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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통해 흐르는 단어의 순간
단어와 가까이 살아가는 소설가·시인·번역가 10인의 앤솔로지. 삶과 경험에서 존재한 단어를 들여다보며, 그에 엮인 마음과 이야기들을 전한다. 멈춘 듯 보이던 단어의 의미가 저마다의 서사를 따라 다시 흐르는 순간을 담은 책.
2026.01.30.
에세이 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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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종종|변심|실망|대화|주머니
황유원 초|고원|senescence|프리랜서|무소속 정용준 포옹|유령|산책|더듬다|겨울 임선우 쿠머스펙|토머슨|하지|본느|인간만두 권누리 니은|실내산책|요쿨Jokull|주인공|펀pun 김선형 Pang (n.)|Poignant (a.)|Bless (v.)|Iridescent (a.)|Reflection (n.) 김복희 빛|인형|문학|귀신|함께 유선혜 가름끈|명왕성|미색|빠삐용|것 정수윤 루루|루리|가차|게사니|유카르 김서해 겹소망|맞틈|도끼책|꿈펜티멘토| 흉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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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종종을 이럴 때에도 쓴다. 누군가에게 네 생각을 했다고 고백할 때. 그때 당신이 했던 말 종종 떠올렸어요. 가을에 우리 만났던 거 종종 생각했어요. 그런 말을 꺼낼 때 늘 마지막으로 하게 되는 말은 “좋았어요”라는 말이다. (……) 그 말까지 가기 위해 쓰는 종종은 좋은 계단이 된다. 종종이라는 계단이 없으면 바로 본심으로 추락할 것처럼, 그래서 무릎을 찧거나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가 상대방을 쳐버릴 것 같은 걱정이 들 때 종종은 나를 조심조심 걷게 만든다.
--- pp.11-12 「김화진, 종종」 중에서 내가 초를 좋아하는 것은 둥글고 은은하게 퍼지는 그 불빛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라는 단음절 한글 단어의 형상 때문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초’는 그 모양부터가 타오르는 촛불을 닮았다. --- p.31 「황유원, 초」 중에서 이상하지. 더는 붙을 수 없는데 더 붙으려고 하는 쪽이 있네. 비어 있는 공간도 틈도 없는데 더 파고드는 쪽이 있네. 몸이 문이라면 열고 들어갈 텐데……. 질긴 피부와 단단한 뼈에 한계를 느끼네. 나는 네가 아니고 너도 내가 아니라는 결국의 실감. 아무리 우리라고 우겨도, 하나처럼 붙어 있어도, ‘연결되었어’, ‘뒤섞였어’ 감탄사를 내뱉어도, 마침내 실감. ‘나는 나고 너는 너구나’ 그것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이는 울고 연인은 몸부림치고 친구는 고요히 등을 두드리네. 포옹했다가 떨어져야 하는 아침. 진동하는 지금. 끌어당기는 팔은 밀어내는 팔이 되고 인력은 척력이 되는 더럽게 서글픈 떨어짐과 헤어짐. --- p.54 「정용준, 포옹」 중에서 그 무렵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빵을 먹으면서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하루 중 반짝거리는 기쁨의 한 조각을 얻었기에 그 밖의 긴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 p.83 「임선우, 쿠머스펙」 중에서 이제는 애써 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상한 이 삶이 꽤 마음에 든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간절히 용기를 내야 하고, 집에서 책을 잃어버리는. 그리고 ‘마음에 든다’는 되뇜이 나를 조금 더 살 수 있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다. --- p.120 「권누리, 주인공」 중에서 어쩐지 pang은 내 안 어딘가에서, 가슴에서, 혹은 뱃속에서, 불시에 팡, 터지는 얼음 폭탄 같다. 움찔 소스라쳐 아연하는 사이, 수백만 조각으로 비산한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혈류에 침투해 온몸으로 퍼진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미소한 얼음 조각들이 흐느끼며 녹아내린다. --- p.130 「김선형, Pang (n.)」 중에서 빛이란 희망이 필요한 이의 발명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p.155 「김복희, 빛」 중에서 늘 다른 단어를 기다리는 것이 내 모습처럼 느껴져서. 영영 완성되지 않을 내 미래 같아서. 끝내 빈칸을 채우지 못해 일인분의 몫을 견디지 못하는 의존명사로 남을까 두려워서. --- p.198 「유선혜, 것」 중에서 루리를 발견했다. 루리의 빛도 닦기 나름. 나도 닦으면, 열심히 갈고닦으면, 빛이 날까, 반짝일까. 내가 앞으로 살면서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빛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책상 서랍 속에서라도, 빛이 날 수 있다면. --- p.207 「정수윤, 루리」 중에서 겹소원, 겹슬픔, 겹유감, 겹기억, 겹설렘, 겹기회, 겹행운.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자꾸만 잊게 되는 것, 꼭 바라는 것 앞에 겹을 붙이고 가만히 지켜본다. 그 모든 것에 해당하는 ‘소망’ 앞에 겹을 붙이고 분열하는 겹소망을 사람들에게 송부할 방법을 찾는다. --- p.229 「김서해, 겹소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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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앞에는 늘 커다란 괄호
알맞은 의미를 찾은 후에야 가능해지는 마음들 김화진 소설가는 다른 사람들이 [주머니]에 숨긴 건 알 수 없어도 주머니가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머니’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함께 고른 [실망]과 [변심] 모두 ‘사람을 궁금해하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다. 황유원 시인은 지속적인 고양감에 머물 수 있는 [고원]의 감각을 꿈꾸며 이를 삶과 시에 빗대는데(“고원에 올라 산책하면 어느 정도 높은 강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지속적인 고양감 속에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고원에서도 내려가야 하는 게 우리의 인생”), 만년필이라는 창을 들고 교정지로 돌진하는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소속란을 쓸 일이 있으면 맞닥뜨리게 되는 [무소속]이라는 감각 앞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연함과 쓸쓸함에 대해서도 현실감 있게 포착해낸다. 포개진 셔츠에서 [포옹]을 떠올린 정용준 소설가는 나와 너의 틈을 포옹으로 메우려는 시도에서 필연적으로 알게 될 서러움에 대해 알려준다. “더럽게 서글픈 떨어짐과 헤어짐”이 없느냐고 되묻는 장면에서 독자는 지금껏 안겨온·안아온 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고 “극도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임선우 작가는 [인간만두]라는 단어를 만들어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자신이 만두소가 되었다고 상상하면 누구나 ‘인간만두’가 될 수 있다. 주변을 성실히 살피는 태도의 [본느], 안녕을 기원하는 [하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분법적으로 구획되는 ‘쓸모’에 대해 생각하는 [토머슨]도 있다. 이십사절기 중에서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시기인 하지. (……) 낮과 밤이 공존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최대한 밝게 살았으면 해서. (……) 이 땅에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삶이 부디 하지와도 같기를 바란다. _임선우, 〈하지〉, 90~93쪽. 권누리 시인은 자신이 단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된 계기로 어릴 적 엄마와 했던 끝말잇기를 든다. 상대가 계속 단어를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며 지속하던 끝말잇기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얘기하면서, 자신이 말놀이[펀pun]라는 유산을 “꼭 쥔 채 성장했음을” 고백한다. 김선형 번역가는 자신을 “울창하고 낯선 텍스트의 숲 어귀에 서서 막막하게 안을 들여다보던 이방인”이었다고 말한다. 낯선 단어를 알아가는 일은 개인의 “역사, 차이와 기벽에 부딪혀” 이탈되고 일탈하는 일이라면서, 이는 여전히 생경하지만 때로는 “영롱하다고, 경이롭다고”, “꼭 나만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김복희 시인은 함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단어들을 골랐다.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빛]은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에 있는 “쫓아오는 햇빛”으로 옮아가고, 인간적인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생명 반응이 없는(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 [귀신]이나 [인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빛은 저만을 위한 것이 아니랍니다. (……) 당신도 저도 죽는 날까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빛과. _김복희, 〈빛〉, 158쪽. 어딘가 쓸쓸한 [명왕성]을 시로 쓰는 데는 포기했지만 여전히 어떤 비유로 명왕성을 이해하는 유선혜 시인은 자립하지 못하는 감각, 혼자서는 비어 있는 느낌으로 [것]에 대해 말하며, “끝내 빈칸을 채우지 못해 일인분의 몫을 견디지 못하는 의존명사로 남을까” 두려워서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고 자문한다. “미완성인 문장과 까마득한 괄호에 어울리는 의미” 발견하려고. 일본어, 북한어, 그리고 아리송한 요정의 주문 같은 단어를 보내온 정수윤 번역가는 [루리]라는 단어로 이름과 삶의 태도를 살핀다(“그러다가 루리를 발견했다. 루리의 빛도 닦기 나름. 나도 닦으면, 열심히 갈고닦으면, 빛이 날까, 반짝일까”). 김서해 소설가는 “슬픔을 말하는 단어가 있을 뿐 슬픈 단어는” 없다고 말하며, 어제 좌절해도 오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쥐여주기 위해 [흉충]이라는 말을 만든다. “하루 중 반짝거리는 기쁨의 한 조각을 얻었기에 그 밖의 긴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10명의 작가는 자신에게 흐르던 의미로 단어를 꿰어 보여준다. 이는 《나만 아는 단어》를 읽는 독자에게 송부하는 남김없이 아름다운 고백이다. 자기만의 ‘나만 아는 단어’를 쓰게 될 독자가 조심조심 걸을 수 있도록 “좋은 계단”을 놓아주는 마음이다. 작가들이 자신의 서사로 단어와 의미를 해체하고 실컷 헤집었듯 독자 역시 자신만이 지닌 ‘나만 아는 단어’ 안에서 입고 마시고 덮고 꿈꾸시기를. 희망이 필요하다면 발명하시기를(“빛은 희망이 필요한 이의 발명”) 위로가 필요하다면 꽉 안고 절대 놓지 마시기를(“안고 있는데 안고 싶다. 안겨 있는데 안겨 있고 싶다”). 차곡차곡 쌓아갈 ‘나만 아는 단어’를 갖고 새롭게 시작된 한 해를 풍요롭게 건너가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