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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 중국 능지형의 연구가 한국 형벌의 역사연구로 이어지길 바라며
옮긴이 서문 / 사형제 폐지와 동아시아 형벌의 역사 제1장 왕 웨이친의 처형 전환점 사형의 한 형태로서 능지형 대중적 상상 속의 능지형 비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능지형 동양적 고문과 서구의 상상 타이밍의 속임수 사진과 수사학 그림 1 왕 웨이친 처형 절차의 첫 번째 국면 그림 2 윌리엄 호가스, 잔혹성의 보상(1751) 그림 3 교형, 교수형을 보여주는 중국의 담채화를 개작한 유럽 초기 작품 그림 4 중국의 영토 분할을 재현한 우편엽서(1900년 추정) 제2장 명청시기 중국의 형법 육형 사법적 고문 사형 가학적 처형 극형의 집행 그림 5 긴 곤장을 가지고 매질을 집행하는 법정의 포졸 그림 6 무거운 칼을 쓴 죄수 그림 7 심문 중인 죄수에게 수갑, 장판, 협곤을 보여주는 장면 그림 8 왕기의 『삼재도회』에 선정된 명대 고문기구 삽화 그림 9 참형을 집행하려고 하는 두 명의 회자수 그림 10 명대 후기 소설에 묘사된 능지형의 처형 장면 제3장 능지형의 기원과 그 정당성의 문제 의미론적 수수께끼로서의 능지 능지형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 조례에서 법령으로 혹형에 대한 윤리적 도전 성과 그림 11 중국: 천번의 절개에 의한 죽음 제4장 명대의 능지형 물을 위로 거슬러 올리기 『어제대고』 언제나 부족한 형벌 『대고』 1편과 속편에서 황제의 능지형 사용 『대고』 3편에서 황제의 능지형 사용 홍무제의 판결에서 능지형의 중요성 홍무제가 남긴 유산 제5장 죽은 자를 고문하기 상상계의 유사성 『옥력』 지옥을 재현하기 지옥의 형벌 절단의 가시성 공포정치 죽은 자의 유토피아 그림 12 초강왕의 법정 그림 13 송제왕의 법정 그림 14 염라천자의 법정 제6장 서구적 관념 속의 중국적 고문 중국적 사법체계에 대한 초기 관찰 중국의 정치에 대한 계몽주의 논쟁과 육형의 문제 ‘동양적 전제주의’와 혹형에 대한 상상 중국, 고문, 그리고 19세기 제국주의 ‘고통받는 인간성에 대한 번민’과 회화 전통의 발전 사실적 기준 수립: 『대청율례』의 번역 중국의 재판과 중국과 영국의 충돌 진보주의 시대의 중국적 형벌 영국과 프랑스가 승리한 이후 중국 사법제도 묘사 ‘동양’의 고문, 필수불가결한 잔혹성? 세기말적 관점 뒤섞인 유산 그림 15 고관을 매질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그림 16 벌거벗은 채 쇠꼬챙이에 묶여 고문받는 여성 그림 그림 17 윌리엄 알렉산더 「차의 형벌Punishment of the Tcha」 그림 18 손가락 고문 그림 19 교수형과 창자 꺼내기 그림 20 판자에 다리 못 박기, 몸 두 동강 내기[腰斬], 절단형 그림 21 고문 그림 22 남경에서 효수된 죄수의 머리 제7장 능지형에 대한 잘못된 해석 조직적 처형 일상적 처형 공포의 처형 모범적 처형 그림 23 중국의 처형(Supplice Chinois) 그림 24 1904년 베이징, 왕 웨이친 능지형 처형장의 회자수와 구경꾼들 그림 25 ‘능지’라는 단어가 새겨진 목판화 그림 26 능지형이 합법적 형벌임을 보여주는 능지형 목판화 제8장 조르주 바타유의 해석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이다’ 누가 『에로스의 눈물』을 썼는가? 사드인가, 로욜라인가? 고통의 가면 뒤: 누구 있어요? 그림 27 1905년 4월 10일 집행된 푸주리의 능지형 그림 28 ‘가짜 푸주리’의 능지형 그림 29 면도하지 않은 머리의 특징을 보여주는 죄수 그림 30 능지형 희생자의 머리 부분 삽화 그림 31 성 세바스찬의 머리 부분 세부 제9장 맺음말에 대신하여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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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가을, 왕 웨이친(王維勤)을 처형장으로 데리고 가는 행렬은 베이징 성내에서 시작해 선무문(宣武門)을 지나 남쪽 ‘채소시장 입구(菜市口)’로 알려진 큰 시장 교차로까지 이어졌다. 중년 남자인 죄수는 북양군(北洋軍) 분대에 속해 있던 병사들과 함께 방책이 쳐진 수레를 타고 도착했다. 형부(刑部)에서 파견한 관리들도 이 행렬과 함께했다. 이 쌀쌀한 아침, 형부 관리들의 임무는 날이 밝기 전 교차로 옆에 미리 설치해 놓은 차양 아래에서 죄수 처형 절차를 감독하는 일이었다. 죄수를 처형하기에 앞서 형부 관리 한 명이 그의 범죄를 청(淸) 왕조의 대법전인 《대청율례(大淸律例)》에 정한 죄목과 언어를 사용하여 읽었다.
청 정부가 법의 테두리 내에서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을 보려고 모여든 병사 무리와 구경꾼들 앞에서 왕 웨이친의 처형이 시작되었다. 병사 두 명이 바구니와 처형할 때 쓸 칼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다른 병사들은 죄수의 몸 상체가 사형집행인-즉, 회자수(?子手)-과 그의 조수에게 완전히 드러나도록 죄수의 옷을 벗기고 변발을 삼각대에 묶었다. 회자수가 죄수의 가슴 부위부터 시작해 이두박근과 허벅지 살을 차례대로 조각조각 도려내기 시작했다. 살을 저미는 작업 도중에 회자수가 신속한 손놀림으로 왕씨의 심장을 단번에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러고 나서 계속해서 차례차례 왕씨의 사지를 절단했는데, 처음에는 팔목과 발목, 그다음으로 팔꿈치와 무릎, 마지막으로 어깨와 엉덩이 부분을 잘라내었다. 숙련된 회자수는 죄수의 신체 부위를 서른여섯 개 남짓-이 숫자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으로 나누어버렸다. 회자수가 임무를 다 끝내고 나더니 관리들 쪽으로 몸을 돌려 소리 지른다. “샤런러! 사람을 죽였다!” 조수가 칼을 모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다시 집어넣자, 기다리던 힌 두루마기를 입은 장의사들이 앞으로 나와 신체 조각들을 모았다. 그것들을 채소시장 남서쪽에 있는 공동묘지로 가지고 가서 비석 없는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처형 조항에는 대중의 조롱거리로 삼도록 참수된 죄수의 머리를 저잣거리에 걸어놓을 수 있다는 보조 규정이 있지만, 왕씨의 판결문에서는 이 마지막 모욕은 면제받았기에 장의사들은 그의 머리도 가져갔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땅에 흘린 피뿐이었고, 이것마저 곧 먼지에 덮여 그 흔적조차 사라질 것이다. 관리 한 무리와 수행원들이 회자수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내로 돌아갔다. --- pp.2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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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한국 독자들이 한국의 정치ㆍ법제사 연구와 관련한 질문들을 제기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면, 『대명률(大明律)』을 조선 법률의 근거로 삼은 태조 이성계도 명청시기 중국이 그랬듯이, 조선 법률에서 능지형에 유사한 지위를 부여했는가? 만약 그러했다면, 조선 왕조 전반에 걸쳐서 형벌로서 능지형은 실제로 집행되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1812년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주모자 9명이 능지처참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모든 ‘능지처참’이 능지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 죄수들이 왕조를 전복하려는 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정말로 능지형이 집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이와 유사한 사례를 70년 후 19세기 말 개화파 지식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을 국내에서 육시(戮屍)의 형벌로 절단했던 것이다.
그런 의문들을 연구해 보는 흥미로운 작업을 통해서 한국사에서 처형의 의미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형벌 문화, 더 나아가 중국 문화와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중국 능지형의 역사를 연구할 때 중국 외부의 역사를 도외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처럼, 동아시아 처형의 역사를 연구할 때 동아시아 지역의 서로 다른 문화들이 어떻게 형벌을 인식하고 형벌 집행에 반응했는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작업은 역사적으로 교훈적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서 공통적인 형벌제도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런 제도가 존속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는 데 공헌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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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잔혹성의 신화, 동양의 야만인가 서구의 상상인가?”
- 중국의 고문과 처형의 역사, 이미지, 그리고 그 법률적 맥락을 추적한 최초의 책! 1904년 베이징의 한 광장에서 수많은 구경꾼 무리에 둘러싸여 한 대가족을 살해한 살인자 왕 웨이친이 처형되었다. 그는 능지라 불린 극형으로 처형된 마지막 사형수들 중 한 사람이었다. 서구인들이 ‘천 번을 절개해서 죽임(death by a thousand cuts)’ 혹은 ‘살을 저며서 죽임(death by slicing)'이라고 부른 이 형벌은 전근대 중국에서 최악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독특한 비교사 연구 방법을 채택한 이 책은 10세기부터 능지형이 폐지된 1905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고문과 처형의 역사, 이미지, 그리고 그 법률적 맥락을 추적한 최초의 책이다. 그러고 나서 저자들은 서구적 상상에 나타난 ‘동양적(oriental) 고문’으로 관심을 돌려 심도 있는 연구를 했다. 근대 초기의 유럽인들은 자주 중국의 제도를 이성적인 것으로 묘사한 반면, 19세기와 20세기의 독자들은 은밀한 호기심에서 능지형 사진을 보고 즐겼으며, 또한 그것을 도덕적 타락의 증거로 여겼다. 전제 정부와 연관된 유럽의 관행, 기독교적인 순교의 원리, 그리고 황홀경적 고통의 측면에서 다양한 저작들을 살펴봄으로써, 저자들은 중국적 잔혹성의 전형을 폭로하고, 서구가 ‘다른 세계’의 문명들과 접촉할 때마다 보여준 매혹과 혐오가 뒤섞인 특유의 경향을 철저하게 파헤친다. 강렬하면서도 더욱 깊이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이 책은 국가가 국민 개개인을 고문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인간이 정치적 목적으로 훼손된 육체의 상징을 악용하는 다양한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 ‘능지처참’ 유린당한 신체, 야만성의 동양적 아이콘 "능지형이 본래 ‘문화적으로’ 중국적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중국의 오랜 법률 전통 내에서 행해진 형법상의 고문을 중국 내부와 외부 양면에서 바라보는 것" 이 책은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처형, 즉 반역죄나 부친살해죄 같은 중죄를 처벌하는 능지(凌遲)라 불리는 절단형을 탐구한다. 우리에게도 능지처참이라는 용어는 극형의 동의어로 낯설지 않다. 사육신, 홍경래 난의 주모자들이 육체가 조각나 저자거리에 따로 묻히거나 사체를 전국 각지에 보내지기도 했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권력이 범법자의 육체를 매질하거나 절단하는 것이 정당화되던 시대에 출현한 극단적인 형벌이었다. 중국의 법학자들은 능지형이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 오랑캐의 형벌이라 한다. 이민족인 거란족의 형벌에서 도입되었다 하더라도 능지형은 정통왕조인 명대의 주원장과 이후 황제들에 의해 더욱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반역자처럼 심각한 죄인을 상징적으로 처벌하는 형벌이었는데 청대에 와서는 가정범죄(부모살해)에도 적용하는 등 일상화되었다. 왕 웨이친의 처형은 이 책에서 전개될 논의의 가장 적절한 출발점이다. 선정적으로 시작하였지만 이는 그 선정성을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왕 웨이친의 잔혹한 처형 장면은 단순히 능지처참의 화려한 재현을 위해 필요한 장치가 아니다. 왕 웨이친의 처형은 20세기 초 능지형이 폐지되기 직전 거의 마지막으로 집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묘하게도 그 끔찍한 장면이 서구인들에 의해 사진으로 촬영되었다. 그러고 나서 능지형은 곧 폐지되었고 중국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사진으로 남은 능지형의 이미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중국사적 맥락을 이탈하여 국경을 넘어 서구 사회를 떠돌면서, ‘중국적 잔혹성’ 혹은 ‘동양적 야만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다시 재생산되었다. ‘천 번을 절개해서 죽이는 형벌(death by a thousand cuts)’이라는 (부정확한) 어구의 이 형벌은 서구에서 ‘아시아의 잔혹성(Asiatic cruelty)’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왕 웨이친의 처형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으며,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능지처참의 형벌이 정말 동양인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것이 정말 처형 전에 희생자를 고문하고 가능한 한 오래도록 희생자의 고통을 지속하기 위해 고안된 형벌이었는지, 그 해답을 찾아 나선다. 저자들의 임무는 전근대 중국의 법률이 한때 허용했던 것과 국제적 기억이 보존해 왔던 것 사이의 이상한 관계를 양쪽 모두 고려하면서 능지형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능지형이 본래 ‘문화적으로’ 중국적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중국의 오랜 법률 전통 내에서 행해진 형법상의 고문을 중국 내부와 외부 양면에서 바라보는 것쳀다. 특히 국제적 기억의 측면에서 볼 때, 능지형의 이미지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기에 서양의 기호체계 속에서 어째서 그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을까, 그것이 어째서 현재까지도 서양의 상상 속에 출몰해 왔으며 지금은 중국적 상상 속에도 앙시앵레짐의 기억으로서 남아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도전이었다. 저자들은 20세기 유럽에서 생산된 이미지로부터 중국의 법률제도와 연관된 몇 세기에 걸친 중국과 서구의 수많은 자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거-법률, 정치, 역사, 문학, 사진 등-를 참조하면서 대중적 관심 사항에서 시작하여 학문적으로 심화시켜 간다. 이 책의 전반부는 중국 형벌의 역사를 다루고, 후반부는 주로 중국의 처형에 대한 서구의 집착을 다룬다. 세부적으로 보면 2장에서는 중국의 형벌의 역사를 개관하고 3,4장에서는 요대(遼代)와 송대(宋代)로 거슬러 올라가 능지형의 불분명한 기원을 추적하고, 명청대(明淸代)에 와서 능지형이 꽤 빈번해졌던 배경과 내용을 살펴본 다음 20세기초 능지형이 폐지되는 과정까지를 밝혀본다. 5장에서는 중국의 종교적 상상에 나타난 육형과 육형의 민중적 수용을 고찰한다. 책의 마지막 세 장은 중국의 육형에 대한 서구적 해석의 역사를 살펴본다. 서구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 이상의 실체를 가지려면 이 책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모두 필요하다. 이 책은 서구의 상상으로부터 중국의 제도로 거슬러 올라가, 단지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 이외의 다른 지역의 형벌의 역사를 포괄하는 형벌의 세계사라는 더 큰 맥락에 놓고 보기를 권한다. 이는 문명의 스펙트럼 양 극단에서 현상을 고립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많은 지점들에서 현상을 볼 수 있게 한다. -고통 받는 육체의 포르노그래피, 이미지의 정치학 “오독의 역사, 서구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왕 웨이친의 처형 장면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한 프랑수아 다미앵의 악명 높은 처형을 상기시킨다. 푸코가 이 책의 서장에서 생생하게 재현해낸 프랑수아 다미앵의 가학적 처형 장면을 잊지 못하겠지만 만약 그 처형 장면을 카메라를 가지고 누군가 기록하였다면 유럽의 역사가 어떻게 다시 쓰였을까? 이 책이 오래전에 폐지된 동아시아의 한 형벌을 다루면서도 현재의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너무도 충격적인 형벌의 이미지에 있다. 처형 장면을 찍은 사진만큼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은 없지만, 사진 외에도 이 책에 실린 다양한 형벌의 이미지 대부분이 서구에서, 또는 서구인을 겨냥해 중국에서 생산된 것이다. 형벌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동아시아 형벌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서양문화사의 일부가 된다. 19세기를 전후로 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방문한 서구인들이 크게 늘었다. 이 이방인들에게는 토착문화의 금기나 성역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관음증적인 탐욕스러운 눈길 아래 우리가 전통이라 부르던 것이 시대착오적인 야만으로, 가학적인 도착증으로 전락했다. 능지형의 역사는 유럽 식민주의가 낳은 문화적 페티시즘이다. 제국주의가 조장한 관음증적 충동의 산물인 이 페티시즘은 사진의 힘에 의해 강화되고 왜곡되었다. 능지형은 수많은 경멸적 이미지들-아편, 전족, 고두, 우상숭배 등 중국을 과거와 현재가 뒤바뀐 위험한 나라로 여기게 만드는 대상들-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조작될 수 있다. 요점은 중국에 이러한 관행들이 존재한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환상을 중국의 현실로 다시 썼던 서구우월주의의 수사학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이 책이 평범한 능지처참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왕 웨이친의 처형으로부터 중국 형벌의 역사를 거쳐, 지옥의 형벌을 묘사한 《옥력》이라는 종교적 텍스트로 우회한 후, 유럽에 널리 퍼진 ‘중국적 잔혹성’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혼란스러운 지식과 오류의 계보학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쳐, 종국에는 다시 능지형 처형으로 되돌아간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20세기 초 처형 장면을 찍은 문제의 사진이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라는 반항적 지식인의 눈에 띄었고, 그는 그 사진을 다른 이미지들과 함께 에로티즘을 다룬 저서 《에로스의 눈물》(1961)에 실었다. 이 책의 말미에서 다루는 능지처참은 바로 이 《에로스의 눈물》에 실린 이미지다. 서두의 능지처참은 중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재현되고 있지만, 결말의 능지처참은 중국의 역사적 맥락과 완전히 분리되어 서구 대중문화와 지성사의 일부로서 읽히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의도한 것은 능지처참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단선적 역사의 환상을 ?체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런 작업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오독(誤讀)의 역사를 추적하여 그 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했다. 오독의 역사, 서구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형제 폐지의 맥락은 케케묵은 동아시아 형벌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동양적 혹형의 묘사를 통해 동양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주장하는 서구 기록을 강력하게 반박할 만한 우리-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형벌, 특히 범법자의 육체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훼손하는 육형-곤장 매질로부터 능지처참에 이르는-이 보편적이었던 사실을 상기할 때, 그리고 우리에게 아직도 그 아득한 형벌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시인할 때, 이같은 침묵은 뜻밖일 뿐만 아니라 충격적이다. 동아시아 문화에서 형벌에 관한 거리낌 없는 세부묘사를 그림과 텍스트로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지옥의 형벌이 거의 유일하다. 그것은 종교적 상상의 영역에 속하지만, 저자들의 지적대로 사법적 현실과 종교적 상상의 경계를 넘나듦으로써 우리에게 형벌제도의 문화적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영역일 뿐, ‘지옥’에 비유되는 음울한 사법적 현실-고문과 형벌, 감옥-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아니다. 이런 침묵은 조심스러운 문화적 금기에 가까운 것이지 고의적인 제도적 은폐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동아시아 형벌과 사법제도에 관한 서구적 관점은 그 오점투성이의 선정주의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랜 침묵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법 전통과 현실을 돌아보는 중요한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보기 드문 특별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 법전으로부터 가장 선정적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통해 ‘능지처참’이라는 공포의 형벌을 다루면서도 이 책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판적 태도를 끝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오류와 편견, 무지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저자들의 엄격한 태도와 신념 덕분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셸 푸코의 정신을 계승한다. 먼지 쌓인 문서보관소를 뒤져 찾아낸 과거의 기록이 어떻게 현실과 소통하는지, 어떻게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는지를 보여주려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푸코의 실천적인 인문학적 지성과 맞닿아 있다. 점차 인문학적 지성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현실에도 우리는 그가 갔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에게 중국의 사법 전통에 영향 받은 동아시아 사법 전통을 상기시킨다. 전에는 보편적이던 사형이 이제는 ‘동아시아의 형벌’로 불릴 만큼 전 세계 사형의 4분의 3 이상이 동아시아에서 집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이 이 충격적인 통계수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한국사회에서 최근 사형에 관한 논의-최근 사형제 합헌 결정과 여중생 살해사건 등-가 되는 시점,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오랜 형벌의 기억을 끄집어내 그 기억의 실체와 맞서야 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 법률에 기원을 둔 ‘동아시아의 사법 전통’-그것이 우리가 극복하고 전화시켜야 할 대상이라면 올바른 역사적 인식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사형제 폐지의 맥락은 케케묵은 동아시아 형벌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