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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범이 꾸짖다 범 입맛에 맞는 고기 | 범이 꾸짖다 요술 구경 패루를 지나가다 | 도로 눈을 감게 |
朴趾源, 호 : 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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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독자를 위한 첫 완역 「요술 구경」
이 작품은 환상이나 허구를 다루는 박지원의 글 솜씨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스무 가지 요술 저마다는 판타지나 에니메이션 또는 게임에 못지않게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혹시 고전에 대해 편견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그런 편견을 깰 만하다. 박지원 작품 가운데서도 단연 이채를 띠고 있으며 한국 문학사에서도 보기가 드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까다로운 원문과 교감본이 리상호(작고. 출판은 국립출판사[평양], 1957), 윤재영(작고. 출판은 박영사[서울], 1982~1984)의 정리 작업과 몇몇 전문 연구 성과에 폭 파묻혀 있어서 흔히 접하기 어려웠다. 샘깊은오늘고전이 이번에 새로이 다듬어 실은 「요술 구경」은 프롤로그(‘패루를 지나가다’)와 에필로그(‘도로 눈을 감게’)까지 모두 소화한, 어린 독자를 위한 판본으로는 처음 나온 완역판이다. 세부도 꼼꼼하게 다듬었다. 청 황제의 통치술과 요술을 견준 박지원의 진술, 화담 서경덕과 시각 장애인의 일화, 양귀비?조비연?호광?풍도를 등장시킨 박지원과 조광련의 세태 풍자는 요술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읽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독자는 저마다의 눈높이에 따라 화려한 볼거리를 즐기거나, 환상 세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양반전」 앞뒤 없이 고을 곡식이나 빌려다 먹더니만 끝내 이 꼴이오! 글 따위 고을 곡식 갚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구려! 에잇, 양반! 한 푼어치도 안 되는 양반! [p. 16] 박지원이 한참 젊었을 때 쓴 아홉 편의 작품 곧 ‘구전(九傳)’에 드는 글이다. 박지원은 선비로서 지닌 이상이 세상과 맞지 않아 방황하다가 결국 벼슬을 포기했고 더욱 글쓰기에 힘쓰게 된다. 이때 나온 ‘구전’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인물’로 포착한 작품이다. 「양반전」은 특히 당시 양반 계급의 사회 모순을 풍자와 해학으로 그리고 있다. 양반 증서에 따르면 양반은 어떤 짓을 해도 좋다. 그러면 왜 정선 양반은 양반의 힘으로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고, 겨우 양반을 팔아먹자고 나섰을까. 알 듯 모를 듯 착잡한 상황이 한 시대 모순의 안팎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작품의 세부를 온전히 살린 판본은 드물다. 샘깊은오늘고전은 ‘웅남행雄南行’[음직으로 나간 높은 벼슬자리] 같은 까다로운 조선식 한문 어휘나, 『사기史記』의 열전을 응용한 수사 한 자락도 함부로 놓치지 않고 아래서 보듯 쉽고 친절하게 풀어냈다. “조상 덕에 하는 벼슬자리라도 큰 고을의 수령이 되면 일산(햇빛을 막는 가리개) 아래서 바람을 맞으며 해를 가린 덕분에 볕에 타지 않아 귀가 하얗게 되고 설렁줄(초인종을 울리는 줄)만 당기면 일꾼을 부릴 수 있어 뱃가죽이 절로 불룩하니 살이 찐다. 집안에는 아리따운 기생을 두고 뜰아래에는 학을 먹이는 곡식이 흩어져 있다”(p. 25). 「범이 꾸짖다」(호질虎叱) 모양은 대추씨 같은데 길이는 한 치도 채 되지 않는다. 거기다 오징어 먹물을 묻혀 가로세로 마구 찌를 때 보면 굽은 것은 창 같고, 날이 선 것은 칼 같고, 갈라진 것은 나뭇가지 창 같고, 곧은 것은 화살 같고, 팽팽한 것은 활 같더라.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곧 글이렷다! 붓이라는 무기를 한번 휘두르면 뭇 귀신이 밤새 울음을 운다. 잔인하게 서로 잡아먹는 짓을 하기로 네놈들보다 더한 게 어디 있겠느냐! [p. 46]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한 편인 「관내정사關內程史」 안에 실려 있다. 주요 인물인 선비 북곽 선생도 가짜 선비고, 열녀 동리자도 가짜 열녀(아들 다섯이 다 각성바지)다. 그런데 임금을 비롯한 온 세상은 덕이 높다고, 또는 믿음직하다고 이들을 떠받들고 있다. 겨우 한 꺼풀을 뒤집어쓰고 있는 가짜에게 온 세상에 놀아나는 모습이나, 망신을 당하고도 거드름이 남아 있는 가짜의 태도는 오늘날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샘깊은오늘고전은 다른 판본이 함부로 생략한, 범이 북곽 선생을 꾸짖는 장면 전체를 새로이 다듬고 풀어 어린 독자도 박지원 원작을 온전히 다 맛볼 수 있도록 했다. 이를테면 범이 북곽 선생을 꾸짖는 장면은 가짜 선비 개인에 대한 비판이 역사-문명-생태로 확산하는 짜임으로 되어 있다. 위에 나온 문자-엘리트 언어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다음과 같은 비판 장면을 함께 읽어낼 때에만 이 작품이 지닌 수사와 속뜻이 독자에게 제대로 살아날 수 있다. “말과 소가 태워 주고 일해 주며 주인한테 온갖 충성을 다 바쳤는데도 그걸 저버린 채 날마다 푸줏간을 꽉 채우자고 몰아다가 죽여서 뿔 하나 갈기 한 가닥 남기지 않더구나. 그것도 부족해서 걸핏하면 노루와 사슴까지 잡아가 산에서 우리 먹을거리가 떨어지게 하지 않느냐. 이러니 우리가 산에서도 굶고 들에서도 배를 못 채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이 일을 맡겨 올바르게 처리해달라고 하자. 이제 우리가 네 놈들을 잡아먹어도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를”(p. 43). 「요술 구경」(환희기幻戱記) “당신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말똥을 가지고 사람들을 놀린다는 말을 들었다!” 요술쟁이는 웃기만 할 뿐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투어 사과를 사 먹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 하나가 그제야 사과를 사 먹겠다고 했다. 요술쟁이는 객쩍은 소리를 한참 늘어놓다가 사과 한 알을 집어 건네주었다. 우리 일행이 한 입 베어 물더니 이내 곧 뱉어 냈다. 입안에 말똥이 가득 찼던 것이다. 구경꾼 모두 한바탕 웃었다. [pp. 73~74] 청 고종의 생일을 맞아 생일잔치에 한번 뽑혀 나가려는 별별 광대와 잽이패가 황제의 여름 피서지인 열하 근처에 다 모여들어 서로의 재주를 뽐내게 된다. 덕분에 박지원은 당시 조선인 누구도 쉽게 보지 못할 요술 스무 가지를 보게 되었고 이를 프롤로그(‘패루를 지나가다’)와 에필로그(‘도로 눈을 감게’)가 붙은 한 편의 글 「요술 구경」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여기 나오는 18세기 요술은 오늘날의 마술?아크로바트?촌극?인형극(또는 그림자극) 들이 어울린 종합 공연으로 오늘날 마술 공연의 기술과 연출력을 압도하는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 장면마다 어린 독자를 빠져들게 하는 환상적인 볼거리가 가득하고 요술쟁이와 구경꾼 사이의 호흡도 살아 있어 극적인 문장의 좋은 예를 만날 수 있다. 이야기는 눈부신 볼거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곳곳에 깃든 다음과 같은 반어와 역설은 잠시 볼거리에 넋을 뺐던 독자에게는 한층 깊은 깨달음을 전한다. 이 대화 뒤에 이어지는 것이 유명한 화담 서경덕의 일화다. 40년을 눈감고 살아온 시각 장애인이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오히려 평소의 감각을 잃게 되자, 서경덕은 ‘도로 눈을 감으라’고 한다. “구경을 마치고 난 뒤 내가 느낌을 말했다.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고, 참됨과 거짓됨을 살피지 못한다면 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늘 요술쟁이에게 속고 마는 까닭은 눈으로 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리어 눈 부릅뜨고 보는 것이 탈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조광련이 말했다. ‘아무리 재주를 잘 부리는 요술쟁이라 해도 시각 장애인은 속일 수가 없을 테지요. 그렇다면 성한 눈이란 것이 과연 장애가 없는 눈일까요?’”(p. 92) 읽는 사람 저마다의 생각과 눈에 따라 각도와 면모를 달리하며 다가오는 것이 박지원의 글이다. 웃을 때는 일단 웃게 되고, 눈부신 붓끝이 그린 볼거리 앞에서는 그것만으로 즐겁고, 한순간 또 다른 느낌과 울림이 읽는 이의 가슴을 치기도 한다. 읽으며 흥미를 느낀 어린 독자는 나중에 책을 다시 펼칠 테고, 다시 읽을 때마다 무언가를 새로이 발견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난삽한 원문을 헤치고 박지원 작품을 새로이 다듬어 펴내는 보람이 여기에 있다. 샘깊은오늘고전 총서 기획 방향 어린이·청소년 고전에서 방향을 잘못 잡은 축약과 각색 문제는 심각하다. 원전과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무리하게 작품을 가위질하다 보면 줄거리·서사 구조·세부(디테일)·역사적 의의가 어우러진 고전의 참뜻이 바래기 일쑤다. 한편 작품의 속뜻을 살리지 못한 각색은 고전의 참맛을 훼손할 뿐이다. 요즘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면서 제대로 된 독본을 바라는 독자와 출판계의 요구가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 (주)알마의 샘깊은오늘고전은 독자와 출판계의 기대와 반성을 아울러 “누구나 쉬이 읽을 수 있는 독본reader”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때 보다 신중한 태도로 목록을 채우고자 한다. ‘옛이야기’가 곧 ‘고전’은 아니다. 옛것, 고물은 그것대로 제몫이 있겠지만 샘깊은오늘고전은 민담이나 전설이 아닌, 출처 분명한 완결된 작품을 목록에 담아 펴낼 예정이다. 이런 뜻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딱지본으로 나온 이후 지금까지 자주 각색된 한국어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야담’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샘깊은오늘고전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기준을 지켜 신중하게 목록을 정하고, 새로이 다듬는 수고에 값하는 원문 교감과 교열 과정을 거쳐 총서를 이어갈 계획이다. 1)어린 독자에게 이야기의 흥미, 문장의 재미를 일깨울 수 있는 언어적 자질을 갖춘 작품 2)서사적 또는 서정적 완결성이 뛰어나 한 편을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선사하는 작품 3)입체적인 인물상을 통해 사람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 작품 4)풍부한 역사상이 오늘의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작품 5)체제와 세부가 함께 살아 있는 작품 이미 나온 『주몽의 나라』(이규보 원작 서사시), 『일곱 가지 밤』(이옥 원작 단편 모음),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허난설헌 시 선집), 『허생 | 거지 광문이』(박지원 단편 모음)와 이 책에는 이런 기획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