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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우리가 빠져 있는 오역의 덫 다원주의 | 포퓰리즘 | 진보 | 극우 | 선군정치 음모론 | 역사 | 균형 | 평생직장 | 중앙은행 고환율 | 민영화 | 인턴 2부 말을 점령한 돈과 싸운다 대한민국 | 북한 | 중국 | 아사드 | 힐러리 | 카다피 만델라 | 미스 마플 | 하토야마 | 무가베 3부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벗어나다 중립 | 마약전쟁 | 테러전쟁 | 정보부 | 모병제 | 핵우산 유럽연합 | 프랑스혁명 | 소수민 | 비정부기구 | 독립국 | 홀로코스트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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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이 더욱 두려워한 것은 아옌데가 사회주의와 다원주의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옌데는 쿠바의 카스트로를 존경했지만 일당제를 추구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아옌데는 진정한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하게 다원주의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려고 했습니다. 카스트로 체제는 아무리 경제발전을 이룬다 하더라도 일당제, 독재라며 비웃을 수 있었지만 아옌데 체제가 성공할 경우 미국은 그렇게 꼬투리를 잡고 비웃을 수가 없었겠지요.
더욱이 아옌데는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처럼 ‘과격’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경을 쓴 아옌데는 부유한 대지주, 점잖은 신사, 온건한 학자로 보였습니다. 아옌데의 정적들은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지만 아옌데는 자신의 정적들에게 절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을 보좌하던 키신저 국무장관은 카스트로보다 아옌데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아옌데의 집권보다 키신저가 더 두려워한 것은 아옌데가 재임에 성공하든 않든 무사히 임기를 마침으로써 칠레에 민주적 헌정 질서가 자리잡는 것이었습니다. 아옌데 모델이 성공할 경우 미국은 중남미를 모두 잃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 p.21-22 영어 populism은 한국어에서는 ‘포퓰리즘’이라고 보통 옮기고 영한사전에 나오는 대로 ‘대중추수주의’나 ‘인기영합주의’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말로 씁니다. 한국의 보수언론에서 하도 부정적으로 쓰니까 이제는 한국의 진보언론에서도 좋지 않은 뜻으로 씁니다. 포퓰리즘은 주홍글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populism은 People’s Party를 만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자기들끼리 이르던 말이었습니다. 자기비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일부 온라인 영한사전에서는 populism을 ‘인민주의’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인민이라는 말은 20세기 초반에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정치이념의 주역을 가리키는 말의 번역어로 이미 선점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의 색채가 짙게 밴 인민이라는 말을 공산주의가 뭔지도 잘 몰랐던 사람들, 아니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사람들의 정치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의 populist는 관료주의를 혐오했으며 집단에 기대기보다 자립을 추구했습니다. 서민주의자는 인민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잘못 붙여진 이름은 현실을 왜곡합니다. --- p.41 가까운 일본에서 다시 세계애국파대회가 열린다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아마 참가할 정당이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면서 우익임을 천명하는 정당은 있어도 정말 그런 마음을 실천에 옮기는 정당은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하지만 설령 세계극우파대회가 열린다 하더라도 한국의 극우파는 대회 조직위로부터 참가 자격을 박탈당할 겁니다. 극우의 두 가지 조건은 자민족에 대한 애정과 타민족에 대한 혐오인데 일베라는 흔히 극우로 일컬어지는 온라인 동호회에서는 자민족에 대한 애정도, 타민족에 대한 혐오도 찾아보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일베는 전라도 사람을 홍어라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입니다. 일베가 존경하는 서북청년단은 해방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제주도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민간인을 고문하고 강간하고 학살하는 데에 앞장선 깡패단입니다. 이 깡패단을 비호한 것은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이었고 이승만을 중용한 것은 한국에 진정한 우익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혐오한 미국이었습니다. --- p.71-72 자본과 공장의 국경선이 사라진 지금은 국가권력이 오히려 기업의 눈치를 봅니다. 내세울 것 없는 나라는 법인세를 내려서라도 너도나도 자본을 유치하려고 경쟁하는 판입니다. 과거의 privatisation은 소유권이 사기업으로 넘어갔어도 정부가 사기업 위에 있었으므로 ‘민영화’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공장이나 자본을 해외로 옮기겠다는 위협으로 사기업이 정부를 압박하는 지금의 privatisation은 ‘사유화’일 뿐입니다. 특히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할 뿐더러 복수의 공급망을 까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는 수도, 전기, 가스 같은 이른바 망산업은 애당초 경쟁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저절로 독점이 이루어지므로 사기업에 넘기기보다는 반드시 공기업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 p.190 내가 너의 비밀을 안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로 두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사실 정상적인 나라의 안보를 맡은 정보기관의 가장 중요한 행동수칙인지도 모릅니다. 영국인은 2차대전 당시 군사력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독일의 침략을 막아낸 영국 본토 항공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영국이 대독 항전에서 이긴 결정적 이유는 영국이 개전 초반부터 ‘에니그마’라는 독일의 암호체계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영국은 독일의 작전계획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거지요. 영국은 독일의 암호체계를 자국이 해독했다는 사실을 독일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어떤 경우에는 알면서도 속아넘어가는 척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자국의 암호체계가 적국에게 해독당했다는 사실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까맣게 몰랐답니다. 에니그마 암호기는 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도 70년대까지 제3세계에 수출되었지요. 영국 정보기관이 해당 국가들의 일급국가기밀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자국의 일급비밀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급 기밀로 유지해야 할 이유는 이래서입니다. --- p.3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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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전쟁』은 말과 말이 아니라 말과 앎을 잘 잇고자 한다
말과 앎 사이에는 무한한 가짜 회로가 있다는 두려움 탓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영어 populism을 ‘포퓰리즘’이 아니라 굳이 ‘서민주의’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프로파일러, 레서피, 워딩, 거버넌스는 profiler, recipe, wording, governance와 뜻둘레 곧 외연이 거의 같다. 하지만 populism과 포퓰리즘은 그렇지 않다. populism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토지 소유 제한, 철도 국유화, 금융 민주화를 요구하며 미국에서 자작농이 중심이 되어 벌인 치개혁 운동이었다. 그들은 Popular Party라는 정당까지 만들었다. 원래 Populism은 대문자 P로 시작되는 고유명사였고 Popular Party 정당이 추구하던 이념을 가리켰다. 하지만 1919년 이 당이 없어진 뒤로 populism은 소문자 p로 시작되는 보통명사로만 주로 쓰였다. 대문자 Populism은 한 정당의 강령을 가리키는 중립적 의미로 쓰였지만, 소문자 populism은 유권자의 인기에 영합하는 무책임한 정책을 찍어누르는 낙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자 populism조차 아직도 학술서에서는 중립적으로 쓸 때가 적지 않기에 한국어에서 부정 일변도로 쓰이는 포퓰리즘만으로는 populism의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영한사전에는 ‘대중영합주의, 인민주의’ 같은 풀이도 있지만 대중영합주의는 populism의 어두운 절반만 그린다는 점에서, 인민주의는 정작 미국의 자작농들이 거부감을 품었던 공산주의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적절한 풀이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populism의 뜻을 우리말로 제대로 담으려면 ‘서민주의’ 같은 조어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 다른 사례들로는, 소수 기득권자가 privatization이 다수 서민을 고달프게 만드는 ‘사유화’임에도 ‘민영화’라고 고집하는 경우, 뒤에서는 테러집단을 양성하면서 앞에서는 테러집단과 싸운다고 우겼으나, war on terror라는 단어는 ‘테러절멸전’이 아니라 오히려 ‘테러양산전’인 셈인 경우가 많았다. ‘다원주의, 극우, 포퓰리즘, 민영화… ’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은 오래전에 세상을 돈으로 움직여온 사람들에게 점령되고 왜곡되었다. 말을 바꾸면 현실이 달리 보인다! 저자는 말들을 상대로 한 번역전쟁에 35개의 중요 키워드를 제시하였다. [1부 우리가 빠져 있는 오역의 덫] 편의 키워드들 다원주의, 포퓰리즘, 진보, 극우, 선군정치, 음모론, 역사, 균형, 평생직장, 중앙은행, 환율, 민영화, 인턴 [2부 말을 점령한 돈과 싸운다] 편의 키워드들 대한민국, 북한, 중국, 아사드, 힐러리, 카다피, 만델라, 미스 마플, 하토야마, 무가베 [3부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벗어나다] 편의 키워드들 중립, 마약전쟁, 테러전쟁, 정보부, 모병제, 핵우산, 유럽연합, 프랑스혁명, 소수민, 비정부기구, 독립국, 홀로코스트 ‘서민주의’를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사유화’를 ‘민영화’로 미화하는 세력을 저자는 oligarch라고 불렀다. 권력을 휘두르는 소수 집단을 뜻하는 oligarch를 영한사전에서는 ‘과두(寡頭)’로 풀이하지만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금력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저자는 현실에 밀착된 금벌(金閥)이라는 단어를 썼다. 서민주의를 짓밟은 것은 미국 금벌이지만 서양 근대사에서 금벌의 원조는 저자 자신이 오랜 세월 살아온 영국을 꼽는다. 거의 모든 전쟁에서 이긴 영국의 비결이 바로 군자금을 꽤 안정되게 조달한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금벌은 오랜 시간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처신했을까. 1990년대 초반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영미 언론에서 oligarch라는 말은 러시아를 상대로 할 경우에 특히 많이 쓰였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국가 재산을 가로채 벼락부자가 된 금벌의 천국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나라의 중심을 다시 세운 지도자가 바로 푸틴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러시아 금벌과 손잡고 러시아 국부를 헐값에 사들여 재미를 본 주역이 바로 영국과 미국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국민이 선거 때마다 푸틴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까닭은 푸틴의 독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푸틴이 사익에 짓밟힌 러시아의 국익을 되살린 지도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틴의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의 언론을 주무르는 영미의 금벌에게 서양 다원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독재자로 그려진다. 세상을 주무르는 진짜 금벌은 영국과 미국에 있는데 러시아에만 있는 것처럼 포장된다.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처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만 번역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영어든 한국어든 말로 담아내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populism을 포퓰리즘으로 충실히 따르는 것을 한번쯤은 의심해보고, oligarch를 ‘올리가르히’라고 러시아 발음으로 적을 때 왜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해 물음을 가져본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돈으로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독립적인 시야를 견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