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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병든 애인 허무의 도시 그 사람의 첫사랑 200호실 국장 와이셔츠 징계위원회 다큐채널, 수요일, 자정 차가운 별의 언덕 개종 부록 ㅣ 나의 문학적 연대기 |
裵琇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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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작품 세계
대중문화의 감각적 이미지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독특한 스타일로 혼합시킨 작품들로 주목받아온 배수아는 신세대 작가의 선두주자로 즐겨 언급되곤 한다. 우울하면서도 허무적인 정서를 기조로 배수아는 우리가 상상해 왔던 기성의 소설 문법에 대한 '무감각'을 보여준 바 있다. 경험화된 현실을 뛰어넘는 것뿐만 아니라 소설의 존재 의미조차도 무의식적으로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배수아의 소설은 새로운 문학의 조건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이란 무언가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이미지로 꾸며진 현실을 자유롭게 탐사하는 이 새로운 작가의 등장은 한동안 독자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이러한 그의 이색적인 태도 속에 그의 문학적 조건과 한계는 잉태되어 왔다고 보여진다.
배수아의 소설들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독자와의 소통을 의식한 상당히 정련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 동안 배수아 소설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던 '여자아이의 성장담'이 거의 엿보이지 않는다. 공주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도 할 수 있을 동화적 환상의 분위기가 잦아든 대신 성숙하고 지친 일상 여성의 모습이 부각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변화이다. 일상 현실의 색채가 강화되고 주인공들이나 그 생활배경은 비교적 리얼하게 그려진다. 예컨대 「징계위원회」나 「200호실 국장」, 「병든 애인」에는 직장인의 일상과 세태가 상당히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환상적인 이미지는 많이 줄어들고 주제를 적시하는 인물들 간의 대화로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시도도 눈에 띈다. 내면적인 자기 고백이 강했던 이전의 소설들과 비교해 본다면 확실히 다른 면모이다.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 역시 담담하고도 차갑다. 소재와 배경의 현실성을 갖추긴 했지만 배수아의 소설은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려는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과 분명한 차별점을 두고 있다. 환상적인 이미지의 직조가 더욱 정교한 가공술에 힘입고 있을 뿐 그의 소설은 근본적으로 상품의 기호가치적 속성에 의존하는 판타지의 계열에 속해 있다고 봐야 한다. '1899년'이라는 고전적 시대 배경을 취하는 표제작「그 사람의 첫사랑」의 발단 부분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케 한다. 어린 소년의 첫 눈에 들어온 투명하고 아름다운 소녀의 순수한 이미지는 어느 순간 배수아 식으로 일그러지고 모욕당한다. 가난한 소녀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부잣집 소년 역시 영원한 왕자가 아니다. 환상은 여지없이,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깨지는 것이다. 환상의 붕괴를 통해 삶의 남루함을 자각하는 배수아의 서사는 결혼 생활의 이야기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차가운 별의 언덕」에서 주인공 여자는 아이가 둘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긴장되고 피로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남편은 여자를 끊임없이 의심하는데 여자 역시 남편을 기만하며 다른 남자를 만나는 허위적 일상을 이어나간다. 삶의 모욕은 이처럼 주도면밀하게 애초부터 준비되어 있던 것이다. 배수아의 불행의 서사들이 소리내어 외치는 것은 모든 환상은 어느 순간 한꺼번에 붕괴된다, 라는 진실이다. 그 악몽과 불행의 서사는 신기하게도 사춘기 소녀들이 꿈꾸는 판타지, 로맨스, 순정만화와 똑같은 형태로 변주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공적인 이야기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판타지이며, 더욱더 강한 자극과 충격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꿈꾸기이다. 현실적 비극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어떠한 반성적 결말이나 진정성도 보장하지 않는 이 무심한 글쓰기의 방식은 우리에게 일말의 섬찟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현실의 껍질을 뒤집어쓴 실체 없는 이미지들이며, 때로는 안전한 현실 속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게 만드는 두려운 몽환의 세계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