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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필사북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무진의 안개
김승옥
스타북스 2026.08.05.
베스트
한국소설 53위 소설/시/희곡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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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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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손끝에서 번지는 무진의 안개, 그리고 차가운 겨울의 감수성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力士)
건(乾)

저자 소개 1

KIM, SEUNG-OK,金承鈺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고,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에서 성장하였다.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4·19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승옥은 대학 재학 때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환상수첩」(1962), 「건」(1962),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고,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에서 성장하였다.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4·19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승옥은 대학 재학 때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환상수첩」(1962), 「건」(1962),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1963) 등의 단편을 동인지에 발표했다. 이후 「역사(力士)」(1964),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7) 등의 단편을 196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달빛 0장」(1977),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 등을 간헐적으로 발표하면서 절필하기 전까지 2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1980년 [동아일보]에 장편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가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에 창작 의욕을 상실하고 절필했다. 1999년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했지만, 2003년 오랜 친구인 소설가 이문구의 부고를 듣고 뇌졸중으로 교수직을 사임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으며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김승옥의 작품에 대해 “감수성의 혁명이다. 그는 우리의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뢰를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그는 「서울, 1964년 겨울」로 제10회 동인문학상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승옥의 소설은 대체로 개인의 꿈과 낭만을 용인하지 않는 관념체계, 사회조직, 일상성, 질서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 없는 윤리감각이라는 일상적인 질서로부터 일탈하려는 열망, 곧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김승옥 소설의 중심적이고 일관된 내용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소설은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현실을 압도하는바, 낭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환상수첩」, 「확인해 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생명연습」 등의 초기소설은 환각이나 환상을 쫓는 삶 혹은 현실을 초월한 삶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두드러진다. 「무진기행」 이후 현실의 엄정한 법칙성을 인정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며, 그의 후기소설은 초기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 대신에 꿈이나 환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환멸과 허무의지로 가득 찬다.

「서울 1964년 겨울」, 「야행」, 「차나 한잔」, 「염소는 힘이 세다」, 「1960년대식」 「서울 달빛 0장」 등 김승옥의 후기소설은 산업사회의 한 기호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실감을 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로스적 열정으로 기성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도를 담은 「보통여자」, 「강변부인」 등에서는 김승옥 소설이 지녔던 문제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김승옥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짝이는 빛의 내면과 동시에 속된 일상의 외관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빛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상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윤리와 무책임성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1960년대만 유효할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왜곡된 근대화의 모순 그리고 이에 대한 응전 방식으로 발화하는 새로운 엄숙주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좌초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승옥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순천문학관에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김승옥관이 마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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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594g | 153*224*30mm
ISBN13
9791157958030

책 속으로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裎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10킬로 남았군요.”
“예, 한 30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 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데드롱 직(織)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골 사람들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잔을 빼면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 상태 속에서 듣고 있었다. 버스 안의 좌석들은 많이 비어 있었다. 그 시찰원들의 말에 의하면 농번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할 틈이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중에서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있던 옛날 나는 왜 그렇게 분해서 못 견디어 했을까.
“무얼 생각하고 계세요?”
여자가 물어왔다.
“개구리 울음소리.”
대답하며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내리고 있는 안개에 가려서 별들이 흐릿하게 떠 보였다.
“어머, 개구리 울음소리. 정말예요 제겐 여태까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무진의 개구리는 밤 12시 이후에만 우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12시 이후에요?”
“네, 밤 12시가 넘으면 제가 방을 얻어 있는 주인댁 라디오 소리도 꺼지고 들리는 거라곤 개구리 울음소리뿐이거든요.”
“밤 12시가 넘도록 잠을 자지 않고 무얼 하시죠?”
“그냥 가끔 그렇게 잠이 오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마 그건 사실이리라.
---「밤에 만난 사람들」중에서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중에서

나는 이젠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다소 서글픈 기분으로 생각했다. 결국 그렇고 그렇다. 또 한 번 확인된 것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자, 그럼 다음에 또…….’라고 말할까, ‘재미있었습니다.’라고 말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술잔을 비운 안이 갑자기 한 손으로 내 한쪽 손을 살그머니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나는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안형은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한 얘기는 정말이었습니다.”
“난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는 붉어진 눈두덩을 안경 속에서 두어 번 끔벅거리고 나서 말했다. “난 우리 또래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면 꼭 꿈틀거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얘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얘기는 오 분도 안 돼서 끝나 버립니다.”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듯하기도 했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서울 1964년 겨울」중에서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시 고개를 들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 판매 외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 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환이 단무지와 파가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 나갔다.
---「서울 1964년 겨울」중에서

우리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서 거리로 나왔다. 적막한 거리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몹시 춥군요.”라고 사내는 우리를 염려한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추운데요. 빨리 여관으로 갑시다.” 안이 말했다.
“방을 한 사람씩 따로 잡을까요?” 여관에 들어갔을 때 안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게 좋겠지요?”
“모두 한 방에 드는 게 좋겠지요.”라고 나는 아저씨를 생각해서 말했다.
아저씨는 그저 우리 처분만 바란다는 듯한 태도로, 또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여관에 들어서자 우리는 모든 프로가 끝나 버린 극장에서 나오는 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북스럽기만 했다.
---「서울 1964년 겨울」중에서

그러자 방 밖에서 마루를 가볍게 걷는 소리가 나고 잠시 후에 피아노 소리가 쾅 울려왔다. 바로 방문의 밖인 듯싶었다.
피아노 소리라니, 이 빈민굴에. 아, 그러자 나는 생각났다. 네 시. 피아노 소리. 이 병원처럼 깨끗한 방. 나는 약 일주일 전에 창신동의 그 지저분한 방에서 이 깨끗한 양옥으로 하숙을 옮겼던 것이다.
들려오고 있는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내가 옮겨온 뒤의 약 일주일 동안 매일 오후 네 시에 피아노가 울렸고 그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였었다. 아마 내가 오기 전에도 네 시에 피아노가 울렸고 그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였었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았다.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기억의 단절이었다.
---「역사」중에서

서씨는 역사였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았다는 서씨의 얘기를 들었다.
그는 중국인 남자와 한국인 여자 사이에서 난 혼혈아였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중국에서 이름 있는 역사들이었다. 족보를 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수(將帥)가 있다고 했다. 그네들이 가졌던 힘,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였고, 유일한 유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무형의 재산은 가보로서 후손에게 전해졌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영광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서씨에 와서도 그 힘이 재산이 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그 힘은 서씨로 하여금 공사장에서 남보다 약간 더 많은 보수를 받게 하는 기능밖에 가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역사」중에서

저녁을 맞으면서 내 주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양옥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집집의 창마다 밝은 불이 켜져 있고 옛날의 그 마을에서와는 달리 조용하였고 향긋한 음식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나 자신이 이 평온한, 부자유하게 평온한 마을을 해방시켜 주러 온 악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어쩐지 그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혹은 그 빈민가가 파견한 척후인지도 몰라라고 나는 생각하며 나는 그 빈민가에 대하여 요 며칠 동안 지니고 있던 죄의식 비슷한 것이 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일종의 비겁한 보상 행위라고 누가 곁에서 말했다면 나는 정말 즐거워져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을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식구들은 밥상을 받아 놓은 채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중에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아버지는, 공비들이 산에서 겨울을 날 물자를 약탈하러 대담하게도 이 시까지 습격해 온 것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형은 하필 엊저녁에 습격 올 게 뭐냐고 불평이 대단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형은 벌써 몇 주일 전부터 자기 친구들과 함께 남해안으로 무전여행 떠날 계획을 세워 왔는데, 그날이 바로 출발 예정날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형의 불평은 당연한 것이었다. 형의 어둑신한 방에 우글우글 모여 앉아서 그들이 “오오, 빛나는 남해여!” 어쩌고 낯간지러운 몸짓들을 하면서 대단히 열심스런 태도로 계획을 짜 온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형, 정말 돈 한 푼 없이 여행하는 거야?”
하고 내가 물으면,
“그럼, 청년의 꿈은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는 거다. 그렇지만 너 같은 빼빼는 아무리 자라도 이런 일을 못 한다. 저 방에 가서 염소 그림이나 그리고 엎드려 있어. 어서 가.”
하며 나를 몰아내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쑤군쑤군하곤 했었다.
---「건」중에서

형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건너오자 아버지는 대뜸.
“너 이놈, 나하고 돈 벌러 가자.”
하고 말하더니 두말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는 것이었다. 형의 얼떨떨한 표정, 그리고 안질 때문에 새빨간 아버지의 눈에 그림자처럼 살짝 스치고 가던 미소. 아아, 나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한숨이 나오도록 유쾌했다. 아버지가 시체를 다루러 가는 모습이 몹시 우울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약간 하고 있던 나는 무거운 책임을 벗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지게에 괭이와 삽 등속을 지고 앞서 가고 내가 그 뒤를, 그리고 형과 형의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주절대며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황토가 햇볕에 반짝이는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형들의 높은 목소리들이 대기 속으로 멀리 메아리쳐 가고 있었다.
---「건」중에서

대문이 열리지 않자 집 안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끓어올랐다. 별로 높지 않은 흙담 위로 나는 올라갔다. 내가 기어 올라가는 서슬에 담 위의 기와가 몇 장 땅으로 떨어져서 깨어졌다. 나는 담 위에 마치 말 타듯 걸터앉아서 집 안을 내려다보았다. 황폐한 빈집을 초록색의 공기가 휩싸고 있었다. 마당가에 딸린 조그만 밭에는 누가 심었었는지 가지나무가 있고, 시들은 가지나뭇잎 밑에 누런색으로 찌그러든 가지가 몇 개씩 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것들은 정말 볼품없이 말라 있었다. 누가 빼갔는지 창에는 유리가 한 장도 없었다.

---「건」중에서

출판사 리뷰

왜 지금, 다시 ‘김승옥’이며 ‘필사’인가?

조선의 선비 다산 정약용은 “눈으로 백 번 읽는 것은 손으로 한 번 적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고, 이덕무는 “글이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한 번 써보는 것이 백배 낫다”고 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지금 당장 필사하라’고 했고, 안도현 시인은 ‘필사는 손가락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어보는 맛’이라 했다.

디지털 매체와 숏폼 콘텐츠가 범람하는 오늘날, 우리의 읽기 방식은 점점 더 얕고 빠르고 산만해지고 있다. 문장을 깊이 음미하고 행간의 의미를 돌아보는 감수성은 점차 마모되어 간다. 『무진기행 필사북』은 이러한 시대에 던지는 완만하지만 강렬한 아날로그적 반향이다. 김승옥은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이미 한국어 문장의 극치를 선보인 천재 작가다.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그는 우리의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뢰를 불어넣었다”고 평했듯, 김승옥의 문체는 이전의 한국 소설들이 지니고 있던 한문 투의 잔재나 비장한 계몽주의적 어조를 벗어나 지극히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세련됨을 자랑한다. 필사는 단순한 따라 쓰기가 아니다. 눈으로 볼 때는 스쳐 지나갔던 단어의 배치, 문장부호 하나에 담긴 쉼표의 호흡, 묘사와 서사의 절묘한 균형을 ‘손가락의 속도’로 재체험하는 일이다. 독자는 펜 끝을 통해 작가의 시선과 일치되는 경험을 하며, 눈으로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언어의 섬세한 결을 온몸으로 체화하게 된다.

1. 1960년대 ‘감수성의 혁명’과 한글 현대 문체의 오리지널리티

1960년대 한국 문학계에 김승옥이라는 청년 작가가 등장했을 때, 평단은 일제히 이를 두고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그 이전까지의 한국 소설들이 시대의 거대한 이념이나 무거운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다소 투박하고 도식적인 언어에 머물러 있었다면, 김승옥의 등장과 함께 한국 현대소설의 언어는 비로소 완전히 새로운 미학적 차원으로 도약했다. 그는 초·중·고등 교육을 오롯이 한글로 받은 최초의 ‘한글세대’ 작가로서, 한글이라는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이며 현대적인 문체를 비로소 창조해 낸 독보적 개척자였다.

김영하 작가는 한국어 문장의 가능성을 가장 넓게 확장한 작품으로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았다고 했고, 이동진 평론가는 문장의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인간 심리를 포착하는 섬세한 시선을 높이 평가하며, 한국소설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만나야 할 작품이라고 했다.

김승옥 문학의 핵심은 언어의 생동감에 있다. 명사와 형용사의 신선하고 예리한 결합, 주어와 서술어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단락 전체를 관통하는 쓸쓸하면서도 매혹적인 호흡은 기존의 관습적인 서사 틀을 완전히 깨트렸다. 김승옥의 문장은 단순히 서사를 전달하는 도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장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미학적 감각을 형성한다. 문단 내부에서 수많은 소설가와 창작자들이 그의 문장을 오랫동안 필사해 온 이유는 단순히 글씨를 연습하거나 문장 기교를 복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문장을 손끝으로 꾹꾹 눌러 써 내려가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단어를 고르고 배치할 때 느꼈을 그 짜릿한 ‘창작의 순간’과 심장 박동을 똑같이 공유하고 체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본 필사북은 이러한 김승옥 문학의 핵심을 독자가 온전히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문체의 현대화’를 완수해 낸 거장의 오리지널 텍스트를 마주하는 것은, 현대 한국어의 정수를 배우는 가장 확실하고 정통적인 길이다.

2. 왜 지금 김승옥을 ‘필사’해야 하는가: 가장 완벽하고 정중한 창작 수업

스마트폰과 디지털 스크린에 포위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독서는 날로 파편화되고 경박해지고 있다. 눈으로 빠르게 훑어 내려가는 독서는 손쉽고 경쾌하지만, 문장이 가진 깊은 울림이나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겨진 섬세한 조형미를 온전히 느끼기 전에 기억 속에서 쉽게 휘발되어 버린다. 이에 반해 ‘필사’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정중한 독서법이자, 대문장가와 1대1로 마주하는 밀착 과외 수업과도 같다.

컴퓨터 키보드 위에서 미끄러지듯 타이핑하는 시대에, 연필이나 펜을 쥐고 종이 위에 글을 써 나가는 물리적 행위는 인간의 뇌와 신체를 완전히 다른 미학적 주파수로 정렬시킨다. 펜촉이 종이를 사각거리며 그어 내려가는 소리,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펜의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조용한 공간을 채우는 스스로의 아늑한 숨소리는 독자의 의식을 깊은 몰입의 상태로 안내한다. 손끝의 속도가 작가의 생각 속도와 마침내 일치하는 순간, 눈으로 읽을 때는 결코 보이지 않던 문장의 세밀한 이음새가 비로소 눈앞에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왜 작가가 이 자리에 쉼표를 찍어 호흡을 조절했는지, 왜 더 흔하고 평범한 단어 대신 이토록 낯설고 서늘한 단어를 선택해 배치했는지, 단락과 단락 사이의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했는지 그 비밀이 온몸으로 깨달아진다. 필사는 단순한 글자 베끼기를 넘어, 작가의 뇌 속에서 일어난 창작의 사고 과정을 독자 자신의 몸으로 재현해 내는 가장 완벽한 창작 수업이다.

3. 교과서와 수능의 시험지를 넘어서: 박제된 고전의 생생한 부활

이 필사북에 수록된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力士)』, 『건(乾)』은 국어 교과서와 수능 시험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국 문학사의 불멸의 명작들이다. 하지만 시험 문제를 맞히기 위해 밑줄을 긋고, 주제와 출제의도를 암기하던 교과서 속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이 가진 생생한 감수성과 열정을 가둬두는 감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필사북을 펼쳐 드는 순간, 독자는 더 이상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문장을 토막 내 분석하는 수험생이 아니다. 반세기 전 청년 김승옥이 느꼈던 그 뜨겁고 시린 청춘의 감각과 현대 사회의 고독을 고스란히 이식받는 ‘동료 작가’이자 ‘진짜 독자’로 거듭나게 된다.
『무진기행』에서 안개가 도시를 덮어오는 몽환적이면서도 쓸쓸한 서정, 『서울 1964년 겨울』의 선술집에서 나누는 파편화된 대화 속 현대인의 극심한 고독, 『역사』에서 서민들의 삶을 포착해 내는 날카로운 시선, 『건』에서 표출되는 청년기의 서늘한 방황 등 김승옥의 소설들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은 전율을 선사한다. 차가운 시험지 분석을 깨끗이 잊고 펜 끝으로 문장을 짚어 나갈 때, 독자는 문학이 주는 순수한 감동과 예술적 충격을 온전히 회복하게 될 것이다.

4. 문단에서 전해지는 ‘『무진기행』을 필사하는 이유’

문장의 리듬을 몸으로 익힌다.
김승옥의 문장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숨 쉬듯 흘러간다. 눈으로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호흡이 손으로 따라 쓰는 순간 드러난다. 많은 작가가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공부”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불필요한 문장이 거의 없다.
『무진기행』은 짧은 단편이지만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문장 하나가 다음 문장을 끌고 가며, 단어 하나가 인물의 심리를 바꾸고, 풍경 하나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필사를 하다 보면 “왜 이 단어를 썼는가”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풍경과 심리가 하나가 되는 문장을 배운다.
안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무진의 안개는 곧 주인공의 마음이다. 이처럼 외부 풍경과 내면 심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방식은 지금도 많은 소설가가 배우고 싶어 하는 김승옥 문장의 핵심이다.

한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인지 깨닫는다.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이렇게도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많은 작가가 “문장이 막히면 다시 김승옥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들은 김승옥 작가를 “우리말에 새로운 감수성과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은 작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문장은 단순한 문체가 아니라 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속에서 완성되는 세상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예술품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퍼올린 언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외롭고 고된 작업이다. 문장이 막혀 답답함을 느끼거나, 나만의 고유한 문체를 갖추지 못해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드는 창작자에게 김승옥의 문장은 가장 단단하고 든든한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대문장가가 닦아놓은 단단한 길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동안, 독자의 어휘력은 깊어지고 문장을 구성하는 직관적인 미학적 감각은 몰라보게 단단해진다.

이 필사북은 단순히 작가의 글을 복사하는 빈 노트에 그치지 않는다. 위대한 문장가와 독자가 펜을 나누어 쥐고 함께 써 내려가는 아름다운 동행기이자, 먼지 쌓인 책장 속 소설을 삶의 영역으로 걸어 나오게 하는 생생한 의식이다. 수록된 4편의 단편 소설을 완필하고 나면, 책은 독자 자신의 필체와 온기, 그리고 시간이 아로새겨진 세상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문학적 예술품으로 재탄생한다.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펜을 들 때다. 무진으로 가는 버스 창가에 뿌옇게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독자의 손끝에서 눈부신 문학의 기적과 창작의 즐거움이 피어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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