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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_ 꽃 피는 삶을 위한 눈물
사랑이 피고 지는 사이를 오간 바다로 난 길 │ 사랑의 먼 길 │ 강릉 소나무 │ 겨울 열매 속의 봄 꽃 │ 봄날의 확인 │ 장다리꽃밭 풍경 │ 등신불로 나투어 계신…… │ 불목하니의 이상한 밥상 │ 흐릿하고 또렷하게, 비밀 속으로 │ 비단길의 나 │ 덩굴식물의 뜻 │ 처서의 이별 │ 푸른 입술의 반중 │ 백두산의 꽃 숲으로 마름 따는 처녀 │ 노인장대를 보러 │ 박쥐나무와 며느리밑씻개 │ 꽃잎 날리는 집 │ 새와 시 │ 가을의 가시 │ 서리소나무와 송홧가루 │ 시골역 풍경 │ 독일 민들레 │ 겨울 빵나무 아래 │ 철학 선생이 된 작은 나무 │ 인동덩굴 아래서 │ 남천과 갈리나의 빨간 열매 │ 나무의 이름 │ 보랏빛 꽃을 손에 들고 오래 지켜보기 추사와 고흐의 초상화 │ 대나무의 소리 │ 꽃구경 │ 오래 지켜보기 │ 무인도를 위하여 │ 티벳의 그림 │ 짧은 독서 일지 │ 장미꽃 한 송이 │ 호수 위에서 연꽃을 들다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섬으로 가는 협궤열차│ 생의 끝에서 새와 바다를 보다 │ 늙도록 젊어 있는 삶 │ 가장 아름다운 꽃 │ 귤을 기다리다 │ 나무를 향해 가다 │ 으름이 익을 무렵 │ 내 꽃의 며느리들 │ 우레와 우레의 처서기 앵무새는 두려움을 떨쳐버리라 말하네 갈루와 벌레처럼│ 앵무새는 두려움을 떨쳐버리라 말하네 │ 섬과 새와 나 │ 내 꿈은 내가 주인 │ 문학은 어떻게 꽃 피는가 |
尹厚明, 본명 : 윤상규(尹尙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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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서 ‘시간이 흘린 눈물’까지는 먼 길이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내 삶의 섬, 혹은 다리 역할을 해서 나는 깊은 심연을 건너왔다는 생각이다. 삶을 찾아 떠난 이 순례여행에서 나는 많은 허무와 무의미를 만난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어딘가 꽃은 피어 있다. 꽃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삶의 원초적 물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인 것이다.
〈꽃〉 책 이후로 나는 여전히 꽃을 대상으로 삼는다. 지게에 가득 짊어진 나뭇단에 꽃을 꽂고 가는 젊은이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옛날이야기에서처럼 꽃을 꺾어달라는 여인을 위해 바위 옆에 소를 놓아두고 벼랑을 오르는 늙은이라고 해도 좋다. 꽃은 단순히 꽃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정을 향하여 쉬지 않고 올라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절정이란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룩하고 있는 그것, 그곳임을 알고 놀란다. 놀라지 않기로 한다. 다만 자기의 안을 향하여 놀라움을 이룩해야 하는 이 인생이라는 것! 그것이 글쓰며 이룩하는 보람과 행복임을 안다는 것! 늘 고독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자처럼 산다고 해왔다. 파행과 만행이란 고독의 벽쌓기였다는 말도 실상 부질없다. 오로지 나는 글씀으로써 나를 지키며 살아왔고, 살아가겠다는 말만이 필요하다. 그 길에 꽃들은 피고 지고 나를 지켜주었다. 그것으로써 이미 신비와 신화였다. 어떤 삶일지라도 거기에 신비와 신화의 세계가 있다.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워서 심원하다. 그래서 삶과 글과 꽃은 같은 선상에 있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꽃피었는지, 또 꽃필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식물의 생명이 물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는 눈물이 요구된다. 흘린 눈물의 양이 사람을 승화시킨다. 그 눈물을 받은 양재기를 부어 설산(雪山)의 크레바스에 내 나무를 키운다. 고독과 고행이 자기 안에서 자라나 동충하초처럼 되려는 꿈속의 나를 본다. 언어도단, 어불성설. 그러나 나는 살아온 나날을 그렇게 바라본다. 지난 시간이 흘린 많은 눈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그 눈물이 말라가며 남긴 얼룩이 내 삶의 무늬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꽃과 눈물 사이 이 책을 바치며, 나를 글의 제단(祭壇) 위에 놓으려 한다. --- pp.5-7, '작가의 말' 중에서 겨우살이는 마치 초록 까치집처럼 보인다. 어릴 적 살던 집 앞의 밤나무에 붙어 있던 그 초록 까치집이 아직도 머리에 선명한 걸 보면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한 묶음 사다놓았더니, 곧 시커멓게 암녹색으로 변하며 마디마디 툭툭 끊어져 쌓인다. 이렇게 마지막을 맞는 식물도 없으리라 했다. 예전에, 태어나지도 않고 사라진 한 아이의 이름을 겨우살이라고 지었었다. 그 아이가 아직 생명이 붙어 있을 때 마지막으로 이름이나마 지어준 것이었다. 어쩐 일인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성장이 멈추고 만 아이. 그 아이의 모습이 겹쳐지며, 삶의 마디마디가 툭툭 끊어지는 느낌. 봄이 올 무렵에 아이의 천도재를 지내러 동해 바닷가에 갔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거기 어디 앙증맞은 봄맞이꽃이 아이의 혼령인 양 하얗게 피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봄맞이꽃뿐이겠는가. 아픔이 클수록, 어둠이 깊을수록 봄꽃은 환하게 피어난다. 그러니까 환한 꽃이 그냥 환하기만 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꽃이 진다고 해도 한번 핀 꽃은 어디엔가 피어 있다고 믿으려 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사랑이/꽃이 피고 지는 사이를 오간’ 때문에 그러하다고, 나는 사랑의 뜻을 아로새긴 시 한 구절을 지어 봄꽃에 바친다. ‘겨우살이’의 천도에 바친다. 내 삶에 바친다. --- pp.36~37 식물과 함께함은 내게는 철학 선생을, 스승을 만나는 일과 같다. 때때로 인간으로 하여 실의에 빠질 때면 식물의 가르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하늘 끝 모르고 치솟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분을 나타내다 보면 또한 내 이기심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삶의 딜레마를 이겨내는 길이다. 안의 광기와 밖의 오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간, 삶을 미워하기보다는 식물에 몸을 맡겨야 한다. 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려고 있는 존재이기에 앞서서, 우리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스스로 그런’ 모습이기에 위대한 것이다. --- p.115 나는 그 무인도가 아직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리 포구도 없어졌고, 옛 풍경들도 모두 변했다. 내가 헤매 다니던 그곳이라고 여기기 힘들었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젊음을 보냈다. 그리고 험난한 술 속에서도 글을 놓지 않았었다. 내가 썼던 글을 빌미로 찾아가본 그곳의 변화를 직접 보고 확인하는 일은 서글프고도 어지러운 노릇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볼 만한 근거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 무인도, 시화호 호수 가운데 아직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놀랐다. 상전벽해의 변화 속에 외로운 섬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내가 그곳에 살았던 사실을 섬의 원추리꽃은 증명해줄 것이었다. 언제 섬에 다시 한 번 가서 원추리 가득 핀 풍경 속에 서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어디쯤일까 눈을 들어보았으나,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시화호 언저리에서 공룡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하여 보존하고 개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섬이 다시금 신비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나는 원추리싹을 뜯는다. 그리고 한여름의 주황색 꽃을 보며 가을의 갈무리를 생각한다. 8월 하순의 처서 절기를 지나며 가을은 또다시 우리에게 다가온다. 처서는 내게 보랏빛으로 다가오는 절기이다. 가을을 타는 내게는 매우 어려운 시간이기도 하다. 보라색 꽃들이 하늘거리고 또 머지않아 서해안의 나문재들이 짙게 짙게 붉었다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면 사라진 협궤열차가 어디선가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리라 믿는다. 이 세상에 한 번 있었던 것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이 우리들 일회성(一回性)의 삶의 특징이기에. --- pp.146~147 어느덧 내 젊음은 사라져버렸구나, 나는 봄둔덕에 앉아 새삼 탄식했다. 쫓기며 순간순간 숨 막히는 젊음이야 어서 지나가라고, 왜 이리 더디냐고 조바심을 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다시 돌아가라면 그러고는 싶지 않은 시절, 일컬어 ‘악마의 계절.’ 그런 가운데 일찍이 나는 시로써 내 인생의 좌우명을 새겨놓은 적이 있었다. ‘늙도록 젊어 있는 삶.’ 그냥 ‘젊은’이라고 써도 될 것을 ‘젊어 있는’이라고 굳이 ‘있는’을 강조해놓기까지 했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20대에 쓴 것이었다. 그랬는데, 때가 이르고 말았다. 젊음의 사라짐을 탄식하고 있던 나는 예전에 내가 쓴 시 한 구절, 그 약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사실 서너 해 전 독일 어느 도시에 한국 공원을 만들고 정자를 세워 편액을 걸어놓기로 했을 때도 나는 이 구절을 써준 적이 있었다. ‘작년하고 다르다’는 이제, 그때만 해도 옛날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젊음과 늙음이 교차하는 느낌, 이것은 기필코 ‘불혹’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올봄에 심은 어리고 젊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들의 미래, 즉 고목을 바라보는 나를 알게 된 것이다. 마침내 탄식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젊음이 갔다고 하나도 억을한 심사는 없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아니었던가. 젊음의 질풍노도, 인사불성이 징그러워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파행을 일삼았던가. 재가 되지 않으면 못 견딜 수많은 물구나무들, 그걸 끌고 갔던 소각장이 지난 세월에 널려 있는 것이다. 고목이라도 봄마다 피어나는 꽃, 여름마다 우거지는 녹음에도 ‘고(古)’가 들어갈 리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로인 소년의 첫 모습이다. 초경(初經)의 꽃, 초발심(初發心)의 잎사귀, 나는 고목으로 파릇파릇 젊은 새순이 돋는 나무를 내 안에 새겨넣는다. 새 꽃눈과 잎눈으로 고목은 새 생명을 노래한다. --- pp.187-189, ‘늙도록 젊어 있는 삶.’ 중에서 네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써라. 나는 이 금언을 뒷전에 놓고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자 하지 않았던가. 소설가는 소설을 쓰려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실을 쓰려 해야 한다. 교훈은 충분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곰곰 뒤져보았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역정 속에 있을 것이었다. 좁게는 내 개인 이야기, 혹은 넓게는 내 집안 이야기. 여기에 소설가는 추억을 파먹고 산다는 말이 적용된다 하겠다. 그러므로 소설가에게 경험이란 금맥이다. 일찍이 전쟁이 있었고, 살아남은 어린 내가 있었다. 배경은 고향인 바닷가 도시. 나는 토막토막 끊어진 채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필름의 흐릿한 음화를 복원하는 심정으로 하나의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한 작품이 ‘성립’되었다. 지금도 그것은 〈높새의 집〉이라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벌써 10월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언덕길을 내려가 오랫동안 참고 있던 술, 막걸리 한 병을 앞에 놓았다. 그 초원식당의 눈물겨운 자축은 늘 기억에 남는다. 알량한 단편 한 편의 희망으로 앞날을 격려하던 막걸리 한 잔. --- p.222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다. 그림은 심상을 그리는데, 실제의 나는 피안을 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나에게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내 실상을 곧이곧대로 파악하고 노출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내가 그리는 나는 애초에 내가 아닌 것이다. 관념으로서의 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실패가 아니라 이미 마음먹은 그대로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내 일인칭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문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게 아닌가. 꼬리를 물고 돌고 도는 상상의 동물은 실은 나였다. 나는 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닌 나. 그러므로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나를 쓰고 그린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게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멀어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내가 다가간 만큼 물러난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밀어내는 자성(磁性)을 가진 나일 수밖에 없다. --- p.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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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거목 윤후명이
삶에 물어보고 삶에 묻어두었던 사색의 결정들 ‘꽃’에서 ‘시간이 흘린 눈물’까지는 먼 길이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내 삶의 섬, 혹은 다리 역할을 해서 나는 깊은 심연을 건너왔다는 생각이다. 삶을 찾아 떠난 이 순례여행에서 나는 많은 허무와 무의미를 만난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어딘가 꽃은 피어 있다. 삶이란 그리움의 야적장 같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버려져 있는 저 폐품들을 보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폐품은 유품이 되어 달려든다. 버려야지 하면서 내놓았다가 다시 하는 수 없이 간직하곤 하는, 이젠 못 쓰는 낡은 물건들 속에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리움들…… 많은 그리움을 뒤에 두고 우리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 것일까. 삶에 묻는다 이 삶에 무엇을 바쳐왔는가 이 삶에 무엇을 찾아왔는가 시인이자 소설가 윤후명의 산문집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가 출간되었다. 〈꽃―윤후명의 식물 이야기〉(2003년 문학동네 발행) 이후 7년 만에 묶어내는 이번 산문집에는 자아를 찾는 여행과 흘려보낸 시간 앞에서의 겸허한 반성, 숱한 허무와 무의미들 속에서도 꽃 같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인생의 순간들이 정아(靜雅)한 언어로 담겼다. 전쟁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이십대에 청상이 되었던 어머니(흐릿하고 또렷하게, 비밀 속으로/덩굴식물의 뜻)와 속 깊은 사랑으로 인생의 은인이 되어주었던 양아버지(장다리꽃밭 풍경)에 대한 회상 속에는 일찍이 문학에 마음을 빼앗겼던 시인의 젊은 날 열병이 겹쳐진다. 화가 김점선, 이인, 민정기, 사진작가 이광호, 김영갑, 김수남, 문우 박영한(처서의 이별), 한창기(푸른 입술의 반중), 그리고 문학의 스승으로 존경했던 김동리, 박두진, 박목월, 황순원 선생 등 소중한 인연들과의 스침에 대한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시인으로, 소설가로, 나아가 화가로 인생을 ‘많이’ 살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이 은은하게 스며 있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향수 문단 안팎에서 벗 삼았던 예술가들과의 추억담 꽃과 나무에서 찾은 배움과 위안들 잊을 수 없는 인연이 불러일으키는 아련함들 숲과 꽃과 나무에서 얻은 성찰들은 산문집의 백미다. “식물과 함께함은 내게는 철학 선생을, 스승을 만나는 일과 같다. 때때로 인간으로 하여 실의에 빠질 때면 식물의 가르침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철학 선생이 된 작은 나무) 강건한 야생의 모습을 한 마름에서 천년의 아름다움을 품은 요조숙녀를 떠올리고 노인장대, 서리소나무 앞에서는 삶을 고결하는 사는 법을 생각한다. 박쥐나무를 바라보며 떳떳하게 살아오지 못한 삶을 반성하고 며느리밑씻개를 만났을 때는 지난한 삶에서도 위로받는 법을 깨닫는다. 겨울에도 푸른 인동잎은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에 대한 단상을 낳는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함부로 아무 꿈이나 꾸지 말라고 내게도, 남에게도 타이르곤 했다.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이 많음은 나이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어쩌면 삶이란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을 안고 살다 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인동덩굴 아래서) 고광나무, 때죽나무, 박쥐나무, 생강나무의 이름을 부르며 나무를 진정으로 알아가는 기쁨에 황홀해하고 파드득나물의 이름을 읊조릴 때는 마음이 행복하게 파드득거린다고 느낀다. 산문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물들, 예컨대 엉겅퀴, 개머루, 부용화, 풍접초, 어리연꽃, 벌노랑이, 비비추 벌개미취, 양지꽃, 민들레, 바위솔, 들국화, 원추리, 연꽃, 달맞이꽃, 한삼덩굴, 돼지풀, 백량금, 참나리, 능소화의 이름은 시간의 기억이자 삶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피며 맞이한 봄이 가고, 마가목의 흰 꽃이 피는 초여름을 맞이한다. 짧은 봄, 지독한 황사에 얼룩진 서울의 봄이었다. 누구는 이제 봄이 없다고도 머리를 흔들지만, 나는 꽃과 함께 계절을 정돈한다. 꽃과 나무에는 이름이 있다. 그 이름과 함께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기억하고 정리한다. 또박또박 삶의 이름을 적어놓는다.”(나무의 이름) 젊음은 필요없으니 어둠 속의 늙은이 뼈다귀빛 꿈을 다오 그해 그대 찾아 헤맸던 산밑 기운 마을 뻐꾸기 울음 같은 길 다시는 마음 찢으며 가지 않으리 내게 다만 한 마리 황폐한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에는 등단한 뒤 44년 동안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온 작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려주는 짤막한 문학 강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문학에 깊이 병들어’ 목숨을 걸고 글을 썼던 젊은 날, 20년 넘게 소설 창작 강의를 하는 동안 쌓았던 가르침들, 글을 써가는 나날이 길어질수록 함께 증강되어가는 문학에 대한 신념들이 꾸밈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전해진다. “지구와 함께 끓는 숨을 쉬지 못하면 문학은 죽는다.”(바다로 난 길)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시의 구절은 소설로 와서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갈루와 벌레처럼 동굴 속에, 토굴 속에 들어 쓴 소설의 당선으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 글이란 홀로 있음을 깨달아 세상에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이다. 그것은 순수를 회복하고, 그 힘으로 세상의 어떤 악의와 오해와 부조리도 승화시킬 수 있기를 비는 일이다.”(갈루와 벌레처럼) “우리나라 문학 풍토에서 조로(早老)는 늘 지적되어왔던 상황이었다. 경험에 따르면 조로가 아니라 중년의 도중하차라고 할 정도였다. 이른바 트렌드를 좇아다니느라 허덕이다가 그만 주저앉는 젊음도 있었다. 특히 우스꽝스러운 것은 현실적으로 얼마쯤 성취감을 가질 만하다 싶으면 글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쳐놓는 처세술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글은 명확히 도구였음을 증명한 꼴이었다. 지금도 소설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때로 글을 방편으로 여기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낯빛이 흐려진다. 그런 사람이 가련하게 보여 가슴이 아픈 것은 물론 우리 글의 위의에 나 자신 어긋난 듯하여 자괴감을 갖는다. 글은 삶인데, 삶을 어찌 도구화하랴! 삶은 문자 그대로 생(生)일 뿐이지, 삶는 게 아니다!”(늙도록 젊어 있는 삶) ◎ 『나에게 꽃을 다오 시간이 흘린 눈물을 다오』에서는 시인 윤후명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는 시들, 예컨대 〈사랑의 먼 길〉 〈강릉 가는 길〉 〈자작나무 숲〉 〈사랑 푸르름〉 〈희망〉 〈빈자의 자장가〉 등과 화가로서의 윤후명을 보여주는 아크릴화 다섯 점(2009년작)도 만나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