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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얼음 녹이기
2부 그것 3부 클리셰를 지키고도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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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객석, 홀로 움직이는 실루엣. 수현은 어둠 속의 남자를 보고 마치 야행성 동물의 눈을 가진 것처럼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폈다. 자신의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그가 꽤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동시에 그에게서 풍기는 성급하고 맹목적인 청춘의 분위기를 발견했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묘한 기시감, 즐거운 긴장감, 아주 미약한 탈출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수현은 준비했던 말들을 까먹을까 봐 최대한 유성에게 눈길을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p.39 “작가로서 석수현에게 사랑이란 참 좋은 핑계예요. 뭐든 저질러 놓고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하면 수습이 돼요. 모든 사건의 실마리이자 복선, 모든 인물의 천성이자 근거. 하지만 사적인 차원에서 인간 석수현에게 사랑이란…… 존재감이 좀 없네요. 잘 모르겠어요.” --- p.40 “잠깐만요. 제가 오늘 늦어서 제목의 의미를 못 들었는데, 그것만 다시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아, 얼음 녹이기? 얼음 녹이면 물 되잖아요. 열을 가하면 분명히 뭔가 뜨거운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건데, 도리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리잖아요. 그런 억울함이 담긴 제목이에요.” --- p.54 “연습하러 가요?” “네, 얼음 녹이러 가요. 입에 다 처넣고 삼킬래요. 공연 꼭 보러 오세요. 꼭.” --- p.81 “신도 상처를 입나? 에로스는 몸에 화상이 있을까?” “그러게. 화살에 맞은 흉터도 있나? 자기 화살에 찔려서 프시케를 사랑하게 되는 거잖아.” “사랑과 욕망의 신은 상처투성이겠네.” 작게 하하 소리를 내며 웃은 유성이 태영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그딴 게 위로가 돼?” “그렇다고 한 적 없어.” “되게 안심한 것처럼 말하길래.” --- p.97 유성은 자신이 마땅히 주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다. 외면해 왔던 커다란 진실이 아영의 손에 의해 베일을 벗은 것처럼 느껴졌다. 책임이라는 과녁을 붕괴하는 주먹만 한 화살이었다. --- p.114 “왜 계속 사랑 얘기만 쓰세요?” 자주 받는 질문이라 놀랄 것도 없고 부끄러워질 필요도 없었지만 수현은 어쩐지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그는 쓸데없이 벽에 붙은 메뉴판을 쳐다보며 농담하듯 답했다. “사랑받고 싶어서요.” “사랑받고 싶으면 글이 그렇게 몇백 장씩 나와요?” --- p.166 그때 유성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저도 모르게 유심히 보았다. 여자는 양손으로 소설책을 쥐고 페이지 속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독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순수한 몰두의 이미지는 돌연 유성 앞에 하나의 별이 되어 빛을 발하며 낙하했다. 유성은 긴 꼬리를 그리며 사라지는 허상의 반짝임 안에서 아주 가늘고 느슨한 기회를 엿보았다. 생각을 전환할 기회. 경험을 재편집할 기회. 잊어버릴 기회. --- p.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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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하고, 쓰고, 느끼는 시간들 사이에서
사랑이 하나의 모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다 온갖 로맨스 클리셰 속에서도 설명되지 않는 사랑에 관하여 『얼음 녹이기』는 사랑을 쉽게 정의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는 세 청춘의 마음을 섬세하게 그려낸 로맨스 소설이다. 공연예술학부 3학년 유성은 기말 과제를 위해 현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준비하며 원작 소설가 수현을 찾아간다. 퀴어 로맨스를 꾸준히 써오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는 누구보다 사랑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쉽게 확신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가까워지고 싶은 충동, 타인에게 기대고 싶은 감각을 늘 조심스럽게 밀어둔다. 유성은 그런 수현에게 자꾸만 시선을 빼앗기고 낯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을 쉽게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오랫동안 유성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지켜온 친구 태영은 익숙하다고 믿었던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면서 처음 겪는 감정 앞에 놓인다. 유성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과 설명할 수 없는 독점욕, 뒤늦게 밀려오는 불안과 질투는 그를 낯선 방향으로 흔들어 놓는다. 작품은 유성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랑을 단순한 로맨스의 문법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는 마음, 곁에 머물고 싶은 감정,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세 사람의 감정을 단순한 관계 구도로 소비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랑을 쓰고 누군가는 사랑을 의심하고 누군가는 끝내 이름 붙이지 못한다. 그 마음들은 같은 모습으로 포개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 특히 작품 속에서 반복되는 ‘읽기’와 ‘해석하기’의 과정은 감정의 흐름과 맞물려 있다. 유성에게 수현의 소설은 과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문장을 읽고 장면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는 수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향해 쓰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간다. 유성과 태영이 대본을 해석하는 행위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읽어내는 일과 닮아 있다. 얼음은 녹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형태를 바꾸어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얼음 녹이기』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어떤 마음은 고백으로 이어지고, 어떤 마음은 끝내 설명되지 않은 채 머문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분명히 존재했던 감정으로 기억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