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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사 산책 2 -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제1장 갑신정변의 유산 01 알렌의 민영익 치료, "한성순보"의 폐간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한성순보"의 폐간|"한성순보"와 청국의 갈등|광인사의 출판활동|사진의 수용과 부작용 02 한성조약과 톈진조약 한성조약과 온건개화파의 득세|김윤식의 시무론|톈진조약의 두 얼굴 03 쌀의 품귀, 담배의 확산 1884년 방곡령 실시|연초제조소·판매소의 집중 설립|담뱃대 사용 금지령|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 제2장 개신교의 활약, 거문도 사건 01 언더우드·아펜젤러의 입국 1885년 4월 5일 부활절|언더우드와 알렌|정동제일교회의 창립|성경 번역과 찬송가 전파 02 제중원 설립과 선교사들의 갈등 백성을 구제하는 제중원|선교사들의 사치 이유|선교사들의 내부 갈등|음주·흡연을 죄악시한 청교도주의 03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청·러시아·영국의 각축전|후쿠자와의 악담|대원군의 귀국|조선 왕을 감독하는 총독이 된 원세개|웨베르와 손탁의 입국|거문도 사건의 역사적 의의|거문도 사건의 세 가지 일화 04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 유길준의 귀국|유길준과 김옥균의 만남|유길준과 부들러의 중립화안|햇빛을 보지 못한 중립화론 제3장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01 전신 개통, "한성주보" 창간 경인 전신업무 개시|"한성주보"의 창간|한국 최초의 신문광고 02 배재학당·이화학당 개교 육영공원의 설립|배재학당의 설립|이화학당의 설립|기독교가 선도한 출판문화|천주교·개신교의 갈등 03 경복궁 건청궁을 밝힌 전기 건청궁을 밝힌 100촉짜리 전구 두 개|물불·묘화·덜덜불·건달불|"전기 100년사"의 재발견 04 주미한국공관 설립 원세개의 방해공작|알렌의 일기에 나타난 박정양 일행의 모습|박정양·이하영·이완용|데니의 "청한론" 제4장 근대화에 대한 공포와 저항 01 외국인이 조선 아동을 잡아먹는다 종두술을 보급한 지석영의 수난|1888년 영아 소동|제중원이 영아 살해의 총본산? 02 박문국 폐지, "한성주보" 폐간 재정난으로 인한 "한성주보" 폐간|1994년 "한성주보" 제16호 발견|서양 미술의 전파 03 1880년대 후반의 민생고 양반계급의 부정부패|일그러진 입신양명 문화|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약탈|민족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로 04 원세개의 횡포, 알렌의 도전 조선 상인의 철시동맹파업과 시위투쟁|원세개의 라이벌은 알렌|왜 원세개만 가마를 타고 입궐하는가? 제5장 동학농민전쟁 01 동학교도의 보은·원평 집회 농민항쟁의 폭발, 동학의 확산|동학의 교조신원운동|동학의 보은·금구·밀양 집회|보은 집회에 대한 평가|북접·남접의 갈등 02 동학농민군의 정읍 고부 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고부 봉기를 키운 이용태|왜 하필 호남인가? 03 김옥균 암살 사건 김옥균 암살 시도|김옥균, 중국 상하이로 가다|홍종우의 총탄 세 발에 쓰러진 김옥균|김옥균의 무덤은 세 개|김옥균 부인 유씨의 한(恨) 04 김옥균·홍종우 평가 논쟁 일본은 김옥균 암살계획을 몰랐는가?|홍종우, 출세를 위한 변신이었나?|조재곤의 홍종우를 위한 변호|일본의 김옥균 이용|북한의 김옥균 평가|신복룡의 평가|하영선·허동현의 평가 05 동학농민군의 고창 무장 기포 고창 무장 기포|부안 백산 대회|황토현 전투|5·16은 이념 면에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김대중의 참여 때문에 빚어진 사건 06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논쟁 고부 기포설 대 무장 기포설|무장 기포에 대한 정읍의 반발|정읍·고창 관계자들의 논쟁|무장 기포 기념일 행사|백산 봉기 기념일 행사|정읍시의회의 성명서 채택 07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 농민군의 함평 점령, 대원군 감국 통보|청군·일본군의 출병|전봉준·김학진의 상충되는 고민|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농민군의 집강소 통치|손화중의 무리가 최강|남조선 개벽을 꿈꾼 김개남|동학농민군 전주 입성 113주년 기념행사 제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0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일본 낭인들의 입국|천우협과 전봉준의 만남|조선 병사의 피로 물든 경복궁|대원군의 재등장 02 조선의 재앙이 된 청일전쟁 풍도 앞바다에 수장된 청 병사 1000명|러일전쟁을 위한 전초전?|조선 민중의 공포와 고통|일본의 평양 전투 승리|청일전쟁의 기본 구도는 아직 살아 있다 03 자율과 타율 사이에 선 갑오개혁 갑오개혁 자율론과 타율론|사회신분제 폐지|400년 묵은 과부 재가 논쟁|유길준과 김홍집|일제의 꼭두각시를 거부한 대원군|박영효·서광범의 귀국|이노우에 가오루의 등장, 대원군의 퇴진|과거제도 폐지의 충격|이승만의 인생이 뒤바뀌다|너무 늦은 신교육으로의 전환 04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 전라감사 김학진의 제안|전봉준·김학진의 의기투합|삼례 재봉기|왜 7월에 봉기하지 않았나?|일본군의 다롄·뤼순 점령 05 공주 우금치 전투의 비극 남·북접간의 노선 차이|7일간의 우금치 혈투|동학군의 계급적 고립|전봉준의 체포·압송|김개남의 체포·효시|학살당한 농민군은 최소 20만 명|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06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수립 박영효 내무대신, 서광범 법무대신|민비와 박영효의 일시적 화해|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의 한계 제7장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01 홍범 14조 제정 반포 홍범 14조의 내용|매우 불길한 행사?|고종의 눈물겨운 노심초사|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 02 망명 유학 10년 만에 귀국한 윤치호 조선 기독교 대표자의 탄생|윤치호의 유교 비판|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03 일본 "한성신보"의 창간 조선 신문이 없는 7년 8개월간의 공백|"한성신보"의 침투전략|최초의 신소설도 "한성신보"에? 04 전봉준·손화중 처형 민중의 영웅으로 각인된 전봉준|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이준용 모반 사건|3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콜레라 05 동학농민혁명 논쟁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유영익의 주장|박노자·하원호의 논쟁|허동현의 주장|배항섭의 주장|김용옥의 주장|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전봉준은 동학교도였나? 제8장 3국 간섭·을미사변·단발령 01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 간섭 시모노세키조약|일본의 랴오둥반도 반환|정동파의 대두|박영효의 재망명|여우사냥을 위해 입국한 미우라 고로 02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일본 낭인들의 천인공노할 범죄|대원군의 처신|제3차 김홍집내각과 을미의병|유길준의 역할|민비 시신 능욕설|뮤지컬 "명성황후" 논쟁|명성황후 우상화?|시해범 후손들의 사죄 방문|명성황후 사진 논쟁 03 실패로 끝난 춘생문 사건 민비 시해 6일 만에 떨어진 황후 간택령|공포로 잠을 못 이룬 고종|미국공사관으로의 피신 기도|춘생문 사건은 일본의 음모? 04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의 귀국 11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서광범의 활동|유길준의 지원|일본의 방해 공작|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 05 태양력 도입·변복령·단발령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1990년대까지 지속된 과세 논쟁|변복령에 대한 저항|강압적인 단발령 시행|최익현과 보형(保形)의병|피차 양보할 수 없는 상징 투쟁|이승만과 김구|단발령 특수|조선은 모자의 나라 06 운산금광 채굴권 양여 외국어학교의 설립|알렌이 따낸 운산금광 채굴권|노다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고종의 미국 짝사랑이 잉태한 결과 07 전신과 우편의 발달 1891년 북로전선 개설|민중의 전신 시설 파괴|1895년 우편업무 재개 |
康俊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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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광부들에게 ‘노다지’가 아니라 ‘노 터치’였다!
조선에게 서구 열강은 은자였나? 약탈자였나? 쿵, 무거운 곡괭이가 검은 흙벽을 크게 찍어내자 돌연 반짝반짝 노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노 터치! 노 터치!’ 즉각 미국인 채굴 감독의 고함이 광구 속을 쩡쩡 울렸다. 조선인 광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금맥이 나왔구나. 땅속에서 금맥이 드러날 때마다 미국인들이 지르는 소리는 똑같았다. 노 터치(No touch, 손대지 마라)! 혹여 금을 훔칠까 봐 소리치는 것인데 조선인 광부들의 귀에는 ‘노다지’로 들렸다. 그들은 ‘노다지’는 ‘금’을 가리키는 양인들 말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자신들도 금맥을 발견하면 즉각 소리쳐서 금이 나왔음을 알렸다. ‘노다지! 노다지!’ 평안북도 운산금광의 조선인 광부들에게 황금은 곧 노 터치였다. 목숨 걸고 머리카락을 지키려 한 조선의 민중! 모자의 나라 조선, 쿠데타보다 중요한 모자! 단발령은 상징투쟁이었다. 단발령에 저항했던 민중은 머리카락에 큰 의미를 부여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과연 머리카락을 그렇게 아껴 목숨을 걸었을까. 전통과 자긍심의 고수, 폭력과 위압과 침략을 거부하는 정신을 머리카락이라는 단어로 표상하여 그들은 삶 전부를 걸고 투쟁했던 것이다. 단발령 시대에 머리카락은 전통과 개화가 충돌하는 지점, 통제와 자율의 충돌 지점이었고 억압과 저항이 동시에 표출되는 마당이자 상징이었다. 조선인의 모자에 대한 집념은 존두(尊頭)사상 때문인데 이는 양반문화와 접목돼 관모(官帽)숭배로 나타났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 밤 김옥균은 고종을 만나러 왕궁에 들어가다가 무감(武監)에 의해 제지당했다. 왜 그랬을까? 황제를 지키는 근위(近衛)의 사명감에서가 아니라 평복무관(平服無冠)으로는 입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옥균이 일갈하자 겁을 집어먹은 이 무감은 착관(着冠)의 예장만이라도 갖춰달라고 애걸했다. 이 무장에게는 관(冠)이 쿠데타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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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역사
한국언론사 ·한국문학사 ·한국철학사 등 각 분야의 역사는 그 분야에 관계된 역사에 대해서만, 즉 언론 ·문학 ·철학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각 분야와 관계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줄기와, 각 분야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간 나온 책들은 너무 간결하게 압축돼 있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룬 전문서들 뿐이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 ·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여 어떤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특징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마인드 세트>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면서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첫 번째 특징 역시 바로 이러한 ‘종합’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의 현재화’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개화기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이전은 너무 멀고 개화기 이후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절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전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는 점이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주로 개화기 사건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논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 쓰는 새로운 기술방식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책과 논문은 물론 신문기사 ·칼럼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언론 ·문화 ·커뮤니케이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E. H.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그 상호작용 ·대화의 성격과 질이 문제의 핵심이고 ‘대화’보다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때에 인간이 역사에 끌려 다니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과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구조와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 네 번째 특징은 이른바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메타 역사’란 ‘역사에 관한 역사’다. 개화기 시절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수많은 주장과 이견들이 난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명쾌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교과서’는 늘 위험하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종합’에 의미를 둔 이 책은 다양한 주장들을 다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역사는 단순명쾌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하다. 과거의 복잡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복잡성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현재라는 변수가 더해져 현재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복잡성은 한 차원 높은 재미를 재공한다. 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감상하다 보면 “아, 똑같은 사안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해와 체험은 “역사는 외우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역사 서술의 다양한 시각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면서 도식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보수 ·진보 시각이 충돌을 빚으면 둘 다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했으며 개화기 역사에서 잘 나타나곤 하는 민족사적인 서술 시각도 공정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을 거닐며 독자가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 특정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우리의 저력이 무섭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하는 게 옳은 일이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 개화기 역사는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는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가 본격 출몰한 건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였다. 개화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30~40년간을 개화기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개화기가 시작되었다는 건 그들을 무조건 막아내 싸우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으며 그 만큼 대처 방안을 놓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혼란과 갈등은 크게 보아 ‘개화론’과 ‘수구론’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지식인 ·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 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