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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ㅣ 웬 통일이냐고요?
제1장 뒤틀린 현대사의 서고ㅡ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 놀라운 역전ㅡ신탁통치와 친일파의 부활 거인, 쓰러지다ㅡ좌우 합작 운동과 여운형 암살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기켜도 무방하다!”ㅡ제주 4.3 항쟁과 잠들지 않는 남도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ㅡ남북연석회의와 김구ㆍ김규식 분단 국가의 탄생ㅡ대한민국 정부 수립 또 하나의 분단 국가ㅡ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끝나지 않은 전쟁ㅡ한국전쟁 그해 여름 노근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ㅡ노근리 사건 제2장 역풍의 정치가 조봉암ㅡ진보당 사건 쿠데타, 그리고 두 죽음ㅡ5.16 군사 쿠데타와 황태성ㆍ조용수 사건 팔아넘긴 민족의 자존심ㅡ6ㆍ3 항쟁과 한일 회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ㅡ베트남전쟁과 한국 전쟁 위기의 한 해, 1968년ㅡ북한의 무장 침투와 푸에블로호 사건 상처받은 용, 윤이상ㅡ동백림 사건 실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ㅡ남북 적십자 회담과 7.4 남북공동성명 얼어붙은 겨울 공화국ㅡ유신 체제와 긴급조치 발동 타는 목마름으로ㅡ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제3장 그때 우리가 낸 성금은 어디로 갔을까ㅡ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시인은 왜 평양에 갔을까ㅡ문익환 목사 통일의 꽃 임수경, 분단을 넘다ㅡ임수경 방북 사건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ㅡ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34년의 감옥살이, 43년 만의 귀향ㅡ이인모 송환 1994년, 전쟁 직전의 서울ㅡ북한 핵 문제와 제네바 합의 조문 파동과 빨갱이 사냥ㅡ김일성 주석 사망 소를 몰고 북으로 가다ㅡ정주영의 소 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 대화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ㅡ페리 보고서와 북미 관계 가장 뜨거운 포옹ㅡ남북 정상 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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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은 2000년 6월에 이루어졌다. 남북한 모든 겨레와 해외 동포의 관심이 한 곳 평양으로 집중되었으며 세계의 언론도 평양을 주목하였다.
2000년 6월 13일 대통령 전용기로 평양 순안공항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은 뜨거운 포옹을 나눈다.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 드디어 만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며칠 뒤 고별 오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내가 공항 환영 나가는 것을 김용순 비서가 말렸는데 나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주변에서 빨간 불을 켠다. 내가 새총으로 빨간 불을 깨뜨리며 나간다” 고 말해 북한 내부에서도 김국방위원장이 공항까지 직접 영접하러 나가는 것에 대해 진통이 있었음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전례 없는 환영 분위기 속에서 회담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두 남북 정상은 2000년 6월 15일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pp.292~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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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6일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미군의 한국 주둔사는 범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은 그동안 한국 땅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범죄를 저질러왔다. 그것은 명령계통을 따라 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경우도 있고, 사병들에 의해 자행된 개인 범죄도 있다.
미군 범죄에 대한 미국의 기본적인 태도는 정의ㆍ인도ㆍ자유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철저히 자기 나라의 이익과 자기 국민의 보호르 기본으로 할 뿐이다. 그래서 미군에 의해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범죄의 경우 우선 일차적으로 부정하고 본다. 그러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이 명백한 증거가 드러난 경우, 마지못해 그 사실에 대해서만 겨우 인정한다. 그리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사건 조사에 대한 공동 발표가 있은 뒤 '노근리 미군 양민 학살 사건' 대책위원장 정은용 씨는 이렇게 말했다. “산간 외단 마을의 주민들을 미군이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주겠다며 그렁내 폭격과 기총소사, 소총으로 400여 명을 마구 학살한 사건, 이게 노근리의 진실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발표는 이런 진실을 허구로 가리면서 생색만 내려는 짓입니다.” 공동 발표문은 '절박한 한국전쟁 초기의 수세적인 전투 상황하에서 철수중이던 미군이 노근리 주변에서 수 미상의 피난민으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건'으로 규정해 '실체적 사실'만을 인정했을 뿐, '미군에 의한 조직적 양민 학살'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공동 발표문은 사건의 가장 핵심 사안 가운데 하나인 사격 명령의 하달 여부에 애해서는 증언자들의 증언이 엇갈려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애초 미국측은 참전 군인 175명에 대한 증언 청취 결과 일관되게 “사격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고 증언한 점을 들어 “사격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는 단정적인 내용을 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상부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것이 아니라 경황없이 후퇴하는 와중에 일선 사별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도의적인 책임은 인정하더라도 군과 정부의 직접적인 책임만은 극구 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공동 발표문은 무엇보다도 '진실에 가까울 것'으로 판단되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주장을 인정하지 않아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사건의무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정부는 참전 장병들의 증언을 이끌어 내는 데도 소극적이었다. 루이스 칼데라 육군부 장관은 조사 과정에서 “전쟁 범죄자로 밝혀지면 처벌한다”고 발언했다. 이처럼 면책특권이 없는 상황에서 누가 50년 전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서겠는가. --- pp.102~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