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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합일(知行合一)을 꿈꾸고 실천하던 어느 지식인의 눈에 비친 일제(日帝) 36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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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전집』일기 편을 읽기 전에
일러두기 1. 1930년 2. 1931년 3. 1932년 4. 1933년 5. 1934년 6. 1935년 용어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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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6월 2일
수험준비나 운동경기하다가 늑막염에 걸린 청년학생이 있다는 소식은 종종 들었거니와 복음을 외치다가 폐렴 치사한 운전사가 있다 함은 인간 소식인 것 같지 않다. 듣건대 함남 지방 어떤 노신도 한 분은 새벽마다 등산하여 힘껏 소리쳐서 기도하기를 '이 음파가 들려지는 곳까지만이라도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고 씨름하듯 기도한다고. 미련한 일 같으나 인간의 지혜보다 나은 것이 천국 일이다. ---p.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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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전집 5, 6, 7권』은 일제(日帝) 치하에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지내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꿈꾸고 실천하던 어느 지식인의 일기(日記)이다. 일제 36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록은 아주 간결한 사실 전달과 감상뿐이다.
1935년 4월 25일 - 송두용 형이 내방하여 여러 가지 기묘한 사실을 보고하여 주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경관에게 대하여 '인천으로 갑니다'라고 대답하면 인천도 수만 인구가 사는 대도회인데 '인천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을러대며, '네 가진 보따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먹을 것이올시다'라고 대답하면 '먹을 것에도 밥도 잇고 떡도 있지 그런 대답 버릇이 어디 있어?' 하고는 따귀를 때리고, 맞을까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팔을 눈두덩에 들면 관청에게 저항하려는 행동이라고 해서 포승으로 결박 포인되었다는 등등 실화. 1937년 8월 12일 - 양정학교 교정에 세웠던 손기정 군 기공비의 관우(冠宇)* 훼철(毁撤)*(依官命)되었다. 또 학교에 점심 나르던 청(淸) 요리집 흥성원(興盛園)이 폐문(閉門)한 것과 우리 집 건축에 재목과 양회(洋灰)를 공급해 주던 미야자와(宮澤) 상점 주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 1938년 4월 12일 - 동료 2인과 함께 10주년 근속 기념품을 학교에서 받고 저녁에는 축연에 참석. 주빈석에 앉았으므로 조퇴할 수도 없었다. 오늘밤 연회를 본정통(通) 에도가와(江戶川)에 연 것은 조선요리점에 가면 경찰서 조사가 성가신 까닭이라고. 요리 먹는 데도 성가시게 구는 데가 있는 모양. 1939년 9월 20일 - 오는 토요일에 거행되는 전 경성 학생군(軍) 분열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전교가 용산 연병장으로 출동. 경례는 15도로, 최(最)경례는 30도를 더하여 45도 굽히는 법이라는데 그 각도가 과(過)하였다, 부족하였다는 것으로써 친절, 열성스런 교사들이 교련 교관의 노염을 사는 등 모두 다 국가와 직무에 충성한 아름다운 불꽃이 떨어졌다. 단 나는 멀리 수음(樹陰)에 피하여 교정에 몰두하고 있었음으로 이런 사실도 사후(事後)의 뉴스로만 알았다. 1939년 9월 21일 - 연병장에 나갔어도 나는 별로 도움이 없는 고로 오늘은 학교에 출근하여 식물표본도 정리하며 교정도 하다. ○ 옛날 선배들은 심오한 학리(學理)를 배우며 난행(難行)의 덕성을 닦기에 일야(日夜)로 노심하였는데, 지금의 학도들은 연일 하는 일이 걷는 일과 목을 돌리는 일뿐이요, 또 그것만 잘하면 교육이 다 된 줄 아니 인류의 퇴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한 모양. 강아지 훈련과 별다른 것이 없다. 1940년 10월 19일 - 인쇄료가 비약적으로 등귀(騰貴)하게 되어야 하겠다는 교섭을 오늘 받았으니 일난거(一難去)에 일난래(一難來)로다. 지류 기근과 물가, 임금 등의 등귀에 기인한 일인데 결국 본지에 대하여는 경제적 파탄의 형식으로 나타날 모양이다. 중간 중간에는 난해하다 못해 요령부득의 내용도 적지 않다. 1938년 4월 27일 - 얼마 전까지는 『성서조선(聖書朝鮮)』지 같은 잡지는 순(純)종교 이외의 영역을 범론(犯論)할 것이 아니라고 책망을 받았더니, 그 후 불과 수순(數旬)인 오늘에 이르러서는 정치, 사회 문제를 게재하지 않으려 든다고 꾸지람을 듣게 되다. 시대의 변전(變轉)이 실로 급템포로다. 1940년 5월 2일 - 이미 어제에 발송되었을 터이었던 4월호가 '정전(停電)'이 된 대로 인쇄소에 있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공한 후에 시내 서점에 배달하고 명륜정에서 발송 사무. 1940년 5월 16일 - 오전 중에 총독부에 다녀오고, 산에 올라 구름을 우러러보다. 1940년 6월 24일 - 이미 발송되었을 줄 알았던 137호가 아직 '정전(停電)' 중일 뿐 아니라 새로운 원고를 써야 하게 되다. 총독부와 인쇄소로 왔다갔다하다. 그러다가는 느닷없이 1941년 3월호(제146호)에는 이 일기가 게재되던 난이 폐지된다는 사실이 고지된다. 이른바 '성조통신 폐지의 변'이다. 그에 따르면 '달마다 본지 권말(卷末)을 차지하던' 성조통신은 '실생활에 응용한 성서 주해(註解)의 의미로써 여러 가지 거북한 일도 무릅쓰면서 이것을 연재하여 왔다. 그러나 산 사람의 일지(日誌)인 고로 그 안에는 천연계와 인류와 사회에 대한 관찰도 있었고 감상, 비판도 때로는 없지 않았다. 이제 당분간은 「성조통신」을 폐지하고 오로지 성서 주해 같은 순(純) 학구적인 것으로만 지면을 채워서 속간(續刊)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엉뚱하게도 지기(知己)라 할 수 있는 일본인 친구 가타야마 데츠(片山徹, 작고. 전 토쿄대 물리학과 교수)에게 1938년 1월 1일과 14일에 보낸 편지에서 그 실마리가 풀린다. … 조선에 있어서의 월간 잡지의 발행은 매호 우선 원고의 검열을 받고 허가를 얻은 다음 인쇄하게 돼 있습니다. 검열의 경우 '치안방해'에 저촉되는 곳은 '삭제' 처분되고 그 삭제 부분의 분량 또는 성질에 따라 '불허가'의 처분을 받습니다. 이 경우에는 원고를 다시 쓰고 또 편집을 아주 다시 해서 새로 허가 수속을 밟아야 되는데, 그 수속이 또 굉장히 시끄러워서 '불허가' 처분에는 응징의 의미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성서조선』 107호까지에는 '삭제'는 물론이고 '불허가'의 처분도 십수 회는 받았을 것입니다. … 제108호(1938년 1월 1일부 발행호)의 편집을 끝내고 출판허가원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제출한 것은 1937년 12월 15일 오전 9시 반. 같은 날 오후 경무국으로부터 전화로 신년호의 권두 한 페이지에는 '황국신민서사' 그 1과 2를 게재하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잡지 내용에 '치안방해'의 문구가 있어 삭제된다면 몰라도 적극적으로 관리의 간섭으로 편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라면 도리어 폐간하려고 결심은 했습니다만, 돌이켜 생각하니 조선에 유일한 성서 잡지라는 점도 있어 결국 자신을 꺾고 지령대로 서사를 게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일 후 위 신년호의 원고 전부가 '불허가' 처분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문제도 안 되는 것이 바보 같은 관리의 장난으로 삭제되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적극적으로 이것을 써라, 저것을 게재하라고 해서 1938년 1월호부터는 조선의 신문 잡지는 여러 가지를 권두 제1페이지에 강제로 게재합니다. 이에 예, 예 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고장이 일게 마련입니다. 별송(別送) 『십자가』라는 기독교 잡지의 신년호를 보십시오. 황실에 대해 또 서사 등 실로 어마어마한 풍경이 아닙니까? 이것이 잡지 발행의 교환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 현금 조선에 있어서는 돼지로 떨어지지 않고는 아무라도 합법적인 출판은 불가능합니다. 『성서조선』을 속간하기 위해서는 내가 동경에 이주하든가, 혹은 동경 있는 친구가 발행인이 되어 주는 것인데, 전자는 현재로 불가능하고 후자는 친구에게 크게 폐를 끼치게 되므로 사실상 마음에는 없으나 휴간(혹은 폐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하기로 했습니다. 또 성서강습회도 해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문제되어도 성은 안 낼 작정입니다만, 때때로 탈선해서 스스로 딱합니다. 처음부터 침묵을 지키라면 또 어느 정도 참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하라고 하는 데는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짤막한 사실 전달과 감상의 술회, 그리고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는 일제(日帝)에 대한 비판은 모두가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과 통제의 결과인 셈이다. 바로 이 점을 감안하여 읽으면 일기의 내용은 생생하다 못해 처연하다. 가령 1941년 4월에 함석헌 선생의 구속 이후 집안 사정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면 특히 그렇다. 4월 9일에 평북 용천군 용천면 중흥동 함선생 본댁을 심방하였나이다. 함 선생 자당 이하 여러분이 안녕하시고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면서 손꼽아 대망(待望)하는 살림이었나이다. 후정(後庭)의 과묘(果苗) 가지치기 못한 대로 도장(徒長)하기만 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