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롤로그: 무시된 계약
제1장 네 계보의 놀이 보수주의자들 _19 | 끊어진 사슬 _27 | 과학주의자들 _33 개인주의자들 _43 | 인본주의 계보 _49 | 계보들의 분쟁 _55 ‘오만’과 ‘순진’ _61 | 자연적인 혹은 인위적인 _65 역사 속의 인본주의 _71 제2장 자율 선언 몽테뉴 _79 | 데카르트 _90 | 몽테스키외 _100 | 루소 _108 | 콩스탕 _117 제3장 상호의존 사회적 본성 _132 | 사회성 _134 | 시선과 애착 _141 | 인간적 교류 _147 제4장 혼자 산다는 것 개인들의 시대 _155 | 고독 예찬 _159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 _164 독립 욕망 _174 | 능동적 삶과 관조적 삶 _179 제5장 사랑의 길들 대체 불가능성 _189 | 욕구로서의 사랑 _195 | 기쁨으로서의 사랑 _206 목적으로서의 개인 _211 | 불완전함을 사랑하기 _221 사랑과 인본주의 _225 제6장 개인: 복수성과 보편성 인간: 다양성과 유동성 _232 | 주형(鑄型) _236 (다시) 목적으로서의 개인 _242 | 유일한 존재 _249 나와 타인들 _255 | 인간조건 _257 제7장 가치 선택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들 _270 | 몽테뉴의 지혜 _276 라 로슈푸코의 정직함 _283 | 보들레르의 심미주의 _290 제8장 인류를 위한 도덕 제3의 길 _298 | 이중의 삶 _307 | 도덕을 위한 변론 _312 기독교 도덕 비판 _319 | 양심과 이성 _328 | 의무와 감미로움 _334 가냘픈 행복 _342 제9장 열정에의 욕구 이익의 지배 _346 | 이익과 감정 _349 | 탈중심화된 인간 _356 도덕과 종교 _365 | 도덕과 진리 _370 에필로그: 인본주의의 내기 참고문헌 인명색인 역자 후기 |
TZVETAN TODOROV
츠베탕 토도로프의 다른 상품
|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거나 모든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것은 인간학적 가설이 아니라 윤리적인 명령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추상적 인간이란 단지 비결정태와 잠재태일 뿐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확고부동하게 선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가차 없이 악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렇게 볼 때 인본주의 계보와 그저 인간을 숭배하는 그 이웃들을 가르는 뚜렷한 경계선이 있다. 인간이 전적으로 선하거나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본주의자들에게는 환상에 속할 뿐이다. 인간의 능력과 선함, 그 어느 것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 p.63
인본주의자들은 그것이 물리적 자연이든 사회적 관습이든 주어진 것의 위력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로부터의 해방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삶은 불완전한 정원이요 자율은 활짝 꽃을 피우기까지 정성 들여 가꾸어야 하는 식물이다. 자유는 (크든 작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 획득되는 하나의 결과, 즉 우리의 본성에 등재된 하나의 목표로서, 더 나아가서는 정치 제도의 최종적인 지향점이 될 수 있다. ‘나’의 자율성은 물론 부분적인 것이지만 또한 곳곳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상대적 비결정성에 근간을 둔 자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공적이고 사적인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도록 해준다. 자율은 인본주의 이념의 으뜸가는 구성요소로서, 일단 선포되고 나면 더 이상 번복될 수 없는 것이다. --- p.117-118 사후의 삶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외부에 있되 어쨌든 우리의 일부를 구성하는 존재들로서의 타인들, 그들의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이 되는 그런 존재들로서의 타인들에 기대면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삶이 단 하나뿐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그 삶이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 결정적으로 끝나버린다는 이유로, 그 삶을 숭고한 가치로 올려세우는 것이 우리의 운명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내부와 외부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 가운데, 사회성이 불멸성을 대신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인간의 위대함이 비롯되고, 아울러 인간의 비참함 또한 비롯된다. 왜냐하면 문제의 타인들 또한 우리 자신들처럼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 p.370 권위주의 체제가 보수주의와 친화적이고, 전체주의가 유토피아적 과학주의와 친화적이고, 혹은 무정부주의가 개인주의와 친화적이듯, 민주주의 체제는 인본주의 사상과 친화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러한 친화성이 정언적 요구로 작용하지는 않으며, 민주주의의 고유한 특성은 다양한 이념을 허용하는 데 있다. 단 거기에 조건이 따르는데, 그 이념 중 어느 하나도 정치권력과 일체화되지 않아야 하고 나머지 이념들의 억압과 소멸을 야기하지 않아야 한다. --- p.394 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하늘의 뜻도 마찬가지고 자연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행복은 늘 유예 상태에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인간의 ‘불완전한 정원’을 그 어떤 다른 왕국보다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있다. 그것이 차선책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p.396 |
|
[역자 서문]
토도로프의 『불완전한 정원』은 우선 그 구성과 내용에 있어 상당히 높은 등급의 소설 친화성을 띠고 있다. 16~19세기의 프랑스 지식인이 대거 등장하는 가운데, 직접화법 위주의 수많은 인용문과 더불어 책의 내용 자체가 다기한 묘사 효과를 수반한 일종의 대형 서사체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목소리와 더불어 학제적(學際的) 성격의 대형 사극(史劇)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토도로프가 흔히 언어학자?문예비평가?역사학자?철학자?사상가를 아우르는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되고 있거니와, 저자의 그런 면모 또한 이 책의 독특한 수용미학적 효과에 일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 책은 그 자체로서 보수주의, 과학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라는 네 계보 간의 팽팽한 싸움터이자 아기자기한 놀이터이다. 달리 말해,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이렇게 인간 존재를 구심점으로 하는 크게 네 갈래의 주장이 때로는 상호배타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때로는 상호보완적으로 원만하게 대질하는 현장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 토도로프는 『프롤로그』(11~12쪽)에서 이 책이 철학이 아니라 ‘사상’, 좀 더 확실히 하자면 ‘사상사’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있다. 그에 의하면 우선 철학에 비해 ‘사상’은 실천적 성격이 강하고 그 영역이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리고 항시적으로 갖은 불행에 직면해 있는 인간조건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상이 아니라 ‘사상사’에 대한 폭넓은 고찰이 더 절실하게 요청된다. 한편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인본주의’의 시초적 대립개념이 ‘신본주의’라는 점을 우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프랑스(어)에 있어서는, 일찍이 몽테뉴가 자신의 작업을 신학자들의 작업과 차별화하면서 스스로 ‘인본주의자’(humaniste)라고 자처한 것이 ‘인본주의’라는 용어의 시원(始原)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은 그 같은 2원적 대립구도를 건너뛰다시피 하고 있는바, 이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신들의 전쟁’이라는 저자 특유의 우회적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신들은 아마 다기하겠지만, 인간들은 하나다.” 바꾸어 말하자면, 오직 하나인 것이 차라리 ‘인간종’이고 그 안에서 각양각색으로 생겨난 것이 오히려 ‘신들’이다. 종교가 인류 잔혹사에서 역설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금도 부단히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는 것 또한 바로 그 같은 신들의 복수성 때문이다. 이렇듯 토도로프는-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순기능을 부정하지는 않되-지배체제로서의 신정주의와 특히 인간학으로서의 신본주의는 이 책의 출발선상에서 아예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기조 아래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이외에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우선 1장에서는 근대적 인간의 특징인 ‘자유’와 관련하여 프랑스 대표적 인본주의자들의 저술들을 고찰한다. 그리고 나서 논의 전개의 전체적 흐름이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첫째는 고독, 사랑, 우정 등 사회생활을 위협하는 요인들에 대한 고찰(3~5장)이고, 둘째는 개인의 해체 현상에 대한 심층 분석(6장)이고, 셋째는 개별 인간과 사회를 아우르는 ‘가치’의 문제에 대한 인본주의적 성찰(7~9장)이다. 이것을 역자 나름으로 요약하자면, 문제의 네 가지 사상 계보를 실천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엄밀하게 비교분석한 다음 각 계보의 강점과 취약점을 기존의 정치체제들과 결부시켜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저자가 다다르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권위주의 체제가 보수주의와 친화적이고, 전체주의가 유토피아적 과학주의와 친화적이고, 혹은 무정부주의가 개인주의와 친화적이듯, 민주주의 체제는 인본주의 사상과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인본주의에 초점을 두고 보자면, 이 책의 내용상 핵심은 물론 저자의 집필 의도까지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아래 두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책 속표지의 관례적 헌사(獻辭)와는 별개로, 저자가 아래와 같이 본문 안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 책의 ‘헌정’(獻呈) 상대를 특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1』 “이 책이 몽테뉴에서 출발하여 데카르트, 몽테스키외, 루소 그리고 콩스탕을 거쳐 토크빌에 이르는 프랑스 인본주의의 전통에 헌정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에필로그』, 387쪽) 『2』 “그런 가운데 내 나름의 각별한 소신을 미리 피력하자면, 우리가 처해 있는 조건과 거기에 따르는 난관들을 극복하는 데 있어, 근대정신의 계보 중에서도 다른 계보들보다 인본주의자들의 계보가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연유로 나는 이 책 자체를 인본주의자들에게 헌정하고 있다.”(『프롤로그』, 9~10쪽) 위 『1』에 명시된 ‘헌정’은 몽테뉴에서 출발하여 토크빌에 이르는 프랑스 인본주의를 사상사의 맥락에서 학문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본주의 ‘계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한편 위 『2』에 명시된 ‘헌정’은 인본주의를 실천적 사상의 관점에서 ‘가장 우호적으로’ 다루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본주의라는 공감대 아래 형성된 모종의 다사로운 공동체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본주의 ‘가족’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그 같은 ‘헌정’의 이면에서 인본주의를 외면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향한 저자 나름의 온기 어린 초대-내지는 절박한 호소-가 읽히기도 한다. 즉 인류의 불행을 예방하고 개개인의 행복을 늘려나가는 데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가 사유체계로서 인본주의의 저변 확장이라는 인식 아래, 저자 토도로프가 이 책 자체를 미래지향적이고 다분히 전략적인 메시지의 일환으로 삼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책의 저변에는 저자 토도로프의 삶 자체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9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유년기 및 청년시절에 겪었던 참혹한 사태들, 1963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고 나서 항시적으로 목도하게 되는 이른바 문명 세계의 또 다른 갈등과 폭력, 이 같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경험론적 성찰에 비추어볼 때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사유체계로서의 인본주의를 조화롭게 접목하는 것이 그나마 인류 상생의 유일한 해법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간에 충돌이 생기는 계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사적 영역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그가 아주 우호적으로 다루고 있는 뱅자맹 콩스탕의 주장처럼, 적어도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한 마디의 말, 한 가닥의 눈길, 한 번의 악수, 이런 것들이 모든 이성, 그리고 지상의 모든 권좌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의 말미를 이루는 아래 글이 한편으로는 종교계를 향한 일종의 경구(警句)로 읽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극도의 예찬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하늘의 뜻도 마찬가지고 자연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행복은 늘 유예 상태에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인간의 ‘불완전한 정원’을 그 어떤 다른 왕국보다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있다. 그것이 차선책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에필로그』, 396쪽) 개별 인간은 태생적으로 유동적이고 시시각각 가변적이며 선악의 양면성을 지닌 비결정성의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들이 구성하는 다차원의 다양한 공동체 또한 불가항력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이른바 ‘신성’과 같은 완전함의 신기루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떠안고 있는 다각도의 불완전성 그 자체를 신성시하는 가운데, 사유체계와 정치체제에 있어 개별 인간의 존엄성에 부응하는 점진적인 개선책을 부단히 모색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바로 이것이 종교가 본연의 순기능을 발휘하고 그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한국사회야말로 이 책 속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논쟁, 그리고 그에 대한 저자 토도로프의 치밀한 분석에 바짝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봉건사회의 유산, 일제 강점기의 잔재, 동족상잔의 전쟁 후유증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한국사회가 짧은 시기에 국제사회에 편입되어 무차별적으로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세계 최후의 유일한 분단국가로서의 위험천만한 체제갈등, 해묵은 지역갈등과 종교계 안팎의 미묘한 갈등, 근래에 부쩍 가시화되고 있는 계층갈등과 세대갈등, 국제결혼 및 외국 노동자 유입에 따른 인종갈등과 문화갈등, 최근에 또 다른 난제로 부상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정체성 갈등 등, 그 모든 갈등에 있어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모종의 점진적인 해법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14쪽) 이 책(1998년)은 그에 앞서 발표된 『우리와 타인들』(1989년)의 ‘후속판’이자 ‘완결판’이다. 그리고 『우리와 타인들』이 통상적인 편집 기준으로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심층적 전공도서에 속한다면, 이 책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두루 고급교양도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역자 또한 이 책의 번역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번역본의 가독성 및 원활한 독서 리듬을 우선시하였다. 예를 들어 각양각색의 전문 용어 및 저자 특유의 유려한 문체가 가독성을 해치거나 심지어 독자를 ‘질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나름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이 책의 번역에 있어서도 이른바 ‘불완전한 정원’이라는 말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한국어와 정반대인 프랑스어 특유의 어순, 수많은 다의어와 유의어,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맥락상의 개념 차이와 미세한 뉘앙스에 직면하여, 번역 과정에서 수시로 한계를 절감하며 수정보완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원서에 담긴 박학다식은 물론 번역을 통한 소통의 한계 때문에도, 이 번역본의 독서에 상당한 인내심과 집중력이 요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역자가 앞으로 번역상의 이 같은 ‘불완전한 정원’을 개선해 나가는 데 있어, 뜻있는 독자들의 적극적인 충고가 매우 요긴할 것으로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