 채 발견했다. 집주인을 만나 집 앞의 텃밭과 그 옆에 우뚝 선 고욤나무 한 그루가 폐가에 묶인 세간이란 걸 알았다. 방랑벽이 있던 시인은 기뻤다. ‘술’과 ‘시’를 좋아하며 흥얼흥얼 취하길 좋아했던 시인은 곧바로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시인은 텃밭에 심을 봄 가을 씨앗을 생각하며 강화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를 알고 지냈던 동료 시인들은 훌쩍 서울을 떠난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서울서 내려온 시인을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은 시원한 서해 갯바람. 포구에서 날아온 갈매기는 동막리에 풀어놓은 조촐한 그의 살림을 보고 날아갔다. 시인은 아무런 연고 없이 찾아온 강화에서의 삶은 스스로가 선택한 외로움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시공부를 마치고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갈 형편이 못되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마음이 아팠다. 일찍이 그의 시를 읽고 감동받은 이들은 동료 시인들이 먼저였다. 독자들은 시를 통해 거주지가 바뀐 시인의 삶을 알았고 바다 쪽으로 다가간 그의 삶을 격려했다. 한 애독자는 신문에 난 그의 기사를 읽고 ‘춥게 살지 말라고’ 얼음장 같은 방에서 자는 그에게 기름 값을 계좌로 보내었고 또 다른 분은 그의 시를 읽고 감동의 편지를 보내 격려하기도 하였다. 가난하지만 착한 마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는 시인의 모습을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사연들이다. 이것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은 ‘문학인’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이었다. 함민복 시인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한 시「긍정적인 밥」과 「눈물은 왜 짠가」는 IMF 이후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훈훈한 시정을 선사했고 대신 그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한국 시단의 중견시인으로 성장하며, 때론 ‘괴짜’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가끔 동료 문인들은 홀로 떨어져 사는 그의 안부를 캐며, 부럽다는 인사치레를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아픔에 대해선 일절 침묵으로 일관하는 스타일.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은 얼핏 보아도 섬사람처럼 짭조름하게 간이 밴 모습이다. 하루 두 번 운명처럼 밀렸다 다시 들어오는 물길의 속도를 가늠하며 산 지 어느덧 10년. 그의 스케줄은 그 ‘물길’의 법칙에 따라서 많이 변모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세월만 한 스승도 없다’. 몇 해 전 출간한 그의 시집은 좋은 호평을 받았다. 문학상도 두어 개 받아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그 시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이제 세속의 욕망을 경계하며, 무욕의 시선으로 비로소 강화의 자연 풍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의 이치’를 살핀 그의 시심은 물처럼, 수평적인 삶의 근원을 우리 인간이 잃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강화 일대가 개발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함민복 시인은 이곳 어민들처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일로 자신의 시업을 메워나가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제 사십 중반을 넘기는 이로서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다. 강화 뻘의 건강한 생태처럼 말랑말랑한 힘을 뿜는 글쓰기를 어려운 생활가운데서 체득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를 예의 주시하고 살폈던 이들은 이제 그를 ‘어민후계자 함민복’으로 부르며 ‘물고기’를 나누고 ‘석박지’를 나누는 이웃이 되었다. 그는 이곳 섬사람들과 똑같이 그물을 꿰매며 ‘물때달력’에 맞춰 조개와 낙지 잡는 일로 한나절. 망둥어와 새우 잡는 일로 한 계절.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어부들과 어울려 ‘석양주’ 한 잔에 “뭐 말이껴?” “그랬으껴”, 한 통속 마을 주민이 되어 “나 민복이는 이제 강화사람아니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