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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한 큰 사상가
박영호
두레 2009.02.15.
베스트
한국철학 top20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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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추천사
세계가 인정한 차원 높은 독창적인 사상가-정양모(전 성공회대 교수, 다석학회 회장)
일생을 두고 본받을 만한 스승, 다석 류영모-림낙경(시골 교회 목사, 한국정농회 회장)

머리말

1부 영성의 향기 그윽한 생애
두 번 낳은 어머니의 크신 은혜 / 초창기 교육제도와 배움 / 독립정신의 요람, 오산학교의 부름 / 타율적 신앙에서 자율신앙으로 / 일본 유학 포기와 입지立志 / 기인奇人인 오산학교 교장 / 제자 함석헌과의 첫 만남 / 문장文章으로 허락 받은 결혼 / 첫날밤 독수공방한 신부 / 3·1운동 때 대신 치른 옥고 / 영성의 연경반 강의 / 「성서조선」을 발행한 김교신과의 만남 / 솜공장에 불이 나도 태연 / 북한산록에 출애굽으로 숙원을 이룸 / 자연 속에 은둔하는 기쁨 /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추대 받음 / 쉰두 살에 이룬 큰 깨달음 / 잣나무 널판 위의 삶 / 다석에서 영석永夕으로 / 우리말은 하늘나라 말 / 위기의 동란에도 의연한 몸가짐 / 미리 받은 죽을 날 / 무의식까지 뿌리박힌 신앙 / 여든일곱 살에 출가 시도 / 시름의 옷을 벗다 / 영성의 향기 그윽한 생애 / 몸성히 살기 / 수數를 아름답게 보다

2부 죽음을 밟고 선 영원한 생명
1. 한알과 씨알 섬김
스승 류영모와 제자 함석헌 / 역사에 나타난 씨알정신의 성육신成肉身 / 톨스토이, 간디, 류영모의 일치된 씨알정신 / 류영모의 씨알정신 형성과정 / 속죄신앙에서 영성신앙으로 / 영성신앙은 새 인류의 나타남 / 짐승 성질獸性이 원죄原罪 / 짐승 성질에서 벗어난 자유
2. 더 위없는 큰 깨달음
삶과 깨달음 / 류영모의 큰 깨달음 / 얼나로 솟난 뒤 달라진 삶
다석 연보年譜

저자 소개 1

朴永浩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사상계〉에서 함석헌 선생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단사(斷辭)’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마침보람’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5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문화일보〉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 《잃어버린 예수》《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깨달음 공부》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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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63쪽 | 398g | 148*210*20mm
ISBN13
9788974430856

출판사 리뷰

2008 세계철학대회에서 전 세계가 주목한 우리의 큰 사상가이자, 우리나라가 낳은 20세기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 다석(多夕) 류영모.
일생 동안 ‘참’을 찾고, ‘참’을 드러내고, ‘참’에 돌아간 성인(聖人)의 삶과 사상



다석 류영모와 다석사상의 입문서이자 결정판
『다석 류영모』는 ‘독야청청’ 다석사상을 전도하는 다석의 제자인 박영호가 스승인 류영모의 삶과 사상을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학자나 열린 종교인, 전문가 등 일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알려져 있는 다석 선생과 다석사상을 일반 사람들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이 책의 기획 의도이다. 후학들을 위한 ‘다석 낱말사전’(3년 정도 예정)과 병행하면서 이 책의 원고를 쓰고 다듬를 거듭해 1년여 만에 책이 나오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 쏟은 애정과 노력을 회상하며 “다석 류영모와 다석사상에 관한 입문서이자 결정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다석사상을 ‘쉽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책이 더욱 뜻깊다 하겠다. 다석사상이 세상을 바라보고 또 세상을 살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몸이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펜을 놓지 않은 노학자의 노력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다석은 어떻게 구도의 길을 걷게 되었고, 무엇을 깨달았고,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다석의 육체적 생애를, 2부는 정신적 사상을 다루고 있다. 2부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뉘어, 다석이 어떻게 구도의 길을 걷게 되었고, 구도 속에서 무엇을 깨달았고,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다석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설명해준다. 2부 내용의 기틀은 지난해 집필실로 찾아온 한 기자가 던진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자는 다석 선생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과 얻은 뒤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나름대로 답변을 하긴 했지만 스스로 무언가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이 질문은 저자에게 일종의 ‘화두’가 되었고, 이후 이 화두에 대해 더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깊이 있는 사고는 다석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2부 ‘죽음을 밟고 선 영원한 생명’으로 정리되어 태어난 것이다.

기인이자 진인(眞人), 다석 류영모
다석이 어떤 분이었냐는 질문에 다석의 제자인 김흥호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인(眞人), 진인이었지요!” 일생동안 참을 추구한 다석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지행합일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 주었던 류영모(1890~1981)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젊어서 기독교에 입신했지만 불교와 노장(老莊), 그리고 공맹(孔孟) 사상 등을 망라한 동서고금의 종교·철학 사상을 두루 탐구하여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아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다석은 우리나라 3천재, 5천재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고, 평생을 오로지 수도와 교육에 헌신하면서 일생 동안 ‘참’을 찾고 ‘참’을 잡고 ‘참’을 드러내고 ‘참’에 돌아간 ‘성인’이다.
이승훈,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등과 교유했고,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김흥호, 서영훈 같은 이들이 다석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오산학교 제자였던 함석헌은 “일생 동안 정신적으로 단층(斷層)을 이루며 비약한 때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류영모 선생을 만났을 때”라고 했다. 그리고 다석을 그리며 “내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한 번도 선생님에게 질문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노라면 그때에 모든 문제를 좀 물어보지 못한 것일 한(恨기)합니다”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다석은 평생동안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서울YMCA 총무였던 현동완이 다석을 YMCA 연경반 강의(1928~63)에 초빙하지 않았다면 “류영모가 깨달은 진리가 시공 속에 묻혀 버려 아는 이가 아주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묻혀 있었던 보화와 같은 이러한 다석의 사상은 최근 들어 다시 빛을 발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면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다석은 마하트마 간디처럼 드높은 경지에 이른 위대한 정신적인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2008년)에서 제자인 함석헌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소개될 만큼 이제 다석의 사상은 세계가 주목하는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금욕적인 삶을 살다
다석은 “나(自我)가 죽어야 얼(靈我)이 산다”는 것을 깨닫고, 나(自我)를 없이하는 길은 삼독(三毒)의 탐?진?치(貪瞋痴)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다석은 탐욕(貪慾)의 뿌리인 식욕을 버리기 위하여 하루에 한 끼니만 먹었으며, 진에(瞋?)의 뿌리인 미움(憎惡)을 버렸으며 치정(痴情)의 뿌리인 색욕을 버리기 위해 해혼(解婚)하여 부부가 남매처럼 지냈다. 다석은 또한 잣나무로 만든 널판(상가에서 쓰는 널감)에서 생활했는데, 그것은 매일 죽음을 잊지 않으며 매일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앉을 때는 언제나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죽는 날까지 그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인도의 요가와 동양의 섭생, 양생법을 참조하여 자신이 독특히 개발한 체조로 건강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아 91세까지 장수할 수가 있었다. 또 사람은 될 수 있으면 걸어다녀야 한다면서 항상 걸어서 다녔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대학공부는 부질없는 짓이라며 공부를 그만두고 귀국하는데, “다석의 관존민비를 뒤집은 민존관비의 씨알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후 다석은 “어떠한 노동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와 다른 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실제로 자연 속에서 은둔하며 자신의 생각과 삶을 일치시키며 살았다.

군자표변(君子豹變)과 택선고집(擇善固執)
다석의 삶을 응집해서 보여주는 말이 군자표변과 택선고집이다. 군자표변이란 ‘모름지기 군자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아님을 알았을 때에는 표범이 달리던 길을 꺾듯이 그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념, 소신, 철학, 사상 따위를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종교에서 이처럼 군자표변했다. 정통 기독신앙에서 비정통 기독신앙으로 종교관을 바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율적인 교리신앙에서 자율적인 자각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석은 “스님들보다 불경에 달통하고, 도교인보다 노자, 장자에 도통했지만, 개종하지 않았다. 동서양을 모두 회통한 뒤에도 다석은 예수를 자신이 본받을 궁극의 선생이자 가장 큰 스승으로 모셨다”(김흥호)고 한다.
택선고집이란 ‘옳다고 믿는 생각을 고집하는 것’이다. 평범했던 오산학교에 기도교의 씨앗을 심어 오산학교가 명실상부한 기독사학으로 거듭나는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다석이다.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인이 된 것도 다석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 오산학교 교사 시절 다석은 수업 전에 학생들에게 기도하자고 했는데, 기도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용히 혼자 기도했다. 결국 일주일 뒤 학생들은 다석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고 한다. 결혼에 얽힌 일화에서도 다석의 ‘고집’스런 면이 잘 드러난다. 자신의 왜소한 모습과 농사짓는 것이 목표라는 말에 결혼을 반대했던 신부 김효정의 부모를 다석은 글로써 설득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풍속대로 하자면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다석은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친영을 고집해 이를 성사시켰다. 물론 목포에 살던 신부의 부모들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다석은 장인 장모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고서는 신방에 들 수 없다며 결혼식 직후 장인 장모를 만나러 목포로 갔고, 이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밤새 오지 않는 신랑을 기다렸다고 한다. 신랑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다석의 택선고집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열린 종교사상과 한글사랑
다석은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았다. 사상적 기반은 기독교였지만 불경, 노자, 장자, 톨스토이, 간디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철학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다석은 예수, 석가, 노자가 본 진리(절대존재)는 하나라고 했다. 다석이 깨달은 것은, 탐진치(貪瞋痴)로 사는 ‘나(自我)’는 ‘ego’의 나, 수성(獸性)의 나이기 때문에 ‘거짓된 나’이며 이러한 수성을 영적으로 벗어나 영(靈)적인 ‘나’로 전환해야만 ‘참다운 나’에 이르러 절대존재와 이어진다는 것이었는데, 다석은 기독교도 불교도 노장사상도 이러한 진리에서는 하나이며 같다고 보았다. 이러한 다석의 사상은 서구신학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70여 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석은 한글에 하늘의 뜻이 있다 하여 한글을 매우 사랑했다. 다석의 유일한 저서라 할 『다석일지』에는 한시 1,300여 수, 시조 1,700여 수가 있는데, 우리말 시조 1,700여 수는 류영모만의 특색 있는 글이다. 또 “주시경 선생은 공이 많지만 이것(아래 아를 버린 것)은 잘못한 것이다. 아래 아자(·)는 꼭 다시 나와야 한다”고 지적하며 한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한자들을 우리말로 고쳐 쓰기도 했다(93~97쪽 참고).
동양경전에 대한 남다른 식견으로 『장자』, 『노자』, 『중용』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논어』, 『맹자뮡,『대학』,『서경』,『역경』등을 발췌하여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다석(多夕), 그리고 영석(永夕)
류영모의 호는 익히 알고 있듯 다석(多夕)이다. ‘다석’이라는 글자에는 저녁 ‘석(夕)’자가 3개나 모여 있다. 류영모는 다석이라는 말을 ‘하도 지낸 저녁’이라 옮겨서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석이란 무슨 의미일까?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물러나면서 마지막 떠나는 날 고읍역까지 마중나온 함석헌에게 류영모는 “우리가 빛, 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큰 것 아니냐. 삶, 삶 하지만 삶보다 죽음이 더 먼저 아니냐. 깬다, 깬다 하지만 깸보다는 잠이 먼저 아니냐”라고 했다. 이것이 곧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느님께 이르고자 함이다. 그런데 어두운 밤에는 눈을 감지 않아도 눈감은 효과를 준다. 그러므로 밤에는 잠만 자지 말고 이 세상을 잊어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자”라는 다석의 깊은 뜻으로 이어진다. 결국 다석에게 영원한 저녁(永夕)은 곧 하느님 나라이다. 류영모는 영석(영원한 저녁)을 꿈꾸면서 다석을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하루에 세 끼 먹을 것을 한데 몰아 저녁에만 먹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고 했다. 류영모의 일식(一食)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로는 함석헌(咸錫憲), 김흥호(金興浩), 서완근(徐完根), 박동호(朴東鎬) 등이 있는데, 이들은 평생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실천했다.

추천평

“내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오늘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이때까지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석헌
“우리나라에서 세계 사상계에 내세울 인물로 첫 손가락에 누구를 꼽아야 할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이 나라가 낳은 다석 류영모야말로 이 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차원 높은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정양모(전 성공회대 교수, 다석학회 회장)
“다석 류영모는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이 나라가 낳은 독창적인 사상가로 소개될 만큼 세계적인 문화인이다. 일생을 두고 우리가 본받을 스승의 상(像)은 다석 류영모 선생이다.”

림낙경(시골 교회 목사, 한국정농회 회장)
“내가 만나 본 이 가운데 가장 경외하는 사람 류영모…… 하느님을 믿되 이처럼 ‘믿어 사는’ 사람을 우리는 보지 못하였다.”
김교신
“사람들은 다석을 진인(眞人)이라 또는 성자(聖者)라고 추앙한다. 그의 인격이 참되고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다석사상은 우리 민족의 값진 정신적인 유산이요 인류의 유산이다.”

류달영
“학파는 강단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강호를 유람하여 보니 강단 밖에는 강호학파가 잠류하고 있었다.… 내가 꼽는 4대 강호학파는 이렇다. 먼저 다석학파(多夕學派)이다.… 이 학파의 내공은 기독교와 동양사상, 즉 기독교와 유·불·선의 회통에 있다. 이는 20세기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과제였다. 이 과제와 가장 치열하게 씨름한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에서 다석이 나타나 기독교와 유·불·선을 화쟁시켰다.”

조용헌 살롱, ‘강호 4대학파’ 중에서
“다석의 핵심 사상이 ‘없음’에 기초해 ‘있음’에 주목한 서구와 차이를 보인다. 인간 죄성(罪性)이 ‘있음’의 관점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인식하면 다석사상은 충분히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생태위기와 종교적 대안’ 세미나에서 이정배 감리교 신학대 교수
“기독교계에서 다석 류영모 선생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니다. 하지만 다석의 기독교, 다석의 영성에는 매우 주목할 부분이 있다. 나는 그게 한국의 기독교 영성의 광맥이라고 본다.”

김흡영(아이아신학자혐의회 공동의장, 강남대 신학부 교수)
“기독교가 나아가아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다석 류영모 선생을 떠올려 본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전통적 교리에 갇히지 않고 불교, 도교, 유교 등을 자유로이 오간 진정한 종교인이었다. 그에게 여러 종교의 다양한 교의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김희정(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그(류영모)가 3·1운동 기독교 대표 남강과 오산학교를 깨우지 않았다면, 불과 인구 1% 정도의 비율에 불과하던 ‘외래 종교’ 기독(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단시일에 ‘한국인의 종교’가 되기는 어려웠다.… 다석은 한국인과 ‘한국 기독교’를 깨운 최대의 숨은 공로자였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의 스승’이었다.”

김흥호(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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