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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누군가 말했다. 잘 웃는 사람은 상처가 많다고. 진심으로 상냥한 사람은 정말로 상처가 깊다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상처 입은 인간이 자기가 받은 이상으로 큰 상처를 수많은 사람에게 주고 살아왔다면, 과연 그 사람을 상냥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 상처를 핑계로, 정작 제일 소중한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하고, 속이고, 기만하고, 내쫓고, 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으로―엉금엉금 기어 나올 수밖에 없는 깊은 수렁으로 밀어뜨리는 인간. 그게 나다. 이것은, 그런 나의 이야기다. --- p.47~48
역사 선생은 죄인 보듯 나를 봤다. 내 자리를 지날 때나 계단에서 지나칠 때마다 곁눈으로 흘끗, 증오마저 느껴지는 시선으로 나를 봤다. “나 같은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야”라는 말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 p.79 아이들을 협박하는 일본인이나, 아이들이 희생돼도 변함없는 학교 인간들이나, 간단히 사람 목숨을 빼앗는 빌어먹을 김씨 독재자나, 전부 다 같이 엿이나 먹어라. (…) 난 결단코 외면하지 않을래. 모두를 다 적으로 돌린다 해도 외면하지 않을 거야. --- p.161 학교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안에 모순이 느껴져요. 조선학교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다니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였을까. 의문을 품은 인간은 묵묵히 떠날 수밖에 없는 걸까. --- p.162 우리의 시는 끝없이 늘어나리라. 그 어떤 변화가 찾아온다 해도, 우리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으리라. 두려워 마라. 이 세상은 교과서보다 예술로 가득하다. --- p.164 “응, 인간은 누구든 반드시 빛나. 누구보다 빛나는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 네게도. 그 순간은 와야만 하고. 네가 노력해서 만들어야 해. 또 그림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냐.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거기서 끝이야. 한번 도망치면 버릇이 돼서 앞으로 쭉 도망치게 될 거야.” --- p.176 어쩌면 난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누군가 날 용서해줄 날을. 무너지는 하늘을, 그것이 어떤 하늘이라 해도 허락하고 받아들일 날을. 괜찮아, 그걸로 됐어, 하고 누군가 인정해줄 날을 쭉 기다려왔던 건지도 모른다. --- p.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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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진 그때, 나는 하늘을 받아들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차별과 폭력, 잔혹한 세계에 직면한 십대 소녀의 절망과 분투 미국 오리건주 고등학교를 다니는 지니는 울고불고 소리쳐도 투명한 존재로 무시받는 같은 반 친구 존을 보고 ‘학교(세상)는 잔혹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홈스테이 주인이자 저명한 그림책 작가 스테퍼니는 청각 장애를 가진 친구 매기와 함께 유일하게 지니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인물. 스테퍼니는 “당장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다”는 지니에게 “그때는 하늘을 받아들이자”고 한다. 이 대화 끝에 무너지는 하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생의 톱니바퀴가 미쳐 돌아간 5년 전의 일”이 풀려 나온다. 일본 초등학교 6학년 식민지 시대 한반도 역사를 배운 날, 지니는 같은 반 친구에게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 바보 아냐? 조센진”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후 친한 친구들로부터도 서서히 따돌림을 당하다 조선학교 중등부에 입학한다. 조선말이 서툴고 외골수에 개성이 강한 지니는 단체 행동이 많고 일본어를 못 쓰게 하는 조선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교실 정면에 걸린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에 이상하고도 기분 나쁜 감정을 느낀다. 나는 초상화를 풍경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우익 자동차 앞에서 자, 뭐가 틀렸을까요? 틀린 걸 찾아보세요, 라고 했던 것처럼 초상화가 내게 뭔가 속삭이게 됐다. “이 풍경 속에는 틀린 것이 있지, 그게 뭔지 너희가 아느냐.” 김씨 부자가 그렇게 물었다. 81쪽 소설 중간중간에 이야기의 문맥에서 벗어나 ‘북조선에서 온 편지’가 끼어든다. 북한으로 간 외할아버지는 지니의 엄마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북한은) 아주 살기 좋은 나라”라고 쓰지만 두 번째 편지에는 “잊어다오. 이제 편지는 기다리지 마”라며 그곳에서의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암시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이복 이모가 보내온 편지에 외할아버지가 병원도 못 가보고 사망한 사연이 적혀 있어 ‘초상화의 나라’가 지닌 비참함이 드러난다. 한편 북한에 거액을 지불하고서야 수용소에 갇힌 가족이 일본으로 송환된다는 사실을 들은 지니는 ‘북조선에선 인간의 생명을 돈과 맞바꿀 수 있다…… 잘못됐다! (…) 교실에 있는 초상화는 잘못됐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차피 국경 같은 거 누군가의 낙서잖아. 왜 그따위 낙서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해” 고독한 혁명, 부조리한 학교와 사회, 국가에 홀로 맞서다 여름방학 마지막 날, 북한이 일본 해상을 향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교복인 치마저고리 대신 체육복을 입고 통학하라는 학교의 연락을 받지 못한 지니는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만원 전철에 오른다. 제때 전철에서 내리지 못해 학교로 가지 못하고 우연히 들른 쇼핑센터 지하에서, 자신들이 경찰이라는 세 중년 남성으로부터 “조센진은 더러운 생물”이라는 말과 함께 모욕적인 폭행과 성추행을 당한다. 커다란 충격에 휩싸인 지니는 등교를 거부하다 한참 시일이 지난 후 “나는 혁명가의 알”이라는 선언과 함께 학교로 향한다. 혁명―그 말을 머릿속에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온몸이 불타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펄펄 끓어오르는 마그마처럼 분화 직전의 기분이다. 나는 희열을 느꼈다. 135쪽 지니는 김씨 정권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선언문을 교내에 뿌리고 “북조선은― 김씨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살인자의 학생들이 아니다. 초상화는 지금 이 순간부로 배제한다. 북조선 국기를 탈환하라”고 외친 후 김씨 부자의 초상화를 끌어내려 교실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린다. 지니의 고독한 혁명은 지니가 ‘어떤 공간’(정신병동)에 수용되고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일본에도, 한국에도,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다. 하와이로, 미국 오리건주로 도망쳐 왔지만 역시 외톨이일 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계의 끝과도 같은 곳(미국 오리건주)에서 지니를 말없이 돌봐주던 홈스테이 주인 스테퍼니는 ‘도망칠 구멍 없는 과거가 들러붙어 있다’는 지니를 보듬어 휴식 없이 길었던 여행을 끝내도록 돕는다. “우리의 시는 끝없이 늘어나리라. 두려워 마라. 이 세상은 교과서보다 예술로 가득하다” 세계의 구원을 위한 투쟁과 혁명의 기록으로서의 문학 지니와 같은 재일 한인 3세에게 이 세계는 부조리만이 횡행하는 곳이다.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아이들을 협박하고 테러를 가하는 사람들, 누군가가 희생돼도 변함없이 교조적인 학교와 국가와 조직…… 그러나 지니는 이 세계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겠다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위는 어둠에 잠기고, 이 비참한 생은 희미한 소리도 없이 끝나리라고 생각한 와중에도, 노래하기를, 춤추기를, 환하게 웃기를 잊지 않았던 (…)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 음악이 멎는 일은 없으리라. 우리의 시는 끝없이 늘어나리라. (…) 두려워 마라. 이 세상은 교과서보다 예술로 가득하다. 164쪽 소설은 ‘시간의 조각’이라는 짧은 장에서 이 세계의 구원을 ‘우리의 시(詩)’에서 찾는다. 문학을 읽고 쓰고 만드는 일은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두려움 없는 행위일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작은 투쟁이자 혁명의 기록”(‘옮긴이의 말’)인 이 작품은 ‘혁명의 알’이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맑은 마음이 빚어낸 한 편의 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