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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남아 1미터짜리 농어 잡을 줄 짐작이나 했겠나
_지리산 빨치산 할머니 고계연 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나노 _반세기 넘게 홀로 가문을 지켜온 종부 김후웅 내 자궁은 뺏겼지만 천하를 얻었소 _일본군위안부 김수해 할머니 죽음의 강 황하를 건너온 소녀 _중국 팔로군 출신 기공 연구가 윤금선 지상에 없는 남자, 그만을 향한 50년 _한 달의 인연을 영원으로 간직한 최옥분 할머니 종횡무진 욕으로 안기부를 제압하다 _문화판의 걸출한 욕쟁이 할머니 박의순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_황진이보다 더 치열했던 춤꾼 이선옥 명성황후의 한을 풀다 _명성황후의 화신이 된 여자 이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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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투가 있던 날입니더. 무기도 없고 인원도 모자라고 당해낼 재간이 없었네요. 우리는 40명 가량 됐습니다. 국군이 포로를 일렬로 세워놓고 각자 자기 앞에 구덩이를 하나씩 파라고 합디더. 팠지예. 각자 판 구덩이 앞에 나란히 서라고 해서 섰지예. 그런데 오른쪽으로 1번부터 하나씩 총을 쏘는 겁니더. 그러면 방금 제가 파놓은 구덩이 안으로 툭툭 떨어지네요. 무섭지도 분하지도 않습디더. 아무 생각이 없습디더. 나는 대열의 중간쯤에 있었네요. 한 25번이나 됐으까. 빨리 내 차례가 왔으면 싶었네요. 죽으면 발이 아파 우는 짓도 안하겠지, 이가 내 몸을 파먹지도 못하겠지… 내 옆에 있는 동지들이 한 스무나믄 명 구덩이 속에 쳐박혔는데 산 아래서 누가 소리를 지릅디더. ‘사격중지! 생포!’ 그러니까 총질이 멈춥디더. 나는 내가 판 구덩이에 안 묻혔습니더. 안 죽고 살아났습니더.
----3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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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김후웅의 '죽으면 썩을 몸'과 '신외무물'의 철학은 그의 가련한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그의 앞에 펼쳐진 삶이 그에게 은연중 그걸 강요했던 것일 게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 큰 종가의 종손 없는 종부 노릇, 받들어 모셔야 할 시어른, 세상의 재빠른 가치 변화, 가슴에 넘쳐나는 특유의 정감, 오로지 자신이 죄인이란 자책, 거기에 덜미를 잡는 가난. 그는 요즘도 여전히 따뜻한 밥엔 선뜻 손을 대지 못한다. 새 옷을 보면 천리만리 도망친다. 밥이 좀 식어야, 남이 달게 먹을 수 없을 만해져야, 비로소 죄송스럽다는 듯 숟가락을 든다. '죽으면 썩을 몸'이 음식을 탐해서 뭣하냐는 거다. 그럴 때 옆에서 핀잔을 해선 안 된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8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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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傳)는 수난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 여자의 인생 역정을 다루고 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지도 모른 채 이들은 한국 현대사의 복판으로 던져졌다. 해방이 되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몰랐고, 전쟁이 일어났지만 누가 누구를 향해 총을 쏘고 있는지도 몰랐다. 피난길에 아버지와 오빠를 찾아 산에 올랐다가 빨치산이 된 여자, 남편이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50년을 넘게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종가의 며느리.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만주에 갔다가 중국팔로군에서 생사를 넘어야 했던 여전사.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차에 올라탔다가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일본군을 맞아야 했던 위안부의 삶 등, 파란만장의 인생을 겪어야 했던 이야기들이 애절하게 펼쳐진다. 이들의 삶 속에는 한국 현대사의 파편이 곳곳에 박혀 있다. 그러나 하나같이 내 인생이 처절했노라고 한숨 쉬지는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졌지만 두 발로 똑바로 서서 수난의 세월을 헤쳐나왔다. 빨치산에서 탁월한 세일즈우먼으로, 팔로군에서 뛰어난 기공사로 변신했다. 황진이보다 더 혁명적인 춤꾼, 명성황후의 복권을 위해 애쓰는 기업인, 문화계를 선도하는 걸물, 현재도 종가를 지키는 가문의 파수꾼을 자임한다. 자신의 인생을 가꾸고 이웃의 인생에 애정을 베풀며 살아왔다. 그것은 무슨무슨 이념 때문도 아니고, 거창한 역사의 진보라고 설명할 수도 없다. 오롯이 휴머니즘, 인간애다. 이렇듯 삶에 대한 의지와 긍정, 수난을 털어내는 유머를 껴안고 살아온 여덟 명의 인생행로는 한국 사회가 전쟁과 분단, 가난과 독재를 딛고 발전하는 과정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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