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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의 몸 2. 한밤중의 작은 풍경 3. 산다는 것 4. 김수만씨가 패가망신한 내력 5. 크리스마스 선물 6. 수술 7. 삶을 즐기는 마음 8. 저녁식사 9. 정직한 이들의 달 10. 수족관 11. 우리들은 주간지로소이다 12. 반닫이 여인 13. 움마 이야기 14. 꼬마비누 매끌이 15. 숙이의 까마귀 16. 위험한 나이 17. 사랑이 다시 만나는 곳 18. 어떤 결혼 조건 19. 어느 남북회담 20. 손가락에 눈이 달린 여자 21. 햇볕과 먼지의 놀이터 22. 가짜와 진짜 |
KIM, SEUNG-OK,金承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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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앞에서 문을 두드려봐도, 아내는 내 소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아내의 몸에 큰 흉터나 반점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비록 어둠 속이지만 아니 어둠 속이기 때문에 나는 잠깐 벗고 있는 아내의 몸을 손으로나마 실컷 만져보려고 기를 쓰곤 했던 것이다. 눈으로 못 보는 대신 손으로 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몸의 구석구석을 더듬곤 했던 것이다.
--- p.12~13 나는 그저 한 달에 한두 번, 일요일에 아내한테는 등산 간다고 거짓말하고 그 여자 셋방을 찾았어. 그 여자가 끓 여주는 두부찌개 같은 걸로 점심을 먹으며 하루 종일 아이한테 공부를 가르쳤지. 숫자 세는 것, 한글 읽기 같은 거 말이야. 그러는 동안 그 젊은 엄마한테도 필요한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 남자였지. 그 정도에서 딱 끊고 돌아서든지 어디 장가 못 간 농촌 청년이라도 하나 구해다가 결혼시켰어야 하는 건데 그만…… 내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어. --- p.36~37 ‘주간 농담’이 한 얘기 “그렇소, 바로 그런 농담을 해야 하는 게 우리의 임무란 걸 잊었소? 일주일 내처 진담하느라고 지쳐버린 대중들의 엔진처럼 뜨겁게 단 머리를 농담으로써 식혀줘야 하는 게 나와 당신이 할 일이란 말이요.” “그럴까요? 적어도 우리나라 대중들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일주일 내처 농담 같은 약속, 농담 같은 인간 대접, 농담 같은 보수를 주는 직장에 시달린 탓에 명색이 주말이란 걸 맞아 지면에서나마 진담과 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요?” --- p. 111~112 “아, 난 싫어요! 싫어요! 난 얼마나 예쁜데…… 하얀 거품이나 잔뜩 뿜으며 사라져야 하다니. 왜 비누로 태어났 을까? 차라리 저기 저 쓰레기통이나 물주전자로 태어나잖구…… 난 도망가고 싶어요. 아저씨, 난 도망갈래요.” “그렇게 싫으냐? 그래, 그럼 도망가렴. 그렇지만 아무 데로 가봐도 넌 비누지 쓰레기통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 몸을 바쳐 사람들한테 더러운 때를 씻겨줘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는 게 얼마나 떳떳한 일이냐.” “그렇지만, 난 싫어요. 죽고 싶지 않단 말예요.” --- p.140 한번 의심이 들고 보니 이상한 점은 얼마든지 있다. 잠자리에서는 전에 없이 내 품을 파고든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행위만은 사양이다. ‘이대로가 좋아요’, 남편 아닌 사내와 바람피운 죄의식을 씻어내기에는 하기야 그 정도면 딱 알맞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상한 점은,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얼마 전부터 아내는 내가 회사에 가고 없는 낮 시간에 이따금 아이들을 옆집 아주머니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해놓고 두서너 시간씩 외출을 한다는 것이다. --- p.151~152 “어떤 연극입니까?” “간단한 거예요. 저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조금만 걸어주시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남자가 선생님을 다시 찾아 오면, 미숙이는 내 애인이라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 그날 밤, 나는 청년 세 명의 습격을 받았다. …… 기차를 탄 후 출발할 때까지 나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곳은 굉장히 심심한 곳이에요. 나는 부어오른 눈두덩을 손으로 쓰다듬어보았다. 미소라도 짓고 싶었다. 햇볕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마을을 녹여버릴 듯이 내리쬐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 마을엔 사람이 하나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직 햇볕과 먼지의 놀이터 같았다. 햇볕과 먼지의 놀이터! --- p., 204~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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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작 「가짜와 진짜」수록
빼어나고 참신한 현실 풍자 1980년대에 완성한 주옥같은 작품 중에 어느 지면에도 실린 적 없는 미발표작이 바로 「가짜와 진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기사화된 두 일가족의 죽음을 기술한 것이 전부다. 먹고살기 넉넉해진 현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 가난과 결핍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김승옥은 1980년대나 2000년대인 지금이나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되는 현실의 슬픈 단면을 포착해냈다. 그에 대해 작가는 어떤 주관도 섞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주는 데에 그친다. 부족함 없는 쪽을 ‘진짜’로 알고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한 해석과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말이다. 그 외에도 부부간에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 알몸을 드러내지 않는 아내와 갈등을 겪는 ‘나’의 심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마조마하게 조명한 「아내의 몸」, 어느 과부와 사랑에 빠져서 이혼하고, ‘우리 집 과부(이혼한 아내)’를 위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목적이 생겼다는 김수만의 아이러니한 사연을 다룬 「김수만 씨가 패가망신한 내력」, 낙태 수술을 하러 나선 어린 두 여자애의 방황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수술」등 매우 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점철되어 독자들의 동감을 이끌어낸다. 김승옥은 「우리들은 주간지로소이다」와 「매끌이」에서 좀 더 색다른 현실 풍자 기법을 시도한다. ‘의인화’다. 「우리들은 주간지로소이다」에서는 ‘주간 농담’, ‘주간 스캔들’ ‘주간 에로’ 세 잡지들이 만난 사람들과 제각기 겪은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주간 농담을 만들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여유가 없다며 진담만을 원하는 기자, 사생활을 보장 받고 싶어 하는 대학 교수, 섹스를 감금하라고 외치더니 정작 주간 에로를 집으로 가지고 가 눈에 불을 켜고 읽는 대학생 등 잡지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일상의 양면성을 재기발랄하게 진술한다. 죽기 싫다고 몸부림치던 비누 ‘매끌이’가 사람들의 더러운 때를 벗겨줄 운명을 이를 악물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매끌이」 역시 현실 속에 놓인 ‘나’의 자아정체성을 되새기게 만드는 소설이다. 의인화로 참신한 현실 풍자를 이뤄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래지 않는 빛, 김승옥의 문학이 담긴 책 등단 이후,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해오던 김승옥은 광주 민주 항쟁 시절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이어 영화감독, 신앙 체험 등 소설가의 삶과 점점 멀어지던 중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2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 문학 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소설들을 남겼음에도, 이후 절필을 했기에 그는 ‘1960년대 작가’로 머물러 있다. 하지만 1995년에 김승옥 전집 출간,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김승옥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등 여전히 그의 작품은 현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승옥은 1960년대 작가가 아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현재’를 통찰한 ‘현재진행형 작가’다. 김승옥은 불편한 몸에도 이 책의 출간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는 미발표작인 「가짜와 진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표제를 『가짜와 진짜』로 정하기를 원했고, 의사소통이 쉽지 않으면서도 “1980년 초, 절필하기 직전 행복한 마음으로 집필한 작품들”이라며 22편 소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덕분에 이 책에는 김승옥이기에 가능했던 언어적 기교, 유쾌한 해학, 현시대에도 통용될 동질감이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다. 이전 세대의 독자들이 그랬듯, 오늘날의 독자들 역시 이 책을 통해 삶과 나, 사회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은은한 감동, 짜릿한 재미를 느끼며 한 장 한 장 김승옥의 짧은 소설을 읽는 맛에 푹 빠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