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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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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으로 그려봐도 암울하기 짝이 없는 미랜데 그걸 위해 열심히 공부까지 하는 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그만둔 거다.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덜 비참하기 위해. 열심히 했지만 이룬 것이 없다보단 처음부터 한 게 없으니 이룰 것도 없다는 쪽이 훨씬 나을 테니까. --- p.28
왜 하고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죽음에 온 정신이 팔려 있냐 너는! 왜 모두가 널 걱정하게 만드는 거야! 왜 엄마도 아빠도 나도, 온 가족이 네가 죽을까 봐 전전긍긍 눈치만 보게 만드냐고 왜! 그거 정말 잔인한 취미인 거 알아? 살기 싫으면 그냥 놀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놀아. 그냥 숨만 쉬어달란 말야. --- p.43 그리고 아버지는. 생전 그런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매일 슈퍼 문을 닫고 귀가하시는 자정 즈음에 꼭 내 방문을 열어 나의 생사를 확인하시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가 방문을 열었을 때 마주하시는 풍경은 늘 똑같다. 지금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는 이 모습. 가끔 등을 돌리고 자는 척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안심이 안 되시는 건지 꼭 내 얼굴 가까이로 오셔서 숨소리를 듣고 가곤 하셨다. 그게 부담스러워 나는 되도록이면 아버지가 오실 즈음엔 최대한 깨어 있으려 노력했다. --- p.47 문득문득 그런 기운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걸까?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어째서 살아 있는 걸까? 왜 아직도 나는 살아 있는 걸까. 내내 죽어만 왔지 살아본 적은 없었기에 그런 기운이 가슴팍을 훅 치고 들어올 때면 난 순간적으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곤 한다. --- p.54 그들의 문학에 심취할수록 나는 다시금 죽고 싶어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책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내 손을 벌벌 떨게 만드는 위대한 인간들과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런 말도 있지 않나? 모든 작품은 엔딩이 훌륭하면 과정이 어땠건간에 결국 훌륭한 작품으로 기억된다는 말. 그만큼 끝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나온 말인지, 끝만 완벽하면 과정 정도는 허술해도 괜찮다는 결과 중심주의를 꼬집기 위해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살아온 역사가 어땠건 간에 결국 끝이 자살일 수만 있다면 뇌 구조부터가 다른 그 위대한 인간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고 기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p.82 비록 훈이는 작고 못생긴 배우 지망생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그 순간의 눈빛만큼은 최민식이었다. 꿈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저토록 경이로운 일이었던가. 그래, 연기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너도 빛이 나는구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묘한 순간이었다. 우린 저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열여덟 인생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으며,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 p.88~89 이것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애송이의 비애일까, 인격과 사상의 성장이 아직 진행 중인 불완전한 존재는 차마 닿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일까. 그 생각으로 또 하루가 지나갔다. 내가 스물여덟 살 정도가 되면 그땐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나는 죽지 않고 스물여덟까지 버텨내야 할 텐데.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나는 버텨볼 의향도 있었다. --- p.92 아버지는 덤덤했다. 고저가 없는 그 목소리에 나는 숨이 턱 막혀왔다. “우리가 널 사랑해온 시간들을 헛되이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p.1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