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 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제1장 다시 타오른 애국계몽운동의 불길 01 교육만이 살 길이다 학회의 국민 계몽활동 | 안창호의 신민회 활동 |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 | 기독교 사립학교 붐 | 관·공립학교는 비난의 대상 |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 | 일본 유학생의 활동 |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 02 스티븐스 저격사건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 의병투쟁에 미친 영향 | 이승만의 학업 03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활약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죠신문" 창간 | 이범진의 후원과 안중근의 기고 |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국내 유입 | "신한민보"의 ‘국민혁명론’ 제2장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유산 01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이완용·송병준·이용구의 친일 계보 | 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 | 국채보상운동의 내부 문제 | 베델의 사망 | "대한매일신보"의 몰락 |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신문? | 윤치호의 국채보상운동·베델 비판 | 국채보상금 처리 문제 02 국채보상운동의 유산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운동의 효시’ | 1998년 되살아난 국채보상운동 | 243만 명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 |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 03 최초의 근대 잡지 "소년"의 창간 육당 최남선의 활동 | 최초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 | 톨슨토이 열풍 제3장 한말 의병운동의 종언 01 순종의 경상·평안·황해도 답사 일제의 보호권 과시 이벤트 | 철저히 연출된 시각적 스펙터클 | 일제의 법죄즉결령 | 대한제국 당시 최대의 부패 관리 02.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의 역사적 기원 | 재(在)만주 조선인 20만 명 | 일제강점 후 새로운 갈등 | 신채호·대종교·이범윤의 활동 | 동북공정과 ‘간도 되찾기 캠페인’ 03. 호남의병의 와해 1907~1911년 의병 14만 명 | 헌병대·헌병보조원의 악명 |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 의병운동인가, 의병전쟁인가? | 오영섭의 민중주의사관 비판 | 의병정신은 ‘충군애국론에 기반한 의리심’? | 김상기·구완회의 반론 04 "대한민보" "경남일보"의 창간 대한협회의 "대한민보" 창간 |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 | 최초의 지방지 "경남일보" 창간 | 장지연의 활동 | "한성신보" "대동일보" "대한일일신문" 제4장 사회진화론·영웅숭배주의·문약망국론 01 사회진화론의 융성 양계초의 "신민설" 수입 | 양계초의 주장 | 조선 지식인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 | "월남망국사" 논쟁 | 박노자·허동현 논쟁 | 사회진화론 개념의 혼동 02 영웅숭배주의의 유행 신채호의 영웅숭배주의 | 영웅 전기의 유행 |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03 문약망국론과 운동회 붐 문약망국론과 상무정신 | 상무정신과 학교 운동회 | 군사훈련식 운동회와 석전 제5장 애국과 매국의 몸부림 01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 추모 열기 | 안태훈과 안중근 | 안중근과 조마리아 | 안중근 연구의 현황 | 의거 100주년 기념 준비 | 안중근은 ‘충직한 근왕주의자’? | 안중근과 아시아주의 02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매국’ 경쟁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 성명 | 이완용과 송병준의 차이 | 일진회 비난·지지 성명전 | 일진회·서북학회·대한협회 ‘3파 제휴’ 결렬 | 일진회는 오명의 대명사 03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 이완용의 파란만장한 ‘변역’ | 이완용 중상, 이재명 사형 | 김구의 후회 | 박원문의 죽음에 대하여 | 이완용에 대한 민심의 분노 제6장 망국 직전의 생활문화 01 영화의 폭발적 인기 영화는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가? |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 |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영화 | 오락 이외에 무엇으로 삶을 위로하랴 02 연극의 인기와 풍기 논란 광무대·단성사의 개관 | 원각사와 이인직 | 신문의 전통연극 비판 |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 | 유성기의 판매와 보급 | 일제의 통제와 탄압 03 개신교의 백만인 구령운동 1884~1910년 개신교 선교사 499명 | 선교 지역의 교파별 점거 |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 일제의 탄압엔 정교분리주의 | 20만 신자를 100만 신자로 | 백만인 구령운동의 정치학 | 한국은 세계 2위의 선교대국 | 한국인의 ‘중층다원성’ |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 04 철도·시계가 불러온 시간개념의 변화 1898년에서야 만들어진 관료들의 시간표 | 신문들의 시간엄수 계몽 |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시계의 상징적 가치 | 도량형의 표준화 제7장 518년 만에 멸망한 조선 01 일제의 강점 안창호의 〈거국가〉 | 강제병합안 8개항 | 경술 7적과 연쇄 자결 | 왜 8월 29일은 조용했나? | 이광수의 고백 | 모든 국민이 일심동체였을까? | 일제강점 호칭 논쟁 | 일제하 68명의 조선 귀족 탄생 | 일제에 기용된 조선인 관료 02 토사구팽 당한 이용구와 일진회 헌신짝처럼 버려진 이용구와 일진회 | 이용구의 후회 | 이용구와 송병준·이완용의 다른 길 | 흑룡회가 일진회를 속였나? 03 신문과 민족주의의 탄생 한글 글자 공동체의 형성 | 민족의식의 계보 | 민족과 조국 | 민족과 국민 | 신용하·박지향·이진경의 주장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광고 분석 | 소통의 빈곤 04 고종·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 | 수십여 명의 학자가 참가한 ‘기념비적 논쟁’ | 허동현의 종합 관전편 | ‘편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론의 함정은 없는가? | 내부적 검증·추궁은 충분했는가? |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을 넘어서 맺는말: ‘조선왕조 500년 신화’를 넘어서 ‘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운동 | 한국은 일류의 자질과 능력이 있다 | 임진왜란의 진실 |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진실 | 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 병자호란의 치욕 |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 임진왜란·병자호라과 체제 안정성 | 당쟁·사화가 조선왕조 존속에 기여했다? | 유교·양반 망국론 | 혈통주의의 폐쇄성 | 유교적 가족주의가 500년의 비결인가? | 공식적 가족·자궁 가족의 2중 구조 |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역설 | 입신양명 이데올로기 | 기회주의와 줄서기 | ‘당쟁 망국론’에 대한 반박 | 일제 치하·군사독재의 상흔과 싸우기 | 양반 면책으로 빠진 식민사관 비판 | 한국의 무기력과 침묵 |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 한국 정치의 5대 환경 | 당파싸움의 두 얼굴 | 지금도 건재한 양반문화 | 가문 단위의 부정부패 | 2006년 종친회 가입률 22퍼센트 | 한국인의 보호막 투쟁 | ‘보호막 공영화’를 위하여 | ‘면허받은 흡혈귀’를 넘어서 | 성리학의 가족 중심주의를 넘어서 |
康俊晩
강준만의 다른 상품
|
1997년 논문 「고종황제의 암약설(暗弱說) 비판」을 통해 ‘고종 다시 보기’를 시도했던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이 2000년 8월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모은 단행본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출간해 학술계의 화제가 되었다. 이태진은 그동안 통설로 굳어져 내려온 ‘고종=유약한 군주’라는 등식을 전면 부정하며 고종을 동도서기론의 개화를 추구한 개명군주(開明君主)로 평가했다.
이태진은 ‘고종시대를 재조명한 이유’에 대해 “이 책을 통해 고종시대를 파악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하고 싶었다. 양요와 쇄국·개항·갑신정변·아관파천 등 일본 침략주의의 시혜론적 관점에서 서술된 근대사의 흐름은 국민 사이에 패배주의적 역사인식을 조장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반성 차원을 넘어 자기비하나 자괴감만 심화될 뿐 긍정적 역사 창출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2003년 박노자는 “요즘 일각의 보수적인 사학자들이 고종을 ‘계몽군주’ 쯤으로 높여주고 …… 예술인들이 명성황후를 뮤지컬의 주인공이자 민족저항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고종의 집권기는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라고 주장했다. 박노자의 이런 반박이 시사하듯이 이태진의 주장을 둘러싼 논란은 2004년 7월부터 연말까지 "교수신문"을 중심으로 ‘고종 논쟁’ 또는 ‘대한제국 논쟁’으로 이어졌다. "한겨레"는 “"교수신문"에 글을 실은 학자만 11명이다. 학계 원로급 인사로부터 소장학자에 이르기까지 역사학·경제학·정치학 전공자들이 모두 망라됐다. "역사비평" "내일을 여는 역사" 등 여러 학술 계간지에 관련 논쟁이 번졌고 크고 작은 학술대회에서도 이 문제를 다뤘다. 이런저런 자리와 지면을 통해 이 ‘대회전(大會戰)’에 뛰어든 학자는 수십여 명에 이른다”며 “21세기 한국 학계의 서장을 장식한 기념비적 논쟁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논쟁은 2005년까지 지속되었다. 서울대 교수 이영훈(경제학), 전남대 교수 김재호(경제학) 등은 “대한제국은 외부의 충격을 맞아 조선의 전통문명이 대응한 양상 이상의 것이 아니다”(이영훈)라고 평가하면서 “고종의 민국정치 이념은 근대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김재호)고 지적했다. 반면 이태진은 대한제국은 (고종의) 무능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고종 등이 추진한) 근대화 사업의 빠른 성과에 대한 침략주의 일본의 조기 박멸책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논쟁은 상명대 교수 주진오(국사학)와 강원대 교수 이병천 등이 ‘근대와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더 복잡한 양상으로 번졌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근대화만 이룩됐다면 그 권력의 주체가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논리에 빠져 있다”(주진오)는 비판에 이어 “단선적 진화론이나 폐쇄적 쇄국주의를 넘어 자신의 주체성을 새롭게 되물으면서 ‘주체적 세계화’를 지향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재구축이 필요하다”(이병천)는 제안까지 나왔다.---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중에서 이완용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의 칼을 겨눈 사람들도 많았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자극이 되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채 두 달이 못된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 암살 시도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 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 내 추도식에 참석한 뒤 11시 30분경 저동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 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를 내리 찔렀고,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그를 타고 앉아 오른쪽 허리를 찔렀다. 이를 지켜보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린 뒤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 부분을 찔렀다. 이완용을 죽였다고 생각한 청년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청년은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대한의원에서 50여 일 동안의 치료 끝에 이듬해 2월 14일 퇴원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 한국 정부 고관, 심지어 한국 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재명은 1910년 4월에 사형 판결을 받고 그해 9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자 재판관을 향하여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하는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루지 못한 한(恨)을 기어이 설욕신장하고 말리라”하고 일갈했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이재명에게 왼쪽 폐를 찔려 사망했다. 박노자는 “이완용에 대한 이재명의 공격이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매국노를 인력거에 태워준 죄(?) 이외에 별다른 죄를 저지른 일이 없던 박원문이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정의인가? 일제는 일제대로 박원문의 죽음을 이용해 이완용의 암살미수건만으로 사형을 받을 수 없던 이재명에게 ‘박원문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에 처했다”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재명이 공판에서 박원문을 죽인 것이 ‘우연’이었음을 강조하고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무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목숨을 잃는 것은 당시에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별다른 고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우리는 ‘이재명 의거’에 대한 기억에서 박원문의 죽음을 꼭 빠뜨려야만 하는가?”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와 박원문의 죽음 중에서 |
|
건국 518년 만의 조선 멸망이 알려진 1910년 8월 29일
그 참담한 날, 조선 사람 모두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까? 새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이완용은 병합 음모를 꾸몄다. 이는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병합’의 결과로 나타났다.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후 518년 만의 멸망이었다. 일제는 병합을 축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경복궁에는 일장기가 걸리고 등불행렬이 시가를 누볐다. 반면 한국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모든 한국인들이 비통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종로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사를 하고 먹고 마시는 ‘일상’을 잃지 않았다. 실제로 그날은 조용했으며, 반대시위도 전혀 없었다. 일제에 모든 실권이 넘어간 상황이라 체념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병합 전부터 일제의 철저한 단속으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런 이유뿐일까? 민중들에게는 단지 착취의 주체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점심 먹고 오후에 만나자는 식으로 약속하던 조선 사람들 철도가 놓이고 시계가 등장하면서 근대적 시공간으로 들어왔다 기차역에는 어김없이 시계탑이 들어섰고,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어김없이 출발했다. 각 지역의 시간은 기차 시간을 중심으로 통일됐다. 이런 철도 운행은 시간개념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승객이 비록 양반이라고 해도 기차는 기다려주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출발했다. 이런 기차는 조선 사람들에게 근대적이며 기계적인 시간을 교육시키는 훌륭한 교육자의 역할을 했다. 점심 먹고 오후에 만나자는 느슨한 시간 감각으로는 기차에 오를 수 없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철도와 시간개념에 관한 재담은 흥미롭다. 시골 양반이 화륜차를 타러 가니 차는 반시간이나 있어야 떠난다고 했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증을 내자,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타고 다른 정거장에 가면 곧 떠날 수 있다 하고서 한참 다니다가 그곳으로 다시 데려다놓으니, 그 양반이 인력거 삯이 헛돈이 아니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
|
생각하는 역사
한국언론사 ·한국문학사 ·한국철학사 등 각 분야의 역사는 그 분야에 관계된 역사에 대해서만, 즉 언론 ·문학 ·철학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각 분야와 관계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줄기와, 각 분야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간 나온 책들은 너무 간결하게 압축돼 있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룬 전문서들 뿐이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 ·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여 어떤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특징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마인드 세트>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면서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첫 번째 특징 역시 바로 이러한 ‘종합’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의 현재화’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개화기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이전은 너무 멀고 개화기 이후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절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전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는 점이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주로 개화기 사건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논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 쓰는 새로운 기술방식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책과 논문은 물론 신문기사 ·칼럼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언론 ·문화 ·커뮤니케이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E. H.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그 상호작용 ·대화의 성격과 질이 문제의 핵심이고 ‘대화’보다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때에 인간이 역사에 끌려 다니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과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구조와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 네 번째 특징은 이른바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메타 역사’란 ‘역사에 관한 역사’다. 개화기 시절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수많은 주장과 이견들이 난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명쾌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교과서’는 늘 위험하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종합’에 의미를 둔 이 책은 다양한 주장들을 다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역사는 단순명쾌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하다. 과거의 복잡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복잡성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현재라는 변수가 더해져 현재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복잡성은 한 차원 높은 재미를 재공한다. 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감상하다 보면 “아, 똑같은 사안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해와 체험은 “역사는 외우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역사 서술의 다양한 시각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면서 도식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보수 ·진보 시각이 충돌을 빚으면 둘 다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했으며 개화기 역사에서 잘 나타나곤 하는 민족사적인 서술 시각도 공정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을 거닐며 독자가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 특정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우리의 저력이 무섭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하는 게 옳은 일이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 개화기 역사는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는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가 본격 출몰한 건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였다. 개화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30~40년간을 개화기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개화기가 시작되었다는 건 그들을 무조건 막아내 싸우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으며 그 만큼 대처 방안을 놓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혼란과 갈등은 크게 보아 ‘개화론’과 ‘수구론’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지식인 ·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 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