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한국어 출판을 하면서
한국 전통문화와 나의 건축 프롤로그 건축, 고독한 괴물 덩어리 모더니즘을 넘어 : 다시 보는 안도, 코르뷔지에, 미스 건축이 비평을 담는 속내 공급자와 형식은 승리했는가 공공에서 개인으로, 안도 타다오라는 브랜드 욕망, 건축과 세상을 나누는 마력 데스타일이 코르뷔지에와 미스를 넘지 못한 이유 권력과 거대 건축을 넘어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로 민주주의 건축을 ; 루돌프 쉰들러 경쾌해지는 성 문화, 그리고 조립식 주택 콘크리트의 시대 인클로저, 닫힌 도시와 건축 이념은 건축 상품을 구원할 수 있는가 ; 무라노 토고 건축의 외부 변수들 건축 사진, 아름다움을 대체하다 도심에 알맞은 건축 표현이란 ; 미요시 드림센터 건축 예술과 민주주의의 갈등 ; 우치다 요시치카 "집을 달라, 텔레비전을 보여 달라" ;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소녀와 행자 ; 2000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현실 세계에 기생하는 가상 세계 에필로그 쿠마에 대해 |
KENGO KUMA
쿠마 켄고의 다른 상품
|
약한 건축
지는 건축 부드러운 건축 건축의 새로운 길을 찾는 진지한 탐색 바야흐로 21세기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건축 붐’에 휩싸여 있다. 헤이리와 파주출판단지는 일반인들도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는 건축 투어의 성지가 되었고, 렘 쿨하스,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다니엘 리베스킨트 등 세계적 건축가들의 작품이 대한민국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수많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진 동대문운동장을 일거에 때려 부수고 그 자리에 자하 하디드의 건축 작품을 세우겠다는 계획은 그런 ‘건축 붐’의 가장 극명한 예일 것이다. 일본의 건축가(그 역시 세계적 건축가인) 쿠마 켄고의 『약한 건축』은 이러한 건축 붐에 휩싸여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묻지 않고 답하려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많은 건축 관련 책들이 승자들의 영웅담으로 채워지고(어떻게 예술가인 건축가는 클라이언트-시대와 불화하며 불후의 걸작을 남겼는가?) 경배의 대상이 되는 건축물들의 리스트로 채워지는 데 비해(우리가 보아야 할 경이로운 건축 작품들은 얼마나 많은가?), 쿠마 켄고는 ‘케인즈주의적 대규모 토목 공사 정책’과 스스로 ‘브랜드’가 된 스타 건축가들의 자기 복제로 괴물 덩어리가 된 건축에 대해 진중한 비판을 들려준다. 쿠마 켄고가 보기에 건축은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며, 관계 속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지난 20세기가 단지 ‘건축’의 유행이라는 차원을 넘어 ‘건축적’인 시대였다고 진단한다. 과도하게 시각에, 물질에 의존하고 결국 구심적이고, 구조적이고, 계층적이며, 안팎의 경계가 단절된 폐쇄적인 시스템, 그것이 근대를 지탱하는 ‘건축적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개별 건축물들은 미디어에 의해 ‘왜 건축인가’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의 의문들을 지운 채 단지 하나의 매끈한 ‘이미지’로 취급된다. 르 코르뷔지에 같은 건축의 거장은 이런 미디어의 속성을 스스로 이용해 자신의 건축 작품 이미지에 태연히 손을 대 ‘불후의 걸작’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사회적, 문화적 환경 속에 놓여 있는 ‘건축물’이 아니라 오롯이 그 자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예술 작품’이 이런 건축가들의 목표였다. 쿠마 켄고의 17편의 건축 에세이는 ‘예술’과 ‘경제’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 시대 건축이 놓여야 하는 자리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행한다. 그는 ‘강한 건축’ ‘이기는 건축’ 대신 ‘약한 건축’ ‘지는 건축’ ‘부드러운 건축’이 가능한지를 묻고 또 묻는다. 루돌프 쉰들러, 데 스타일, 우치다 요시치카 등 기존의 건축 관련 책들에 등장하지 않는 ‘패자’ 건축가들의 이야기는 이 진중한 건축 비평의 흥미로운 덤이다. 왜 건축이 미움을 받는가? 건축은 분명 미움을 받아 당연하며,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선, ‘크다’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상 가운데 건축물만큼 큰 대상은 없다. 크기는 건축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건축의 정의 그 자체이기도 하다. 크면 클수록 당연히 방해물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건축을 하는 쪽, 예를 들어 클라이언트인 건축주나 건축가는 많은 경우, 눈에 띄고 돋보이는 멋진 건축물을 목표로 하게 된다. 건축물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결과, 건축물은 점점 눈에거슬리게 되고, 점점 미움을 받게 된다. 건축이 미움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물질의 낭비이다. 건축물은 크기때문에 대량의 자원을 쓸 수밖에 없다. 건축은 터무니없이 물질을 낭비한다. 21세기 지구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제는 그 바닥이 보일 정도이다. 에너지도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시대에 건축처럼 거대한 낭비를 한다면,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미움을 받는 이유는 회복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 번 만들고 나면, 그 건축물은 간단하게 뜯어고치거나 부숴 버리기가 불가능하다. 간단하게 뜯어고치거나 부숴 버릴 수 있다면, 애당초 건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싫어지고 마음에 안 들게 되더라도, 대부분 인간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보통 건축물의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길다. 죽기 전까지는 싫어도 꾹꾹 참아 가면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사실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축물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섬세하고 약한 인간의 신체에 비해 건축물은 훨씬 튼튼하고 긴 수명을 가진 듯 보인다. 인간의 짧은 수명과 무상함을 비웃으면서. 그 돌이킬 수 없는 뻔뻔스러움 때문에 ‘건축물의 회복불가능한 시간성’은 쓸데없이 더 미움을 산다. 이렇듯 건축은 생겨난 이래로 계속, 도망치려야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러나 건축물의 절대적인 크기가 광활한 세상과 비교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다면, 이러한 세 가지 숙명은 거꾸로 건축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크기, 낭비, 긴 수명을 꿈꾸며 건축물을 만들어 왔다. 물론 모두가 그러한 특권적인 존재인 건축물을 만들어 오지는 않았다.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강자’는 한정되어 있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희소한 존재이다. 그 희소성 때문에 크기도 낭비도 긴 수명도 관대하게 봐줄 수 있었다. 케인스주의라는 마술 혹은 조잡한 사기극 앞서 이야기했듯이 건축의 가시적 크기, 물질 낭비의 규모 때문에 건축은 미움을 샀다. 그런데 케인스는 이러한 마이너스 요인을 경제 효과라는 플러스 요인으로 반전해 보였다. 마술이라고 불릴 만한 훌륭한 반전이었다. 케인스에게 건축은 낭비가 아니었고, 사회를 발전으로 이끄는 견실한 행위였다. 그래서 케인스는 “지폐 다발을 폐광에 넣어서 구멍을 메워 버리면 어떤가?”라는 그 유명한 제안을 영국 정부에 대해 도발적인 농담으로, 그리고 반은 진심으로 했다. 우선 지폐를 폐광에서꺼낼 때에도 일이 창출되고, 그 바람에 지폐를 사용하면 수요가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케인스에게 물질의 유한성, 에너지의 유한성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케인스는 건축을 낭비와 다른 무엇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낭비야말로 칭찬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에는 케인스 같은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도 환경의 유한성이라는 개념은 희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낭비라는 개념 또한 그에게는 없었다. 케인스 정책의 과실로 이제는 들판에 버려져 있는 거대한 건축을 보면, 그 계산 방법의 조잡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케인스 추종자들은 실제 삶과 동떨어진 채 추상화된 난폭한 가설을 제시하고 조악한 계산을 해 왔다. 결국 무책임하게 버려진 거대 건축 같은, 조잡한 계산의 결과는 고스란히 현실로 되돌아와 남게 됐다. 그것이 바로 20세기에 학문, 과학이라고 불리던 것의 실체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구조물’은 그 같은 조잡한 계산의 위화감을 보기 좋게 예견하고 있는 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유치한 계산의 결과를 곧이곧대로 실재하는 물질에 적용하더니, 이제는 섬세한 현실 속에 돌연한 사고처럼 내팽개쳐지고 만 살풍경, 그 위화감을 사람들은 구조물이라고 부른다. 케인스 정책은 결국, 건축이 초래한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반전하는, 혹은 플러스라고 그럴싸하게 속이기 위한 일종의 마술이나 사기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규모, 물질, 에너지의 문제에 대해 하나씩 착실하게 대응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길은 선택되지 않았다. 하나하나 섬세하게 얽혀 있는 현실과는 단절된 채 공중에 붕 떠 있는 ‘건축’이라는 존재를 임의로 상정해, 오셀로 게임처럼 한 번에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반전하는 속임수를 구사했다. 그러고는 이 단절된 ‘건축’ 주위에 발생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 듯한 태도를 보였을 뿐이다. 건축이라는 위험물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까 패배의 수사학이 존중받는다는 말은 공동체가 패쇄적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공동체가 개방적이어서 외부와 직면할 때, 사람들은 외부에 대해 ‘이긴다’라는 수사학으로 서로 경쟁한다. 하지만 공동체가 패쇄적이어서 외부가 없을 때, 사람들은 패배를 위장해서 내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다. 패배가 곧 승리이다. ‘진다’라는 수사학은, 이러한 유서 깊은 올바른 공동체적 태도를 따르고 있다. 건축에서도 모두 ‘진다’라는 수사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클라이언트에 졌다.”, “기묘한 형태의 부지에 어쩔 수 없이 졌다.”, “불합리한 건축법규에 졌다.”, “공사 예산의 부족함에 졌다.”라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건축 잡지에 줄줄이 실린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정말 울어 버릴 일들의 퍼레이드로, 마치 패배에 대한 자랑만 늘어놓는 듯하다. 상대를 설득해 자신의 사상을 실현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쓰는 인간은 괴짜 취급해야 할 정도이다. 하지만 ‘진다’라는 전략에 대한 비평 역시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무엇보다 ‘진다’라는 수사법의 뒤편에서, 또다시 건축이라는 ‘결과’의 힘이 은폐되는 일이 문제이다. 패배의 수사법을 겨루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건축이 어떻게 지든, 진 척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건축은 여전히 너무나 강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건축은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주위 경관에 영향을 주어 사용자의 행동이나 심리를 규정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이겨 왔다. 시민 참여를 도입해도, 디지털 아키텍처 같은 외부 매개변수로 형태 변화를 유도해도, 디즈니랜드 같은 판타지를 구사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해도, 어떻게 해도 건축 자체는 강하고 이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 숙명을 자각하는 데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저항값이 소멸되어, 마치 얼음 위에서처럼, 현실 위에서 천천히, 부드럽게, 살그머니 건축이라는 위험물을 착지시켜야 한다. 브랜드를 얻고 창조성을 잃은 스타 건축가 결국 대중 소비사회라는 일반적인 현상(브랜드)이 건축을 덮어 버렸다. 바로 이때부터 건축가는 곤경에 처하기 시작했다. 공공 영역이 부여한 보증서만으로 일하던 공적인 건축가의 임무는 끝났다.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건축가에게만 일이 집중되었다. 각 도시는 안도 타다오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돈을 주고 모았다. 이미 브랜드가 된 사람들은 도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약속한 스타일을 제공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풍경이 각 도시에서 반복되었다. 전 지구화 초기 단계에서는 소수의 신용 있는 브랜드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것이 브랜드의 법칙이다. 브랜드는 때때로 공적인 건축물도 디자인했다. 개인 영역이 브랜드에 열광해 의존하듯이, 공적 주체 역시 브랜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국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건축에 특권을 부여하고 보장해 주던 공적 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한, 공적 주체는 경쟁 체제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경쟁을 붙여 실험적인 안을 선택해 모험하기보다는, 실적 있는 브랜드 하나를 선정하는 편이 훨씬 위험성도 적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해 건축 주체를 선정하는 방식은 점점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계획안이 아니라 사람을 지명하여 선정하는 방식은 이후 대세가 되었다. 사실 그들이 선택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닌 브랜드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행정기관은 지명 방식을 선호했다. 드디어 공공 영역까지 완전히 브랜드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전 세계로부터 많은 일이 집중되면 개인 브랜드가 생각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브랜드가 대중이 기대하는 ‘약속’까지 바꿀 수는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인 브랜드 건축가라도 자신의 디자인을 반복하는 안이한 방법으로 일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건축으로부터 창조성이 사라져 간다. 특히 건축물이 지어지는 장소, 그 자리의 미묘하고 다양한 조건을 존중하면서, 하나씩 독특한 해답을 찾아가는 건축가의 끈질긴 창조성은 점점 소멸된다. 본래 건축가는 브랜드의 반복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고, 하나하나 찾은 해답을 축적해 나가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건축과 상품의 차이일지 모른다. 이것이 오늘날 건축가를 둘러싼 제2의 위기이다. 이렇듯 건축의 브랜드화는 사회가 건축이라는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끼게 될 날을 앞당길 수도 있다. 이미지를 조작해 아름다움을 포장하는, 이미지로서의 건축 디지털 이미지 처리 기술이 발전해 어떤 사진도 원하는 대로 가공할 수 있다. 잡지에 소개할 건축 작품 앞에 전신주가 있어 방해가 된다면 간단히 지워 버리면 된다. 뒤에 서 있는 보기 흉한 빌딩을 없애는 대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을 만들 수도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건축물 이미지를 얻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사실 이렇게 배경만 만지는 정도라면 그리 큰 죄는 아니다. 무서운 일은 건축 작품 자체의 변형이다. 선택한 지붕의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건축주의 소망대로 갈색 지붕을 멋진 은색으로 바꿔 인쇄하는 일도 가능하다. 또는 건축 기준법의 높이 제한 때문에 건물이 가로로 넓어 보인다면 가로?세로 비율을 바꿔 건축을 갸름하게 변형시켜 잡지에 소개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러한 이미지 조작이 현재 건축 잡지에서 어느 정도까지 행해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미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어도 누구도 이상해하지도 않고, 어쩔 수 없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왜 모두 이렇게 단념하는 분위기일까? 왜 아무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건축 잡지가 편집할 때 추구하는 가치 기준이 진실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이기 때문이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하는 일이 중요한 가치 기준인 보도 뉴스 같은 미디어에서는 이런 이미지 조작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편집자의 목이 달아나거나 사장이 사죄할 정도의 사건이다. 하지만 건축 잡지에서는 진실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진실은 희생해도 좋다는 풍토가 있다. 컴퓨터 이미지 처리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이루어지기 전부터 이와 비슷한 일은 행해지고 있었다. 필터를 사용해 색을 바꾸거나 극단적인 망원렌즈나 광각렌즈를 사용해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작업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이러한 일은 삼류 건축가가 아니라, 일류 건축가들이 더 열심을 내어 했던 일이었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는 코르뷔지에가 이미지 처리의 달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코르뷔지에는 종종 에어브러시 등의 기법을 이용해 사진에 손을 대고 태연하게 작품집에 게재했다. 코르뷔지에는 그가 만든 작품의 배경에 있는 건물이나 산을 지워 상쾌한 푸른 하늘을 살리는 날조도 했다. 뚜렷한 윤곽의 그림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밝은 벽면과 어두운 벽면 사이의 경계 부분에 자로 선을 그어 그림자 부분을 전부 어둡게 칠하는 일도 그의 특기였다. 최고의 건축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을 한다. 게다가 이러한 작업이 건축가로서 그의 명성과 평가에 흠집을 내는 일도 절대 없었다. 이것이 바로 건축이라는 세계이다. 건축과 건축적인 시스템으로서의 근대 건축물이라는 존재 형식은 세계의 확대와 팽창을 처리하기 위해 예전부터 발명되고 진화된 물질의 형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는 인공적인 세계를 말하며, 자연의 대척점인 인공적 환경으로서의 도시라고 바꾸어 말해도 괜찮다. 세계가 작았다면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살아도 좋았고, 나무의 구멍에서 살아도 됐다. 하지만 인간 세계가 확대해 가면서 은신처 shelter로서 의 건축도 필요하게 되었고, 팽창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기념비적인 건축, 강한 형태성을 가진 건축도 요구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빈터에, 이제 돌멩이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려 가야 할 필요가 생겼다. 팽창하는 세계가 요구하는 건축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초고층 빌딩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건축은 세계의 팽창을 운영하기 위해 생겨나, 눈에 보이는 감각에 의존해서 자꾸만 높아져 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팽창에 의해 불안정해진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 케인스 경제학이 등장하고, 세계의 크기에 대한 가장 공평하고 합리적인 정치적 방책으로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그러나 크기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 낸 그 모든 방책은 예상을 뒤엎고 팽창하는 현실 세계의 압도적인 크기 앞에서, 일찍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움직임이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방책들이 건축의 전 영역을 덮치고 있다. 20세기의 공공투자와 내 집 마련 정책은 케인스 경제학과 20세기형 민주주의와 연동하여 세계의 크기를 운영하는 유효한 시책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크기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 버리고 말았다. 이것들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효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크기라는 어려운 문제를 운영하기 위해서 개발된 근대적 시스템은 공히 단 한 가지 이유에 의해서 효력을 잃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바로 건축적인 시스템 말이다. 건축적인 시스템은 과도하게 시각에, 물질에 의존하게 만들고, 결국 구심적이고, 구조적이고, 계층적이며, 안팎의 경계가 단절된 폐쇄적인 시스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