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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_007
옮긴이의 말 _287 |
Philippe D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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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재능이 필요했다. 이 세상에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역시 재능이 없는 부류에 속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마치 저편 기슭의 단단한 땅 위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것도 잡을 게 없어 물속에서 계속 허우적대고 있는 망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 태어날 때부터 최소한의 재능도 부여받지 못했다면, 아무리 물고 늘어져봐야 부질없는 일이었다. (…) 십오 년 동안 그는 자신의 수업에서 빛을 발한 학생들, 선택받은 학생들을 불과 두세 명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드넓은 대양의 작은 물방울 몇 개. --- p.20~21
그가 딛고 있던 벽이 조금 허물어지면서 부서진 돌들이 허공으로 떨어져내렸다. 가능한 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그는 암벽에 최대한 몸을 바짝 붙이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나이가 드니 겁도 많아지는군, 그는 바르바라의 시신을 향해 다가가면서 생각했다.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겁이 생기는 거지. --- p.31~32 그는 몇 초 동안 그녀를 주시했다. 길고 풍성한 검은 머리, 단호하고 빛나는 시선, 창백한 입술, 먼저 칼자루를 쥐어보겠다고 섣불리 나서선 안 되었다. 몇 시간 전에 그는 바르바라 어머니의 여리고 하얀 손목을 잡았었다. 그런데 그 장면이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다시 펼쳐지면서 그는 대화의 끈을 놓쳐버렸다. 마치 발을 헛디뎌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 p.38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 법이었다. 낙관주의라는 결함이 없는 사람은 결코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인내를 가지고 겸손하게 산에 오르는 사람은 결국 정상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의 힘을 속단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적수이기 마련이었다. (…) 짐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녹초가 되는 법이 없다. 희망으로 배불린 적 없는 사람은 굶어 죽지 않는다. --- p.75 조심성 없이 모험에 몸을 맡긴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그는 이번 모험을 성적인 측면에서 지금까지 최고의 연애에 속한다고 주저 없이 분류했다?이 연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가늠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앞에 서 있었다. --- p.84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자기 몸에서 징후를 보이고 있는 증상에 관해 더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리프란 두세 알을 먹어둘 필요가 있었다. 부모를 너무 일찍 여읜 경우 폐단은 인생의 입문 수업이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른 채 방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개념들이 전달되지 못하고, 많은 정보들이 결여되었다. 많은 감정들이 분류조차 되지 못했다. --- p.112 아이러니는 그가 자신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로 수천 페이지를 까맣게 메웠다는 사실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그의 작품 속 수많은 인물들이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그 주제에 관해 정확히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 p.187 그는 자신들이 뭔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상실을 멈출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 이윽고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몇 방울 흘렸다. 그러고는 그에게로 몸을 돌려 그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교차시켜 온몸으로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가 어떤 심정일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음울한 세월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 p.218 문학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이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닫게 될 때까지 품어왔던 그 미친 열망에 대해. --- p.234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결말로, 스릴과 긴장 효과를 낳는 데 실패한 레퍼토리로 끝을 내는 재주, 뜨내기 손님들을 상대하는 얄팍한 상술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략으로 멋모르는 독자들을 낚으려 하는 그런 재능. 얼마나 자만이 넘치고 얼마나 눈이 멀어야 그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잡지 저 잡지에서 그런 형편없는 문학을 얼마나 선전해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작가의 작품의 경우, 얼마나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게 다른 작품들을 모방한 흔적들이 배어 있는지 한눈에도 훤히 보이지 않는가? --- p.2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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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신선한 통찰로 시작해 끝내 폭발하는,
문체와 톤, 이야기, 서스펜스……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놀라운 소설. _리르 53세 문예창작학과 교수 마르크. 좋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창작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무력함을 자각하고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소설가가 되기를 깨끗이 포기하고 나니 도리어 씁쓸함도 스며들지 않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통찰도 뛰어나서, 첫 수업에서부터 독설에 가까운 냉철한 충고로 학생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나보코프, 윌리엄 사로얀, 마르그리트 뒤라스, 필립 로스 등 그의 눈엔 훌륭한 작가도 많지만, 거짓으로 부풀려진 작가들이 더 많은 듯하다. 그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강의 시간에 그는 엉터리 작가들과 비평가들, 문학 뒤에 숨어 독자를 희롱하는 사기꾼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진정한 작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수의 몇 사람만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곧 문학을 ‘하는’ 대신 ‘가르치는’ 일에서 나름의 장점을 발견했다. 바라는 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 없다면 그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라도 만끽하고자,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여학생들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날도 마르크는 파티가 끝난 후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그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다. 그들이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는 충격이나 공포에 휩싸이기는커녕 너무나 기계적으로, 자신의 직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성가신 일’에 말려들지 않을 궁리부터 한다. 결백하다고 해서 경찰을 불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학생과 잠자리를 한 사실을 자백해 경기가 불안정한 요새 같은 때 실직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자동차에 “햄처럼 차가워진” 시신을 싣고 깊은 산속 수직 동굴 아래에 유기한다. 일말의 망설임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듯하다. 그는 그 깊고 어두운 동굴 옆에서 조용히 담배 한 대를 피워 물 뿐이다. 그의 앞에 매력적인 여자가 나타난다. 그동안 숱한 관계를 맺어온 여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비슷한 또래의 성숙한 여자.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실종 상태인 여학생, 바르바라의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하지만 불과 수일 전 자신이 저지른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행동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 마르크는 태연하기만 하다. 시신을 유기하던 날 아침 집에서 친누나 마리안을 마주쳤을 때도, 바르바라의 행방을 수사하러 온 경찰을 대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생들과 가벼운 관계를 즐기기 시작한 후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그가 철저하게 지켜온 ‘안전 수칙’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을까. 그는 미리암에게 바르바라는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라며 천연덕스럽게 칭찬을 늘어놓고, 걱정하는 미리암을 격려한다. 그리고 곧 마르크는 그동안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매력의 미리암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그 관계가 그동안 자신을 지켜온 안전 수칙을 한순간에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해도, 그의 행적을 지켜보는 학과장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교수 자리만큼이나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로서는 정의할 수조차 없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 정신과 육체의 격렬한 흥분…… 미리암을 향한 정염이 강렬해질수록 친누나 마리안과의 관계도 한층 복잡해진다. 계속해서 의혹을 자아내던 마르크와 마리안의 관계는 불쑥 끼어드는 과거 기억의 단편들을 통해 차츰 윤곽을 드러내고, 그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하나의 퍼즐을 완성해나가며 파격적인 진실이 베일을 벗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던 이야기는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마침내 폭발한다. 『파문』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독자는 느닷없이 린치를 당한 기분이 들 것이다. 작가는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인물의 의식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도 냉담하고 시니컬한 문체로 사건의 충격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하지만 첫 장을 열고 불과 10여 페이지 만에 쏟아내기 시작하는 이 사건들은 고작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소설이 전개될수록 상황은 더욱 극한으로 치닫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연쇄적으로 드러난다. 긴박감을 더하는 작가 필립 지앙의 과감하고 노련한 생략 기법,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유려하고 적확한 심리묘사, 감각적인 문체 덕분에 독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자꾸만 깊고 검은 심연으로 파고들어가는 마르크라는 안티 히어로를 좀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앞에 서 있었다. 그 심연의 존재는 그가 쥐고 있는 진정한 으뜸패였다.” 주인공 마르크는 사회적인 규범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공공장소에서의 흡연, 음주운전, 제자들과의 은밀한 관계 등 온갖 금지된 행위들만을 일삼던 그가 이번에는 시신을 유기하고,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시신을 유기한 학생의 의붓어머니에게 강렬한 정염을 품게 된다. 그의 수업을 듣는 또다른 여학생 아니는 사무실까지 찾아와 집요하고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한다. 더욱 처신을 조심해야 할 때이지만 이런저런 비겁한 이유로 마르크는 그녀를 단칼에 뿌리치지도 못한다. 결국 교수로서 부적절한 행실을 지적해온 학과장 리샤르가 구조조정을 들먹이며 그의 숨통을 죄어오고, 아니의 아버지가 고용한 사람들이 학교까지 찾아와 그에게 테러를 가한다. 그가 위기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스스로 불안을 느낄 때마다 그의 머릿속을 엄습해오는 생생한 이미지들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조금도 빛바래지 않은 또렷한 장면들. 바르바라의 시신을 유기한 직후에도, 완전범죄를 위해 수직 동굴에 다시 찾아갔을 때에도, 치한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던 날에도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공포에 떨던 끔찍한 나날,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려던 잊고 싶은 장면이 기억의 심연에서 여지없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르크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을 간직한 인물이자, 어쩌면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깊은 상처와 불안을 스스로 보듬을 줄 모르는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는 당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들은 손쉽게 회피하고 망각하려 애쓰는 듯하다. 정작 자신을 옭아매는 것은 깊고 어두운 시간 속의 그 무엇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여러 갈등을 그저 심연 안에 시체처럼 쌓아두면서 오히려 그 심연만이 자신의 으뜸패라고 믿는다. 작가가 드문드문 드러낼 뿐인 인물, 그래서 독자 스스로 채워야 할 수많은 맹점들 속에서 그저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을 발견할 때, 파국을 맞는 안티 히어로를 보며 통쾌한 감정보다 처연한 마음이 먼저 들 때, 비로소 그를 무자비한 사건들 속에 던져놓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평 필립 지앙은 도깨비 같은 작가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을 사로잡혀 손 놓고 싶은 순간에도 헤어날 수 없고, 발버둥쳐봐도 결국엔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 _르몽드 극도로 세련되고 뛰어난 줄거리, 구성, 작법. 전체를 조직하는 유려하고 완전무결한 능력. _텔레라마 음울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소설. 허구를 구성하는 장치와 짜임, 그리고 특히 문체와 이미지들, 번개처럼 빠르고 강력한 반전들을 이끌어내는 역량에 관한 한 필립 지앙에 견줄 만한 작가는 없다. _누벨 옵세르바퇴르 한 대학교수의 시련과 고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족 추리소설. 필립 지앙은 한정적인 배경과 소재를 가지고도 근원적이고 흥미진진한 우주를 끊임없이 창조해낸다. _레쟁로퀴티블 이 소설 속에서 필립 지앙은 단순한 재주만으로는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천부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한다. 『파문』이야말로 그런 신의 은총을 받은 작품이다. _르마탱 문학에 대한 신선한 통찰로 시작해 끝내 폭발하는, 문체와 톤, 이야기, 서스펜스……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놀라운 소설. _리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