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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 2. 다섯번째 질서와 여섯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3.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 4. 첫사랑 5. 달의 신부 6. 二月 荒凉的 脚步 7. 낙원빌라 8. 물의 정거장 9. 부인내실의 철학 10. 장미십자가 해설 | 재와 불꽃의 시간 사이에서 떠도는 여자들_박혜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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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鏡潾, 본명:안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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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굳이 사랑하면서 살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열정이 없을수록 삶은 더 선량해지는데...... 사랑 없이 못 사는 사람과 사랑 없이 사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
무숙은 스탠드를 끄고 그의 셔츠를 쥐고 잠자리로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깜깜한 어둠을 더듬어 셔츠의 소매 부분으로 눈을 가렸다. "나도 그럴게. 당신이 주는 건 뭐든지 받아들일게. 그럴게......" 늘 웅크리고 잤던 무숙은 아주 오랜만에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웠다. 그러자 등이 곧게 펴졌다. 얼린 솜을 채운 듯 시리고 아팠던 등뼈들이 풀리며 척추를 타고 온기가 올라왔다. 무숙은 목에 힘을 빼 머리를 툭 떨어뜨리고 두 팔을 활짝 벌려 십자가 형태로 누었다. 새하얀 구름이 이는 듯한 포근한 몸 속으로 옆방의 노랫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오고 창가의 오리나무 가지 위에 새가 알을 품고 다그락다그락 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 속의 노란자위들이 날개가 되는 모습까지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줄 몰랐어요. 당신 손을 잡고 당신 눈길을 따라가느라,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진 줄도 몰랐어요. 날개라도 달린 듯..... 그런데, 당신은 없고 이렇게 높고 외딴 곳에 나만 남겨졌어요. 세상은 나를 향해 일제히 불을 꺼버렸는데, 나 혼자 어떻게 내려가나요?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내가 한 발도 못 움직일 거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 pp. 260∼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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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돌아와 수첩을 펴고 전화번호를 꾹꾹 누른다. 다음 달부터 자동이체를 할 거예요. 그 남자의 사진을 매달 한 장씩 이 주소로 보내주세요. 사진에 날짜가 자동으로 박히는 것으로요. 그쪽에서는 걱정 말라고, 자신들의 완벽성을 믿으라고 말한다. 죽기 전에는 결코 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이런 경우에 만에 하나 도주라도 하게 되면, 그날로 자기들은 사업도 끝장이고 줄줄이 감옥행이라고. 나는 수긍한다. 그들의 불법성이 그들의 신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내가 그 남자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항상 명심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요.
나는 해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서 보내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인내한다. 손가락이 끝나면 발가락을. 그리고 이십 년이 흐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해둔 약속 정도로 인내해야 한다. 천년 동안 천 명의 처녀를 삼킨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할 때는 차갑고 단단한 여의주를 물고 날아간다. 그리고 영원히 피의 살해는 끝난다. 나도 그때쯤은 내 날카로운 이빨을 박을 돌을 찾을 수 있을까. --- pp. 216∼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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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생, 조각난 삶을 향해 거는 주술과도 같은 소설들
전경린에 의하면 일상은 무수한 바느질 자국을 숨기고 있는 조각보 같은 것이다. 삶은 곧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는 이음매를 따라 자신의 매무새를 멋지게 봉합할 줄 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바로 이 조각보의 봉합선을 뜯는 것, 그럼으로써 바느질 솔기를 드러내는 것. 바로 그때 삶은 자신이 숨기고 있던 또다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 신수정(문학평론가)
위태로운 생, 조각난 삶을 향해 거는 주술 소설가 전경린의 세번째 소설집 『물의 정거장』이 출간됐다. 1998년 『바닷가 마지막 집』 이후 5년 만에 출간된 이 소설집에는 1999년 21세기문학상을 수상한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을 포함하여 총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상처와 황홀, 불행과 활기, 사랑과 슬픔, 결핍과 빛, 권태와 불륜, 영혼과 눈물, 유랑과 귀향…… 전경린의 소설은 여전히 같은 욕망과 열정으로 여성의 삶을 관통해나간다. 문학평론가 박혜경은 해설에서 "전경린의 소설을 읽는 것은 종종 금기의 위반을 향해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어떤 위태로운 열정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주인공들을 사로잡는 그 열정을 단순히 묘사하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바탕에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제기하려는 적극적인 몸부림이 있다. 여자 주인공들이 그녀들의 억눌린 성적 욕망이나 자신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은, 여성이 누리는 안락하고 평온한 일상을 담보로 강요되어온 제도적 삶의 허구성을 자각해가는 과정과 겹쳐 있다. (……) 그 때문에 전경린의 소설에서 여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일탈된 성의 현장은 때로 그녀들이 제도적 삶과 싸우는 치열한 격전장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아마도 작가는 여주인공들에게 주어진 제도화된 몸의 금기 혹은 몸의 윤리를 위반하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통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와 관련된 매우 불온하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우리 앞에 던져놓으려는 듯하다.('해설' 중에서) 이는 "나의 소설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지극히 완강하고 평범한 삶의 구조 속에서 좀 끔찍하게 피워올린 찬란한 무지개 같다"는 저자의 말과도 상통한다. 전경린 소설이 담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녀의 소설들이 지니는 매혹적인 문체와 더불어 우리 시대의 한 소설적 개성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견딜 수 없이 무모하고 민감하고 가벼운 고통, 그 경계를 넘는 마법의 언어 작가의 이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물의 정거장』 또한 결혼 혹은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만성적인 존재의 결핍감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여성들의 황량한 내면 풍경이 밑그림을 이룬다. 제도 안쪽의 삶과 바깥쪽의 삶이 길항하는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접경지대에서 결핍과 갈망으로 뒤척이는 여성들의 모습 역시 선연하다. 제3회 21세기문학상 수상작인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은 몸이 공중에 뜨는 여자인 여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단장 최모와 함께 '섬'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최모는 "정처없고 황량하고 불안해 보이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여자의 영혼을 지닌 남자 류를 사랑한다. 류와 여자를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최모는 여자와 류의 사랑을 용납하지 못하고 결국 여자는 모두가 떠나간 섬에서 일본원숭이, 타조, 불곰, 표범 들과 함께 우리 속에서 팔려갈 날을 기다린다. 사랑을 잃은 여자의 머리카락과 손가락과 입술엔 이미 거미줄이 처졌고 눈꺼풀 위엔 부연 먼지가 덮여 있을 뿐이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이 결혼과 가족이라는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 생의 욕망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간 여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면, 「부인내실의 철학」은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결혼 외의 다른 관계를 꿈꾸는 여자의 삶을 보여준다. 주인공 희우는 고위공무원인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와 강압적인 성 요구에 극심한 고통과 환멸을 느껴왔다. 그 고통은 "당신은 누구세요? 그리고 나는 누구예요"라는 자신의 자아정체감에 대한 심각한 혼란마저도 가져온다. 그러나 이러한 환멸과 혼란 속에서 그녀는 이혼을 하거나 집을 떠나는 대신, 기윤이라는 유부남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진다. 희우에게 탈출구이자 보호막으로 존재하는 기윤은, 그러나 역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남편과 다르지 않다. 다만 "아내를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을 뿐이다. 유일하게 남자 화자가 등장하는 「바다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의 경우에도, 제도적 삶에 대한 거부와 그 삶이 끌어당기는 정서적 인력 사이에서의 심적 갈등은 여전하다. 마흔 살의 남자 주인공은 선을 통해 묘한 분위기의 화련을 만나 혼란스럽고 위태롭고 정열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뻔뻔한 거짓말과 변덕, 공모와 성적 일탈로 만연한, 열정적이지만 피곤한 사랑 뒤에는 직장 상사와의 오래된 부도덕한 관계가 있었고, 그들이 주인공의 혼란과 방황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모험도 없고 혼란도 없고 격정도 없고 실패도 없고 갈등도 없고 이별도 없는" "한결같고 따스하고 잔잔한 풍경화 같은 결혼"을 선택하게 된다. 「다섯번째 질서와 여섯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에는 "두 아이를 낳았지만 부부간에 한 번도 키스를 하지 않아" 이혼을 꿈꾸는 금주가 등장한다. 이혼 후 여행을 떠난 그녀는 십여 년 전의 첫사랑 이한에게 연락한다. 스물한 살 때의 이한은 금주와의 첫키스 이후 급속도로 멀어져갔었다. 그 키스의 기억은 "오래 고인 물처럼 무겁게 가라앉았을 그녀의 삶에, 늘 새롭게 생성되어 공기 밖으로 퐁퐁 날려가는 청신한 기포같이 존재해왔"으며 그녀의 삶을 유지하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 욕망의 발자취를 좇아온 그녀 앞에서 이한은 자신의 연인, 냉정하고 차갑고 까다로운 남자, 유경과의 사랑을 아프게 고백한다. 「낙원빌라」의 휘양은 강간으로 암시되는 어떤 사건에 의해 남편과 아이들, 가정 안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버린 무의미한 시간을 살아간다. 그녀가 찾아들어간 곳은 '낙원빌라'. 십팔 평 빌라와 저녁 급식이 삼 년간 무료인 대신 그녀는 매일 원장에게 전화로 무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보고할 내용이 없을 때에는 원장의 요구를 한 가지씩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을 잃은 채, '감금자'에 대한 증오만으로 살아가던 휘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 밖에 어린 죽음을 통해서 지켜낸 하록의 사랑과 절름발이인 사촌언니가 평생 지켜낸 사랑을 대비한 「첫사랑」은 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사랑의 순간과 의미를 보여주며, 숯을 구우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 정과 '늑대여인' 간의 사랑을 우화 형식으로 그린 「달의 신부」는 여자와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남성의 가부장적 욕구와 자아를 찾으려는 여자의 욕망으로 인한 불화, 그리고 그것이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문제적으로 나타낸다. 「二月 荒凉的 脚步」는 남편의 파산과 폭력으로 파괴된 집을 떠나 여행을 떠나는 여주인공의 기약 없는 방황을 보여주며, 「물의 정거장」은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 뒤에 오지 않을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고독과 쓸쓸함을 그리고 있다. 전경린의 그녀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근원적으로 거부하거나 혹은 가정이라는 틀에서 강제로 지워져버린 여자들이다. 가정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뿌리내릴 삶의 자리 없이, 그 허무와 고통, 여성이라는 이름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내는 여자들. '여성임'을 부르짖은 이 치열한 자의식은 『물의 정거장』 속에서 전경린 특유의 섬세하고 미려한 문장과 함께 그녀의 소설들을 팽팽한 긴장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