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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머리말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 근대사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전문화·세분화에서 종합화·총체화로|역사의 현재화를 위하여|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역사 서술 시각의 문제|도식주의를 넘어서| 식민사관과 안티 식민사관을 넘어서|역사의 명암(明暗)을 보자 제1장 천주교 박해 01 동방의 조상 숭배는 우상숭배다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1789년 프랑스혁명|1791년 진산사건|문체반정 논쟁 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기해박해 주문모·강완숙의 활약|신유박해와 오가작통법|동정녀 신드롬과 도모지 사형|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가 식민지화 원인의 시작|부정부패와 1811년 홍경래의 난|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청도 방문|왕만 바뀌면 재개되는 천주교 박해 03 이양선의 출몰과 여항문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1854년 일본의 개항|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시계와 피아노|한양 중인계급의 여항문화|1860년 북경 함락에 대한 낙관주의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01 삼정문란으로 수탈당하는 백성 전정·군정·환정의 문란|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민란상사(民亂常事)의 시대 02 고종 즉위, 대원군 등장 세도정치가 만든 어린 임금들|비변사 개혁과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의 명암|사치 금지령과 호포법 03 동학 창시자 최제우 처형 1860년 4월 5일 동학 창시|동학의 극단적 정신주의|조선 정부의 동학 탄압|유생들의 조직적 동학배척운동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1 병인양요를 불러온 병인박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대원군의 결백 콤플렉스|여성 순교자가 더 많은 이유|조선에서 22년을 지낸 다블뤼의 변화 02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는 무장 해적선|영국인 선교사 토머스|박규수의 활약|김일성 증조가 셔먼호 격침을 지휘했나? 03 병인박해를 악화시킨 병인양요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50여 일|천주교도 8000여 명을 죽인 학살극|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돌아오지 않는 외규장각 도서 04 보부상의 정치조직화 군사력의 무능을 보완한 보부상|보부상의 정보 수집·전파 기능|지방장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만행|배외감정의 격화|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 1871년 이필제의 봉기|아시아에서 성조기를 최초로 게양한 전투|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박규수의 ‘예의지방’ 비판|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어재연의 수자기(帥字旗)를 돌려다오 제4장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0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 최익현의 탄핵소|최익현·이항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호포법과 사색당쟁의 영향|고종의 생각이 결정적 이유|한국의 권력 탐욕 문화|공조판서 평균 재임기간 52일 02 일본이 조작한 운양호 사건 1873년 일본의 정한론 번성 이유|한일 국교 교착의 책임|운양호 사건의 전말|조작을 밝힌 일본측 보고서 03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병자수호조약 페리함대의 일본판(日本版)|조선 사대부의 통상에 대한 경멸|최익현과 김인승|1876년은 근대의 시발점 04 수신사 파견과 개항 이후의 풍경 최초의 수신사 파견은 실패|일본인들의 사기적 통상|옥양목 열풍과 비누 05 1870년대의 생활문화 천연두와 종두법 실시|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신재효의 판소리|조선인은 착한 미개인?|양반의 백성 착취 제5장 개화파의 등장 01 박규수의 개화파 육성 개화사상의 3비조(鼻祖)|김옥균과 중화사상|박영효와 민영익 02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한국인 고고(孤高)의 사상가 최한기|최한기는 한국 과학의 아버지|최한기를 외면하는 식민지성 03 급진개화파·온건개화파·위정척사파 중인계급의 진취성|유홍기는 누구인가?|개화파의 만국공법 공부|개화파 대(對) 위정척사파|위정척사파의 중화주의·사대주의|위정척사파의 시대착오성|문명개화론 대(對) 동도서기론|2000년대의 위정척사파 논쟁 제6장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01 이동인, 고종을 만나다 이동인의 귀국|조선인을 매료시킨 성냥|국왕의 밀사가 된 이동인 0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일본의 국민적 영웅|"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일본의 문명화=서양화=반(反)유교|후쿠자와의 조선관 03 황준헌의 "조선책략" 파동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영남 유생들의 만인소|위정척사파·개화파의 언론전|이재선 반역 사건|2007년의 조선책략 논쟁 0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 위정척사파 몰래 떠난 시찰단|개화파와 후쿠자와의 만남|흥아회의 아시아주의 제7장 서양에 문을 연 조선 01 1882년 조미수호조약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조미수호조약의 평가|"한국, 그 은둔의 나라"|너무 늦은 건 아닌가?|조미수호조약과 한미 FTA 02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 신라의 통일을 가능케 한 축국?|1882년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2004년에 재현된 갑판축구 03 외국군의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 화적으로 전락한 농민|왜놈을 몽땅 죽여버리자|290년 만의 대사건|대원군의 재집권|대원군, 33일 만에 물러나다|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개화윤음|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분리|민비의 51일간 피신|보부상과 혜상공국|자장면과 임오일기|2006년 용산기지 논쟁 04 태극기의 국기 제정 어떻게 태극기가 선정되었나?|김원모·김영환의 발견|국내 국기 게양은 언제부터인가? 제8장 근대언론의 탄생 01 미국 공사 입국, 미국 보빙사 파견 조선은 단물 빠진 껌|1883년 동문학교 설립|민영익 등 보빙사 미국 파견|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유길준 02 유길준과 사회진화론 유길준과 모스의 만남|모스는 유길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사회진화론이란 무엇인가?|사회진화론과 자유주의 03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창간 원산학사의 설립|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기자?|"한성순보" 이식설 논쟁|"한성순보"와 사회진화론|"한성순보"의 상업제일주의|우정국 설립 04 "한성순보" 이전의 언론 조선의 왕성한 언론 활동|유생의 상소문화|만인소와 풍문탄핵|공론장 논쟁|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제9장 급진파와 온건파의 충돌 01 조영신조약과 조러수호조약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의 오판|조미조약이 아니라 조영신조약이 규범|청을 견제하기 위한 조러수호통상조약 02 미국 보빙사 단장 민영익의 귀국 민영익과 김옥균의 결별|민영익의 변화 이유|미국의 조선 박대 03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무디 부흥|소래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알렌의 입국 04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고종의 소극적 동의|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고종의 분노|혈기가 지혜를 앞선 청춘정권|청국의 개입, 일본의 변심|급진개화파의 전멸|"갑신일록" 위작설 논쟁 05 갑신정변 평가 논쟁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책임 윤리의 문제|급진개화파의 민심 오판|민중계층의 적극적 참여?|평가의 기준이 문제다 06 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생활 김옥균 이용가치의 소멸|후쿠자와의 탈아론|급진개화파 암살 시도|1886년 김옥균의 상소 |
康俊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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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책략"은 120여년 후인 2007년에까지 거론되곤 했다. 2007년 2·13 베이징 합의는 6자회담의 성과로 북핵과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동아일보> 논설실장 이재호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방아책(防俄策)이기도 했던 조선책략은 유생들의 반대로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됐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고, 미국이라도 동맹으로 확실하게 잡았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황준헌은 ‘모두 조선이 위태롭다고 하는데 조선은 절박한 재앙을 도리어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집안의 제비나 참새가 (불붙는 것도 모른 채) 즐겁게 노니는 것(연작처당·燕雀處堂)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6자회담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라면 설령 ‘평화’가 눈에 아른거려도 한 번쯤은 ‘연작처당’의 경구를 떠올려 주기 바란다.” 한겨레 선임기자 한승동은 “‘2·13 합의’ 이후 6자회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아시아 정세가 상상력을 자극한다”며 “2030년께면 미국과 버금가는 대국으로 성장할 중국이 만일 러시아와 손잡고 유럽연합마저 무조건 미국 편들기를 거부할 경우 미국은 어떻게 대처할까. 그야말로 ‘신냉전’이 도래한다면?”이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보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야말로 제2의 ‘조선책략’이며 북미 간의 최근 급반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을 끌어들이려면 북한을 ‘악의 축’ ‘깡패국가’로 계속 남겨놓고 악역을 맡겨온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을 버려야 한다. 대신 한반도에서 장차 중국의 자장이 너무 강력해지는 걸 막고 통일 한반도를 계속 속국으로 붙잡아두는 방법은 통일 한반도의 주력군이 될 한국을 FTA 체결로 미일 동맹 체제에 단단히 묶어두는 것이다. 그럴 법하지 않은가. 최근 미국 조야에서 네오콘들이 무더기로 쫓겨나고 있는 건 그들이 이런 전략 변화에 방해물이 됐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먹이를 가로채려는 탐욕스런 제국들의 이합집산 합종연횡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그렇다. 120여 년 전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조선책략의 시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익보다는 각 정파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행태도 과거 그대로다. 이해관계에 감정까지 연루되면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조선책략 사태’는 스스로 ‘책략’을 생산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역량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2007년의 ‘조선책략’ 논쟁 중에서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동기’와 ‘결과’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조소앙은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직후 당의 기원을 ‘갑신혁명’으로 설정하고 귀족분자 선각자인 김옥균 등 소장 벌열파(閥閱派, 성공한 문벌)가 ‘연일반청(聯日反淸)’을 기치로 내세운 궁극적인 목적은 해방을 자구하고 국가독립의 보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고 긍정 평가하였다. 그러한 동기 중심의 평가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근대화의 실패’, 갑신정변 주역들을 ‘한국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창시자’, 김옥균을 ‘우리나라 근대화운동의 용감한 선구자’로 보는 시각을 낳게 했다. 박정희와 김일성 모두 갑신정변과 그 주역들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이런 시각에 대해 박노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변 주모자들이 저지른 민가(民家) 방화와 그 사건으로 이해 청일 양국 군대가 충돌하여 무고한 백성 100여 명이 희생된 일은 잔혹행위로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정변의 행동대원으로서 민씨파 대신들의 피를 손에 직접 묻힌 서재필 같은 인물이 평생 자신들의 혁명 참여를 자랑할 뿐 자기 손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애도와 참회의 뜻을 한 번도 피력한 적이 없는 것은 근대화 지상주의자들이 사람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여겼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반면 한철호는 “갑신정변은 내부의 반발과 청국의 무력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단계에 부응해서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변혁운동사상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실제로 외압이 가중되는 조건 속에서 위로부터의 변혁의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박해져갔기 때문이다. ……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려던 다양한 시도는 향후 국권을 회복하고 민주국가를 형성하는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처럼 소중한 경험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복잡다단하고 역동적 중층적으로 전개된 근대의 역사를 균형 잡힌 객관적인 시각에서 올곧게 규명해내야 한다. 그 기준은 열강의 침략 아래 근대적 사회변혁이 요구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떠한 세력이 시대적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노력했는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갑신정변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결국 평가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의 평가 기준은 무엇인지, 평가에 앞서 각자 자신의 기준에 대한 검증을 스스로 시도해보는 게 어떨까?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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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판을 벌여 서양 도깨비를 몰아내자!
개화기는 새로운 외부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한 시대였다! 프랑스 군함에서 건져낸 물건은 거의 대포나 총이었다. 관리들과 마을사람들은 이것들을 재빨리 창고로 옮겨놓고 문을 굳게 잠근 다음에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창고 안에서 똑딱똑딱 하는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섬은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무기들 속에 시계가 들어 있었던 것을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다. 일주일이나 계속해서 똑딱 소리가 들려오자 마을사람들은 회의를 열었다. ‘서양 귀신이 우리 섬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도깨비를 떨어뜨려놓고 간 게 틀림없다!’ ‘당장 굿판을 벌여 서양 도깨비를 몰아내자!’ 뭍에서 불러온 용하다는 무당이 한바탕 굿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의 일치로 똑딱 소리가 뚝 그쳤다. 감겼던 시계의 태엽이 다 풀어져 소리가 멈추었던 것이다. 조선의 사치풍조 불편할수록 신분과 서열을 과시할 수 있는 해괴한 습속! 사치풍조는 신분과 서열을 과시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사치풍조를 막는다는 이유로 갓의 장식을 없애는 동시에 양태를 20센티미터 이내로 줄이고, 도포의 넓은 소매를 좁게 만들고, 담뱃대의 길이를 줄이게 하는 등의 새로운 규정을 만든 게 그 좋은 예다. 당시 양반들은 양태가 30센티미터도 넘는 넓은 갓을 쓰고 갓에 온갖 장식을 해달았으며, 소매가 펄럭일 정도로 넓은 도포를 입고 다녔다. 담뱃대 길이는 50센티미터가 넘었으니 손이 끝부분에 닿지 않아 종이 불을 붙여 주지 않으면 담배를 피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들이를 하면 담배함과 담뱃대를 든 종이 뒤따라야만 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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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역사
한국언론사 ·한국문학사 ·한국철학사 등 각 분야의 역사는 그 분야에 관계된 역사에 대해서만, 즉 언론 ·문학 ·철학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각 분야와 관계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줄기와, 각 분야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간 나온 책들은 너무 간결하게 압축돼 있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룬 전문서들 뿐이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 ·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여 어떤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특징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마인드 세트>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면서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첫 번째 특징 역시 바로 이러한 ‘종합’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의 현재화’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개화기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이전은 너무 멀고 개화기 이후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절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전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는 점이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주로 개화기 사건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논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 쓰는 새로운 기술방식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책과 논문은 물론 신문기사 ·칼럼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언론 ·문화 ·커뮤니케이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E. H.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그 상호작용 ·대화의 성격과 질이 문제의 핵심이고 ‘대화’보다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때에 인간이 역사에 끌려 다니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과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구조와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 네 번째 특징은 이른바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메타 역사’란 ‘역사에 관한 역사’다. 개화기 시절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수많은 주장과 이견들이 난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명쾌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교과서’는 늘 위험하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종합’에 의미를 둔 이 책은 다양한 주장들을 다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역사는 단순명쾌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하다. 과거의 복잡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복잡성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현재라는 변수가 더해져 현재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복잡성은 한 차원 높은 재미를 재공한다. 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감상하다 보면 “아, 똑같은 사안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해와 체험은 “역사는 외우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역사 서술의 다양한 시각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면서 도식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보수 ·진보 시각이 충돌을 빚으면 둘 다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했으며 개화기 역사에서 잘 나타나곤 하는 민족사적인 서술 시각도 공정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을 거닐며 독자가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 특정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우리의 저력이 무섭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하는 게 옳은 일이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 개화기 역사는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는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가 본격 출몰한 건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였다. 개화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30~40년간을 개화기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개화기가 시작되었다는 건 그들을 무조건 막아내 싸우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으며 그 만큼 대처 방안을 놓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혼란과 갈등은 크게 보아 ‘개화론’과 ‘수구론’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지식인 ·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 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