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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1. 남한강 주변의 고을 2. 역사와 한의 고장 강화 3. 남북으로 통하던 중요한 길목 4. 수원에서 인천까지 5. 한강 변에 자리한 서울 공화국 6. 한반도의 중심부 경기도 7. 경기 북부의 땅 8. 임진강에 강물은 흐르고 9. 장단 너머에 개성이 있다 10. 500년 왕업의 터는 만월대로만 남아 [충청도] 1. 내포 땅에 얽힌 사연 2. 홍성에서 보령에 이르는 길 3. 무량사에서 김시습을 만나다 4. 계룡산 아래 공주 5. 강경포구엔 빈 배만 매어 있고 6. 부여, 그 새벽의 땅 7. 충청도와 경상도의 길목 8. 미호천 변의 고을들 9. 교통의 요지 천안 10. 천하의 으뜸가는 물맛 11. 남한강 변의 나루들 |
辛正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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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만과 아산만(1권, 54-55쪽)
충청도 당진과의 사이에 남양만과 아산만이 있어 밀물, 썰물이 통하는 곳인데, 이곳 속담에 “남양 원님 굴회 마시듯 한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나는 굴이 그만큼 맛이 좋다는 얘기이며, 또한 “남양 사람은 동지섣달에 발가벗겨 놓아도 50리를 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기질이 억척스럽고 강하다고 한다. 한편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장수 원세개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청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뒤 대원군을 붙잡아 청국으로 데려갔고, 그때 청국의 군함은 대부도 남쪽, 즉 불도 바깥 해변에 정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에 “지세는 좌우로 개와 항구를 끼고서 바로 바다로 들어갔고, 수백 호나 되는 소금 굽는 집이 남쪽과 북쪽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금은 반월공단이 조성되어 바다에 의지하는 것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충청도 목계장터(1권, 344-345쪽)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라도 법성포(2권, 94-95쪽)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 물이 돌아 모여서 호수와 산이 아릅답고, 민가[閭閻]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 법성포는 조선시대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조창(漕倉)의 기능을 맡았었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 역할을 했던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포로 옮겼다. 그때부터 법성포에는 전라도 일대 모든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田稅)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이 15채가 들어섰고, 배가 20채에서 50채까지, 전선이 22채, 수군이 1700여 명이 머물렀다. 이처럼 법성포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波市)가 섰다.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 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던 법성포는 이젠 옛날만 회상할 뿐이고, 화려했던 법성포는 옛 이야기 속의 한토막이 되었다. -경상도 통영(2권) 경상도 통영 : 풍경화처럼 펼쳐진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태어난 인물로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와 김상옥(金相沃) 김춘수(金春洙) 유치환 등의 시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을 들 수 있다. 또한 분단조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독일에서 숨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씨와 화가 김형근, 전혁림씨도 이곳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그들의 꿈을 키웠으며, 화가 이중섭(李仲燮)도 이곳에 있으면서 남망산 자락 아래 펼쳐진 통영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통영 바다 건너쪽이 거제도이다. -함경도 온성(3권) 함경도 온성 : 고려 때 공민왕이 북진정책을 펴 수복하고 조선 태종 10년(1410) 여진족이 다시 침공하여 약 25년 동안 살았으나 1440년에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함으로써, 지난 날 다온평(多溫平)이라 부르던 이곳에는 온성군이 신설되어 길주 남부와 안변 북부 사이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다음 해에 도호부로 승격했지만 인조 8년(1630) 양사복(梁士福)이 모반을 일으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3년 부로 환원되었다. 1895년 경성부 온성군으로, 96년엔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개편되었다. 정관령, 충동령 등의 고개가 경원군과 연결되었고 월피천과 풍천천이 흐른다. 신숙주는 그의 시에서 온성에 대해 “국경의 달 오랑캐의 피리소리는 오랜 나그네를 근심하게 하고, 산의 꽃 계곡의 버들은 개인 날씨에 아름답고나”라고 노래했는데, 한국전쟁 당시 미국군과 한국군이 북진하여 중국군(그 당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피리소리에 마음이 홀려 고전하였다는 것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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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책을 쓰시기 위해 북한도 다녀온 것으로 압니다.
2003년 9월 30일에서 10월 4일까지 5박 6일간 개천절 공동행사의 일원으로 평양, 백두산, 묘향산, 구월산 일대를 다녀왔습니다. 고려공항 비행기를 타고 순안공항을 가는 도중의 감회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 캄캄한 용흥굴을 지나면서 북한의 전력사정을 한눈에 알 수 있었고, 점심을 먹고 평양시내를 거쳐 만경대를 향하면서 북한의 현재 모습을 대충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간이 눈에 띄는 소형 상점들을 바라보며 머지않아 시장과 상업이 이곳 평양시내에도 뿌리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며 오가는 북한 시민들을 보며 ‘북한이 지금 변화의 길목에 서있구나’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남한과 달리 평양시내에서 책을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백두산이나 묘향산에서 만난 안내원들의 친절함과 그들의 설명이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지... 그러나 분단 조국 60여년에 이르면서 우리 속담인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까지 사라져 버린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형제 또는 부모를 대하듯 친절하게 대하던 그들을 보며 어서 빨리 통일의 그 날이 오기를 기원하였습니다. Q.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 영남대로 등 옛 길의 복원 등을 포함 문제와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수백 개의 산들과 강길을 걸으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나 신경준의 산경표에 나타난 길들 중 중요한 길 영남대로, 삼남대로, 의주로 등 몇 개의 길에 보행자 전용도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도나 일반도로를 걸을 때는 “내가 이 길 위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절대 절명의 위험 속에 걸을 때가 많았습니다. 차들이 지나가면서 모자가 날아가고 몸이 휘청거리고 그렇게 걸어가는 길 그 길옆에다 자전거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보행자 전용도로를 개설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그 길을 걸어 조국을 순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것이고, 남한의 오대 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을 국립공원이나 박물관 개념으로 지정 보호한다면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좋은 강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일을 추진하기 위해 뜻있는 몇 사람들과 ‘보행자 전용권 찾기 국민 운동 본부’를 만들 예정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백두대간이라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국토는 한 장의 지도이자 우리 모두의 피와 살입니다. 그 국토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 그리하여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되는 것은 그 국토를 한발 한발 걸어갈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Q. <다시쓰는 택리지> 후속편은 어떻게 전개되나요? 이번에 펴내는 3권이 <팔도총론>이고 근간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복거총론〉즉 지리, 생리, 인심, 산수로 구성된 2권이다. 이중환이 “사람이 살만한 곳을 잡는 데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지리와 생리와 인심이 아무리 좋아도 “가까운 곳에 소풍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는 이중환의 말처럼 생각이 깊은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산수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일년에도 몇 차례씩 외국여행만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필자인 나는 이번 택리지의 주안점을〈복거총론〉에 더 두었는지 모릅니다. 250년 전 이중환이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이 시대는 더더욱 불확실성의 시대이고 환경오염, 정치적 불안, 남북분단, 세계화시대, 계층간?지역간의 갈등으로 사람들의 마음들이 나뉠 대로 나뉘어 있는데, 그래도 살만한 곳이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저는 아무런 제약 없이 쓰고자 했습니다. 풍수에서는 말합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땅은 없다” 그렇듯 좋은 땅 즉 유토피아 ‘이상향’이란 애시당초 없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한 곳을 염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 차선이라도 선택하며 살아온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가 아니던가요? ‘복거총론’을 2권으로 내면 <다시쓰는 택리지>는 5권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일 것입니다. 너무 부족한 글이라 자꾸 보완하고 보완해야 할 일, 그게 남은 과제일 것이고, 그리고 우리 국토를 좀 더 천천히 걸어보고 싶습니다. 북한과 협의하여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을 걸어볼 예정이고 서울에서 철령 넘어 서수라까지 이천리가 넘는 길도 걸어보고 싶습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쓰기 위해 이 땅을 밟았던 그때 나이가 64세였으니 아직 내게는 많은 시간과 그리고 걸어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저는 노는 것처럼 걸어가고 노는 것처럼 사람과 모든 사물들을 만나리라 마음먹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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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산하를 샅샅이 발로 밝아 역사와 삶의 궤적을 쫓아온 문화역사가이자 답사가입니다.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생생하게 다가오리라 생각됩니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재미있는 일, 황당한 일, 그리고 삶과 죽음을 한꺼번에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지 오래되지를 않아선지, 억지 춘양 격이 너무도 많고 그것이 역사왜곡과 함께 국민들의 혈세를 축내면서 국민들을 우롱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일례를 든다면 전남의 장성과 강원도의 강릉이 힘을 겨류는 홍길동 문제, 남원의 춘향이 무덤, 흥부와 놀부 또는 곡성의 심청은 약과이고, 기념물은 한점도 없는데 기념관부터 수백 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짓고 전시할 물건을 기증해 달라는 광고를 내 보내는 자치단체 등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들이 나라 곳곳에 수도 없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변형된 지명들 또한 너무도 많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자주 등장하는 마일령이나 대문령을 말할 것도 사라져 버린 옛 지명들은 부지기수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을 발발케 한 만석보가 소재한 정읍시 이평면은 원래 동진강의 배가 드나들어 선입(船入)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배나무가 많은 이평면(梨坪)이 되었고, 한강의 최상류천인 골지(骨只)천은 높을 고(高)에 터 기(基)라 고기천이었는데, 면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지금껏 골지천으로 남아 마을 사람들이 고쳐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과태료 1백만원에 처합니다”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는 어김없이 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공주시 공산성으로 올라가는 금강빌라 뒤편에는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삼대가 망하리라”는 안내판의 밑에는 껌종이 하나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Q. 요즘 지방 분권과 특성화가 과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팔도의 특징을 어떻게 보시나요.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명하여 팔도를 평하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정도전은, ‘경기도-경중미인鏡中美人(거울에 비친 미인과 같다) / 충청도-청풍명월淸風明月(맑은 바람 속에 밝은 달과 같다) / 전라도- 풍전세류風煎細柳(바람 앞에 가는 버드나무) / 경상도-송죽대절松竹大節(소나무나 대나무와 같은 절개) / 강원도-암하노불岩下蘆佛(바위아래의 늙은 부처) / 함경도-석전경우石田耕牛(돌밭을 가는 소) / 평안도-맹호출림猛虎出林(수풀에서 나온 사나운 호랑이) / 황해도-춘파투석春波投石(봄 물결에 돌을 던지는 듯하다)’라고 평하였습니다. “십리 간에 말이 다르고 백리 간에 풍속이 다르다.”는 말처럼 삼천리 금수강산 작은 나라지만 백두대간이 등뼈처럼 가로놓여 있고, 특히 죽령, 조령, 추풍령 등 크고 작은 고개가 가로놓여 있어 각 지역들과 독특한 문화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현대화 과정에서 독특한 지역의 특징이나 풍속들이 거의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서울 부산과 지역의 거점도시에 경제, 교육, 생활환경이 집중되면서 대부분의 크고 작은 그 지역들이 오롯이 지니고 있던 풍속들도 사라지고 육십에서 칠-팔십 먹은 노인들만이 지키고 있는 농촌 구석구석의 인심은 논하기가 힘들게 되고 말았습니다. 인심과 풍속 등은 팔도를 구별 할 수가 없이 섞여 버렸는데 오직 정치인들과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만들어내어 지역적 특성이 지금도 여전하다고 호도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필자는 팔도의 각도마다 좋은 풍속과 특징은 이어나가는 것이 좋다고 보고 지금이라도 팔도의 특성에 맞는 문화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든다면 이름났던 옛날 포구나 나루(목계나루, 삼개[마포]나루, 광나루, 양근[양평]나루, 낙동나루[낙동강], 물금나루[낙동강], 율지나루, 남지나루, 강경포, 웅포, 곰나루, 섬진나루 등)에 황포 돛단배를 띄워 관광상품화 한다면 좋을 것이고, 선비들이 살 곳을 정한 뒤 공부와 휴식을 겸했던 강가의 이름난 정자들을 복원,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나라 안에 이름났던 시장(강경, 평양, 대구, 전주, 밀양) 등의 시장을 난장과 같은 의미의 재래시장으로 활성화해도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 좋은 관광 상품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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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Q. 택리지를 다시 쓰시고자 했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택리지>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크게 펼쳐진 우리나라의 지도이자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국토 즉 삼천리금수강산입니다. 그러나 이중환이 살았던 그 당시와 25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세상의 풍속이나 모든 사물들은 몰라보게 변하고 말았지요. 인문지리는 최소 50년 단위로 다시 쓰여 져야 마땅합니다. 자연환경과 함께 사회 환경이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고 할 때 변화된 사회 환경과 역사의 두께에 걸 맞는 인문지리 내지 역사지리가 다시 쓰여 져야 하는데, 이중환이 택리지를 집필한 뒤 2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불과 몇 십 편의 논문이 나왔을 뿐, 새로운 각도의 인문지리와 역사지리지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85년 겨울, 뜻이 맞는 여러 지인들과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문화 프로그램으로 세상과 소통하면서 89년부터 지금까지 매달 한 차례씩 187회에 이르는 답사, 한국의 5대강 도보답사 등 수많은 단체들을 안내하면서 산천을 돌아다닌 그 이력이 이번 택리지를 쓰게 된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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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시쓰는 택리지》의 3가지 특징
1)발과 머리, 가슴으로 다시 쓴 택리지 저자는 지난 25년간 한국의 5대 강 도보답사와 함께 수백 개의 산을 오르내렸으며, 황토현문화연구소 주체 정기답사 147회 및 각종 단체 답사를 포함하면 1천여회 이상의 답사를 하면서 온 국토의 산야를 돌아다녔다. 이 책을 그의 발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아울러 한국의 인문지리 기술 과정에 《택리지》는 물론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연려실기술》《성호사설》《여유당전서》등 수많은 고전 텍스트를 전거로 삼아 체제를 만들었고 지역별 내력을 밝히기 위해 지방사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였다. 무엇보다 이 책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시대를 아파하는 가슴과 이 땅과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 이 책은 발과 머리, 가슴으로 쓴 것이다. 2)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증언 이 책은 기록이나 문화재로 전시된 그래서 보존되고 있는 것보다는 마일령이나 대문령, 목계나루나 가흥창 터, 영남대로와 삼남대로 등 지금이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갈 것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사라져 가는 길, 사려져 버린 아름다운 옛 이름, 그리고 옛날의 형체를 도무지 떠올리기 조차 힘들게 변해버린 산천들을 안타까움으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보행자 전용도로나 강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제안 등 우리 국토의 올곧은 보존을 위한 제언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존에 나온 문화유적지답사 책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인류학적 보고서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 장의 지도이다. 3)보고 읽는 국토 교과서 아울러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첫째, 인문지리로 포괄되는 여러 분야 중에서 역사와 인물지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예안의 퇴계, 청양의 이몽학, 안동의 유성룡, 해남의 윤선도, 전주의 정언신, 합천의 정인홍, 평양의 정지상 등 역사적 인물에서부터 무명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통해서 지리를 보고 있다. 둘째, 발로 쓴 국토 교과서답게 우리나라의 산하를 사연들을 사진에 담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의 사진은 저자가 이 땅의 구석구석을 걸으며 직접 찍은 것으로 우리 국토와 역사, 문화를 텍스트와 함께 한눈에 전하고 있다. 4. 우리 지리 우리가 읽는다 - 관점과 방법 이 책의 기술의 기본적인 관점과 방법은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보여준 우리 고유의 지리관을 따랐다. 이중환이 말한 지리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학문인 동시에 삶의 지혜이고 실행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는데 함축하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라 할 수 있다. 접근 방법에서는 행정구역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하여 생활권 중심으로 접근하였다. 산줄기와 하천을 중심으로 우리 국토를 파악하고 그 바탕하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 경제 활동이 기술되었다. 그것은 도별 서술에서 구체화되는데 경기도의 경우, 한강이 우리역사와 현재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국토의 허리를 흐르는 남한강변의 여주에서 시작하여 강화도, 안성, 서울과 개성을 돌아 임진강에서 마무리 짖는다. 마찬가지로 금강의 발원지인 전북 장수에서 시작되어 남해 바다와 제주도에서 끝나는 전라도 그리고 영남의 젖줄 낙동강에서부터 비롯되어 진해에서 마무리되는 경상도 등의 흐름으로 지리와 역사, 풍속, 인물, 문화유산, 경제상황 등을 다루었다. 다만 이중환이 압록강 근처의 평안도에서부터 시작하여 함경도까지 조선 팔도를 다루었던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분단 상황을 고려하여 경기도에서부터 시작하여 황해도로 맺음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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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조선시대 대표 베스트셀러 《택리지》에 주목했는가?
이중환이 쓴 《택리지》는 당대 18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인문지리서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폭넓은 관심을 모은 대중 교양서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영남대 안대회(한문교육학과 교수) 선생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 이중환의 《택리지》를 우선으로 꼽는다. 무엇보다 혼란스런 사회에서 어디에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당시 교양인들의 기호와 관심사에 잘 부합했기 때문이라 한다. 역사학자 홍이섭은 <택리지에 나타난 이중환의 사상>이라는 논문에서 《택리지》는 “사회가 혼란했던 조선 후기 사람들이 추구했던 이상향의 이론적 바탕이 된, 정치사회적 특성이 강한 지리서이다. 이 작은 책을 지리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 지리, 정치, 심리 등 제반사항을 깨끗이 정리한 명저로 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우리 문화유산답사에서 안내서의 원조로 《택리지》가 제일 먼저 읽히기 시작했다. 왜 택리지에 주목하며 지금까지도 읽고 싶어 하는가? 첫째, 《택리지》가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저자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과 지리관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으로 우리 지리를 올곧이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거기에는 한반도와 만주벌판, 그리고 휴전선이 그어져 있지 않지만 남한과 북한 그곳에서 살고, 자라고 한 느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택리지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크게 펼쳐진 우리나라의 지도이자 우리가 걸아가야 할 국토, 즉 삼천리 금수강산이다. 그러나 이중환이 살았던 당시와 250여년의 시차를 두고 세상의 풍속이나 모든 사물들은 몰라보게 변하였다. 경제개발의 여파 속에서 산이 사라지고 강은 물길을 돌렸다. 근래에 접어들어 생명사상과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산과 강이 새롭게 조명되고 《택리지》가 여러 형태로 논의되지만 이 시대에 맞는 《택리지》가 다시 씌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미흡하지만 이 땅의 산과 강을 부분적으로나마 걸어다닌 나로 하여금 《택리지》를 다시 쓰도록 부추겼다“ -머리말 중에서 2. 250년의 간격을 넘어 택리지와 대화하며 신정일이 다시 쓴다 자연환경과 함께 사회환경이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고 할 때 《택리지》는 당연이 다시 써야 한다. 예로 강경을 들 수 있다. 강경은 바닷길과 금강 뱃길의 연결지점으로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이지만 조선시대 상업도시로 성장하여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 낙동강을 끼고 있는 대구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철도나 육로가 발달하면서 쇠퇴를 거듭하여 현재는 포구의 기능은 사라져 버리고 젓갈시장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책은 변화된 환경과 역사의 두께에 걸 맞는 인문지리서를 희구하며, 우리나라 강과 산을 샅샅이 발로 밟아, 역사와 삶의 궤적을 쫓아온 신정일이 《택리지》를 텍스트로 삼아 덧붙여 나가며 다시 쓴 인문지리서이다. “답사를 가기 전 맨 처음 펼쳐 보는 책이 《택리지》와 <대동여지도>이다. 그걸 펼쳐놓고 내가 가야 할 곳의 지리, 인심, 인물, 풍속 들을 떠올려 보며 준비할 때 느끼는 경외감, 그것은 미리가보는 답사의 의미와는 또 다른, 그분들과 지나간 역사와의 내밀한 교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 가보면 내가 찾는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미일령이나 거대령 그리고 대문령 고개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계나루나 가흥창 터는 그렇다고 치고 마포, 즉 삼개나루의 흥청거렸던 풍경은 드라마 장면 속에서도 볼 수가 없고 조선 후기까지 큰 고을이었던 고부나 남양도호부는 면이나 동으로 변해버렸다. 국토를 가로지른 철길들과 고속도로, 수많은 댐들. 아! 사라져 버린 절이며 고개며 땅이름들이여! 나는 그 길을 가면서 새삼 길을 앞서 간 그분들의 고독과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먹고 사는 것초차 힘겹던 시절에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찾고 우리의 역사와 국토의 면면에 흐르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위해 조선 팔도를 떠돌아다닌 그들을 만난 뒤, 나는 내 삶이 그래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말 중에서 이중환과 신정일은 역사, 지리, 문화, 생태학자로서 서로 닮은꼴로 <다시쓰는 택리지>는 250여년의 간격을 넘어 대화하는 장이다. 이중환은 사대부가 살만한 곳을 찾아 오랜 세월을 헤맨 결과 살만한 곳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가 찾은 것은 사대부가 아닌 다른 삶, 살아 움직이는 장터나 비린내 나는 포구 등의 풍경과 서민들의 모습이었다. 수백 개의 산들을 오르내렸고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 등 한국의 5대 강 도보답사를 비롯 25년간의 답사를 통해 저자가 찾은 것은 이 땅과 사람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번에 펴내는 전3권은 팔도총론으로 1권-경기 충청편, 2권-전라 경상편, 3권-강원 함경 평안 황해편이다. 후속해서 근간으로 복거총론에 해당하는 지리 인심 생리 산수를 2권으로 하여 총5권이 완간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