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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 위반의 에로티시즘
1. 신을 위한 타락ㆍ중세 더러움에 몸을 바치다 고름을 먹는 성녀 채찍의 이중성 질 드 레, 잔 다르크의 전사에서 아동 살인마로 2. 에로티시즘의 창시자 사드ㆍ18세기 어머니의 항문을 꿰매다 살인적인 150가지 열정 글로 쓰인 똥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도착의 탄생 3. 정신분석, 야만을 분석하다ㆍ계몽주의 기괴한 성과학 자위행위가 역사에 미친 영향 보바리 부인은 무죄, 레미제라블은 유죄 범죄 위생학의 등장 4. 아우슈비츠의 고백ㆍ20세기 아이히만이 차라리 괴물이었다면 나치는 사드가 될 수 없다 학살자의 시선으로 본 홀로코스트 인간은 인간에게 쥐다 5. 도착이 지배하는 사회ㆍ현대 도착을 없애겠다는 착각 고양이 발톱 빼기 영혼의 살인 도착의 창조적 승화를 꿈꾸며 옮긴이의 말_ 인간다움의 재검토 |
Elisabeth Roudin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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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인터뷰 : 리베라시옹 Liberation / 2007.10.20
도착자들의 역사, 그 ‘저주받은 존재들’ 이번 책의 목적은 선과 악에 대한 탐색이더군요. 그 질문 속에서 도착증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겁니까? 도착증의 특징은 그것이 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즐긴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 범죄자들은 도착적이지 않습니다. 악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딱히 범죄자가 아니면서도 악을 즐기는 도착자들이 있습니다. 그 형상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질 드 레의 사례에 대해서 오랫동안 언급하시더군요. 질 드 레는 그 역전 가능성의 증거입니다.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죠. 그는 진정한 반항인이었던 잔 다르크에게 매료되어 선을 향해 이끌립니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국가의 이상을 구현했음에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면서 그 영웅주의의 세계가 무너지자 질 드 레는 그때부터 악에 빠져듭니다. 그는 약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살인마로 여겨지고 있죠. 그의 재판을 계기로 사람들은 처음으로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악의 세력을 추궁받은 질 드 레는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인류의 역사 위를 맴돌던 질문이 비로소 제기됩니다. 악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질문은 요즘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악은 인간의 타고난 속성일까요? 우리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속성이죠. 동물의 세계에는 악과 도착증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파괴충동을 선에 대한 이상으로 탈바꿈시켜서 최악의 짓거리들을 저지를 수 있죠. 동물은 결코 나치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동물이라 해도 악을 즐기지는 않으니까요. 악을 즐기려면 악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동물계에 속해 있다고는 해도 동물은 아니죠. 난 우리를 동물과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도착증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사드는 별도의 경우죠. 사드는 좀 특별합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범죄에 빠져들었으리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사드는 성도착증의 목록을 최초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도착증에 대한 질문을 이론으로 정립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법칙을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계몽시대 인간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선이란 지옥에 내동댕이쳐져야 마땅한 것이죠. 사드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정치체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구체제, 혁명기 그리고 제정시대 말입니다. 그는 늘 자신이 살던 시대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제에서 그는 매춘부들에게 저지른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성모독과 계간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죠. 그 두 가지 범죄는 혁명을 통해 폐지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신에게 맞서다가 로베스피에르가 다시 신권을 확립시키면서 제정시대 체제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죠. 하지만 사드가 미쳤던가요? 처음으로 사람들은 미치광이와 반미치광이를 구분하게 되죠. 사드와 함께 유럽 의학은 도착증을 점뽄하게 됩니다. 도착적 행동은 그때부터 악마의 화신으로서 악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정신건강에 속하게 되죠. 중세에 신비주의자들은 악의 세력을 내세워 신에게 도전했습니다. 18세기에 자유사상가들은 기존의 도덕을 무시했고요. 신비주의자들은 완전히 도착적인 희생의식(채찍질, 오물 삼키기)을 치르며 전대미문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에게 자신들의 육체를 바쳤습니다. 반대로 자유사상가들은 쾌락의 도덕으로 질서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의 자유를 포함해서 말이죠. 고대부터 도착증은 먼저 성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절대적인 도착증으로 평가되는 계간은 모든 세기를 관통하는 것이었고요. 계간은 번식을 가능케 하지 않기 때문이죠. 혁명은 계간죄는 폐지했을지언정 그것이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생각은 없애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계간은 여전히 일부 종교국가, 특히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범죄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일부 주에서도 그저 문서상일 뿐이긴 하지만 유죄로 인정됩니다. 1974년이 되어서야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고 선언되었습니다. 동성애자, 자위행위 하는 어린이 그리고 히스테릭한 여성은 1802년 정신의학이 탄생하면서 19세기 내내 최악의 도착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성의학자들은 여러 가지 범주를 확립했습니다. 성적인 비정상행위들, 비정상인들, 물신숭배자, 시체애호자, 노출광, 동물성애자 등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 성의 비정상상태죠. 신발과 함께 잠을 자거나 동물과 함께 또는 시체와 함께 잠을 잔다고 여겨지는. 동성애자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 건 확실합니다. 한편으로는 고대부터 위대한 예술가들과 위대한 전사들이 동성애자들이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동성애에는 확연히 눈에 띄는 비정상 상태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최악의 도착자들이고 오로지 그들만이 스스로 도착증의 구조 자체를 구현한다고, 다시 말해서 치삔해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들이라고 상상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과학은 동성애자를 도착자들 속에 끼워 넣기로 했던 겁니다. 결국 번식에 대한 강박관념이 도착자를 정의하는 거군요. 사실 번식을 거부하는 것은 대단한 패덕이죠. 가뽄, 고대에 항문 성교는 도시국가를 위해 번식만 해준다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어요. 홀로 섹스를 즐기며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혈통이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죠. 그런데도 서구 사회는 가족이 이제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법률학적이라고 이해했어요. 사람들은 섹스가 갈구할 만한 것이라고 인정하죠. 따라서 인공적인 번식을 허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낳고, 그러면서도 번식에 대한 두려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죠. 모든 경우에 비정상이 방해가 되는군요? 19세기에 위고와 발자크, 플로베르, 보들레르, 위스망스, 오스카 와일드는 기존질서의 우둔함에 맞서 도착증의 화려한 측면을 주장합니다. 1857년에는 『악의 꽃』과 『보바리 부인』에 대한 재판이 벌어집니다. 재판관들이 볼 때 엠마 보바리는 도착증의 화신이죠. 번식을 거부하고, 사회에 도전하고, 히스테리컬하고, 자살을 하니까요. 한편 보들레르는 레즈비언 여성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아요. 그러고 나서 프로이트가 등장하죠?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동성애자와 자위하는 어린이 그리고 히스테릭한 여성이 도착증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다형도착자인 어린이는 도덕이 혐오하는 숱한 일들을 저지르고, 특히 자위행위를 합니다. 문제는 자위행위가 병리학에 속할 경우에만 존재합니다. 프로이트는 디드로의 철학을 다시 내세웁니다. 선을 행하려면 악을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그에게 히스테릭한 여성들은 이제 도착자들이 아니라 신경증 환자들입니다. 그리고 동성애는 비록 많은 동성애자들이 도착자들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도착증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오늘날, 사회는 두 부류를 심각한 도착자로 지정합니다. 테러리스트와 소아성애자 말입니다. 빈 라덴은 제가 볼 때 도착자의 절대적인 형상입니다. 그는 부랑국가를 구현하고, 여성을 증오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를 현실화하며 무엇보다도 과학을 왜곡합니다. 일본의 가미가제가 치른 희생은 도착증이 아니라 군대식 전통이었습니다. 오로지 군사적인 목표에 대항하는 자발적인 죽음이 포함된 일본 봉건제도의 전통이었죠. 자발적인 죽음에는 항상 어떤 계승이 동반됩니다. 하지만 이슬람 파시스트들은 목숨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희생에는 전혀 물려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파괴의 쾌락이죠. 빈 라덴은 “우리의 용맹한 전사들이 목숨을 바쳤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죠. “열대여섯 명이면 충분히 서양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소아성애자는요? 오늘날 소아성애자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입니다. 17세기에는 그렇지 않았죠. 그때는 성인과 아이 사이의 접촉이 특히 가정에서, 인정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용인은 되었어요. 어린이 강간 살해자는 언제나 가장 비열한 형상으로 여겨졌고요. 평범한 소아성애자들이 두려움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당대에 그에 대해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모든 신경증 환자들이 유년기에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곧 그 미심쩍은 생각을 포기하고 판타즘 개념을 만들어내죠. 오늘날 사람들은 우트로 사건(성폭행 당했다고 증언한 어린이들과 그 어머니의 증언만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환상과 실재를 혼동합니다. 현재 우리가 퇴행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8세기부터 사람들은 인간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고, 정의는 명예회복을 향해 진보했습니다. 하지만 이십 년 전부터는 다시 어떤 인간들은 도저히 구제할 수 없다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저주받은 부분을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었고, 우리는 현재 대단히 진보적인 시기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그것을 재도입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평생 감금시킴으로써 프랑스 혁명을 통해 폐지되었던 체형을 되살리고 있죠. 신체에 개입해서 정신현상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외과술과 내분비학의 진보는 소아성애자에게 발기를 멈추게 하는 약을 처방하기만 하면 된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준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화학적인 구속으로는 욕망을 막지 못해요. 대개는 더 위험하게 만들죠. 지금 이 시대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 화학 생물학적 해결책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확신에 찬 도착적인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근절시키겠다는 과학만능주의의 귀환인 거죠. 상품과 생체권력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조절이 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인간인 신인간의 마지막 이론입니다. 1880년에 독일에서 상당히 멋진 이론으로 탄생했던 그 생체권력이 사십 년 후에 나치즘을 이끌었다고 입증하셨습니다. 인문과학과 사회학에 의존하여 신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실 관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생물학이 아니라 환경에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1918년에 독일 민족의 모욕과 함께 끔찍한 민중주의가 자리를 잡습니다. 당시 나치는 해결책으로 생물학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치주의의 특징은 과학의 도착적 활용과 처음부터 계획했던 대량학살입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점입니다. 공산주의의 경우 집단의 공포는 사실 출발점에는 없었던 이데올로기의 역효과니까요. 한나 아렌트가 만들어낸 ‘악의 평범성’ 개념에 대한 오해를 일소시키셨는데요. 한나 아렌트의 추론은 악의 쾌락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긴 하지만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악의 평범성’은 결국 누구든 나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콘라트 로렌츠가 옹호했던 그 행태주의적 테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돌아가는 형세를 알지 못하는 관료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대량학살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나치의 수장들 모두가 하나같이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그들은 의식적으로 과학을 내세워서 행동했다는 겁니다. 근본적이고도 완전한 법칙의 전복을 내세워서요. 나치의 살인마들은 헛소리를 하는 미치광이들도 아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추론하는 자들이었죠. 그들은 부정의 순간에도 도착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현실을 호리는 미치광이, 사실을 부정하는 도착자죠.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회상록에서 자신이 가스실에 들어가 희생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그들이 고통받지 않았다고 감히 말한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최종해결책을 자행한 독일은 문명의 한 모델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만행위로 전향했죠. 그건 무엇이든 망상적인 위생학 속으로 곧장 이끌 수 있는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다른 유형의 과학만능주의 확신을 되살렸어요. 현재의 집단적인 평가에 대한 편집증을 보세요. 아기들에게서 청소년범죄의 신호를 추적하겠다는 해괴한 생각처럼 말이에요. 영국에서는 벌써 태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쓸모없는 그 사이비 과학의 탐색은 사생활과 정신현상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침입입니다. 생체권력을 민주주의 사회들이 처한 새로운 재앙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정리|베아트리스 발라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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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성직자들의 자해 행위는 신에게 바치는 의례였다.
사드에게 도착은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과 해방의 묘사였다. 그렇다면 소아성애, 테러리즘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도착은 무엇인가? 프랑 저명한 정신분석가가 밝혀낸 도착의 본질과 그 의미.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는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이자 역사학자인 저자가 인간 내면에 감춰진 변태와 도착심리를 역사, 철학, 문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탐구한 책이다. 중세 신비주의 고행자부터 15세기 아동살인마 질 드 레, ‘사디즘’을 탄생시킨 18세기 작가 사드를 거쳐 아우슈비츠의 살인마들, 소아성애자와 테러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상 존재한 다양한 유형의 도착자들과 그들의 잔혹 행위를 분석하면서 시대와의 관계를 살피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천사를 함께 고찰한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인간의 도착적 행위는 단지 일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사회 전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페스트적 사건일 뿐이라는 윤리적 선입견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보기에 이 파괴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욕망, 곧 변태적 심리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공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사악함이며, 이것이 다른 형태, 특히 예술적 행위로 표출될 때는 얼마든지 숭고한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 창조성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결론을 섬세하고 성실한 사례 연구와 분석만으로 증명하고 있지는 않다. 들뢰즈, 라캉 등과 함께 프랑스 정신분석학 운동을 이끈 68세대 철학자답게 루디네스코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침묵을 드러냈던 위대한 스승들을 통해 이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책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와 사드 등의 작품 속에 나타난 은밀하고 잡다하기까지 한 도착 행위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의미화 작업을 통해 자신의 결론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증명 과정 속에는 성적 인식의 역사와 의미를 탐구한 전 시대와 동시대의 위대한 세 철학자, 프로이트와 바타유, 푸코의 논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자리한다. 그 다양한 형태와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착자들을 통해 저자가 보편적이며 초역사적인 담론을 추출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러한 비판적 수용의 결과일 것이다. 숭고하고도 비천한 인간 내면의 탐구 도착이냐 아니냐는 악을 즐기느냐 아니냐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도착자란 어떤 사람인가? 그저 악을 행하는 것만으로는 도착자라 할 수 없다. 도착자는 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다. 즉 도착자란 악을 의식하면서 행하고, 그 행함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악행이 도착 행위인 것은 아니며, 모든 범죄자가 도착자인 것은 아니다. 정신착란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도 도착 행위가 될 수 없다. 같은 의미로 동물의 세계에서는 도착도 도착 행위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즐거움을 위해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으며, 단지 유대인이기에 지상에서 살아갈 권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몰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잔인성을 가지고 태어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과 대치된 혹은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쾌락이라는 차원만 떼어놓고 볼 때 인간은 모두 잠재적 도착자라 할 수 있다. 살인 충동, 가해 충동, 노출 충동, 지배 충동 등 타인을 통해서든 자신을 통해서든 고통을 즐기려는 충동, 곧 도착의 환상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그런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느냐 아니냐에 따라, 또 그 가해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에 따라 한없이 숭고해질 수도, 더없이 비천해질 수도 있다. 이 파괴적이고도 잔인한 충동이 예술이나 창의력으로 발산될 때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환상으로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드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저주받은 작가 사드는 성도착자의 한계를 위대한 작품으로 구현해낸 작가다. 변화무쌍한 계몽주의시대를 살았던 사드는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와의 괴리를 모든 형태의 자유로움으로 풀어냄으로써 사회의 질서에 맞서 대항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계몽주의시대는 과학적 합리, 곧 자연적 순리의 시대였다. 당대에 자위하는 어린아이와 히스테리 여성, 동성애자를 가장 도착적인 인간들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그들의 행위는 자연을 거스르는, 다시 말해 번식의 의무를 거부하는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좀 더 세분화되어 도착증은 이제 정신의학적으로 분류, 연구되기 시작했다. 모든 비합적리적이고 비순리적인 행위, 곧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들을 목록화하여 단속하였고, 번식을 거부하는 자들(자위하는 어린아이와 동성애자)과 사회에 도전하는 자들(히스테리 여성)과 함께 자살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을 모두 도착증 환자로 몰았다. 이 시기에 쓰인 『보바리 부인』의 엠마 보바리를 도착증의 화신으로 여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성애가 도착 행위 목록에서 빠진 것은 겨우 1974년이 되어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오늘날 소아성애를 가장 도착적인 행위로 분류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까? 소아성애자에게 약물을 투여하거나 전자팔찌를 채워야 한다는 오늘날의 관점은 과학만능주의와 생체권력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떼어놓을 수 없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생체의 권력화에 대한 이러한 무모한 숭배는 맹목적 위생학의 망상이 저지른 나치의 인종대학살처럼 언제 또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중세시대 신비주의자들의 희생의식, 즉 채찍질, 오물 삼키기 등은 악에 대항한 신에게 바치는 의례였다. 사드에게 있어서 도착은 모든 차이를 허물고,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과 해방의 묘사였다. 그러나 동성애자나 히스테리 여성, 자위하는 아이들을 성도착자로 몰아붙이면서 성도착 목록을 만들고 이를 통제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의 도착은 어떠한가? 그것은 개개인의 욕망에 대한 사회와 권력, 그리고 과학의 억압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것을 그저 막기만 하고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도착적인 측면은 또 다른 분출구를 향해 파괴를 단행할 것이다. 도착, 공포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이 책은 도착적이다. 아니, 도착적이 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도착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도착자들의 변태적 행위를 묘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속죄행위에서부터 사드의 성적 환상, 아우슈비츠의 집단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행할 수도 없다고 생각되는 행위와 사건들을 이 책은 담고 있다. 고름을 먹는 성녀, 300명의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질 드 레, 에뾔티시즘의 창시자 사드의 『쥘리에트 이야기』와 『소돔의 120일』에 묘사된 인간의 변태적 행위들은 소름끼치게 잔인하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엽기적이다. 질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농가에서 잡아온 어린아이들을 가두어놓고 끔찍한 학대를 저질렀다. 사지를 자르고 장기들을, 특히 심장을 꺼내면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강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때로는 광분해서 발기된 성기를 움켜잡고 죽은 아이들의 배에 문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들면서 사정을 했다. --- 질 드 레, 잔 다르크의 전사에서 아동 살인마로 중에서 p.46 그 다양한 형태와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도착 행위는 보편적이며 초역사적인 담론으로 묶여질 수 있다. 이는 조르주 바타유가 ‘저주받은 몫’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 속에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루디네스코가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신성을 빼앗긴 도착증을 ‘공포의 대상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즉 자연 질서와 사회 규범을 위반하는 개인의 행위로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나 자위행위자, 성도착자, 시체애호가, 배변음욕자 등의 생명주권주의적 행위를 그저 사회의 상징적 토대를 허무는 일탈로 분류하고 차단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차단의 가장 극단적이고 도착적인 결말은 계몽주의시대를 지나 20세기 초,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루디네스코의 분석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명명을 통해 결국 인간은 누구나 대량집단학살을 저지른 루돌프 헤스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에 대한 과학적 뒷받침이기도 하다. 청교도적이고 정숙했던 헤스는 술이나 담배도 하지 않았고, 수수한 작업복을 즐겨 입었으며,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아내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집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헤스는 어쩌다 한 번씩 가스실에 들어가서 모든 걸 확인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희생자들이 고통 받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의 얼굴과 ‘경련 없는’ 시신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 학살자의 시선으로 본 홀로코스트>로 중에서 pp.185~186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단지 20세기 초, 가장 끔찍했던 과거에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880년 생체권력으로 탄생했던 멋진 이론이 40년 후 나치주의를 이끌었듯, 현재 자행되고 있는 소아성애자에 대한 약물 투여와 전자팔찌 착용 등은 새로운 아우슈비츠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루디네스코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회의 저주받은 부분을 감시하고 없애서 투명하게 만들려 하는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다”라고 결론짓는다. 우리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들춰내다 도착자들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도착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고,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부분이 잠재되어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 은밀하게 잠재되어 있는 이 도착성은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부수는 어두운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도착성은 창조적이고 자기초월적이며 위대하다는 특징을 포함하고 있는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차원 높은 자유에 다가가기 위한 우리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성적 도착 행위들에 대한 과도한 억압과 거대 산업이 된 포르노그래피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 봐야만 할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너무나도 다양한 도착 행위의 ‘역사적 박물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도착의 역사’만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랜 과거부터 최근의 시기까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도착 행위와 그 행위의 주체자들을 통해 인간의 변태 심리에 대한 시각의 변천사를 확인시켜주는 한편,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변태 심리와 도착 행위에 관한 윤리적 선입견을 제거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히 도착 행위와 도착자에 대한 새로운 위상의 정립이자 인간의 변태 심리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류가 성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역사를 두루 관통하면서 반복하고 있는 악의 쾌락과 도착의 역사를 그려 보임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면의 도착적 욕망을 인정하여야 하며, 더 이상 그 정당한 권리를 배척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도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프로이트가 주장했듯 '승화'를 통해 그 근원을 초월하는 방법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도착은 치유를 통해 없앨 수도 없고, 통제를 해서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철저한 통제와 포르노그래피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현대 사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도착적인 사회인지를 저자는 경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