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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분들께 13
프롤로그 19 2019년 1월 - 3월 1. 다이칸(대한) 시작점 25 2019년 3월 - 5월 2. 슌분(춘분) 작은 복숭아 55 2019년 4월 3. 세메(청명) 삭제된 장면들 79 2019년 5월 - 6월 4. 코쿠우(곡우) 두 손 99 2019년 7월 - 8월 5. 타이쇼(대서) 쓰러짐 139 2019년 8월 - 9월 6. 쇼쇼(소서) 8월 25일 189 2019년 9월 7. 하쿠로(백로) 식물 목격자 231 2019년 10월 8. 칸로(한로) 밤의 정원 255 2019년 10월 9. 소코(상강) 부식 293 2019년 11월 10. 릿토(입동) 잡히는 317 2019년 12월 - 2020년 8월 11. 토오지(동지) 겨울어 337 2020년 9월 - 2021년 9월 11. 셋키(절기) 먹 405 2021년 가을 후기 : 나는 기억한다 423 식물 표본집 451 |
Kyo Macl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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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을 물려받고, 무엇을 앞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학자로서, 혼혈인으로서, 저는 계보를 상상하는 방식과 거기에 깃든 편협함을 결코 신뢰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를 우리라고 여기고, 어디부터를 ‘타자’로 분류하는지, 그런 경계에도 동의 하지 않았습니다. 북미에서는 DNA를 통해 과거와의 연결고리와 생물학적 기원,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욕망을 이해합니다. 기실 이 책을 움직이게 하는 힘 중 하나도 그런 욕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상상력은 더 커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혈연중심적 외국인 혐오, 식민주의, 파시즘의 흐름을 마주하며, 세상이 우리에게 더 큰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pp.14-15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틀림없이 그의 딸이었을 때, 나는 작은 흰색 종이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용 약관이 딸려 있는 DNA 키트였다. 거기엔 개인 정보보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은 당사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본인 또는 가족에 대한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될 수 있으며, 이는 당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019년 1월 말, 나는 플라스틱 튜브에 침을 뱉고 그것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 p.46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함축되는 애초의 수수께끼는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이후에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수수께끼는 더 넓게 퍼지고 더 뜨겁게 변화했다. 그의 이름은 더 많은 혼란과 단절, 비밀과 수치를 머금은 하나의 거대하고 부서진, 아름다운 가족 속으로 나를 던져놓았다. 가족의 비밀을 파헤쳐본 사람이라면 전혀 놀랍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거미가 수백 개의 알을 낳듯 비밀 하나가 또 다른 비밀들을 낳는 상황이, 한 개의 이름이 수없이 많은 이름들로 증식하는 방식이. --- p.133 어머니의 비밀을 다루는 이야기는 드물다. 나는 여성의 문란함에 따라붙는 고약한 도덕주의를 떼어내고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이 마음에 대해 더 알아내고 싶었다. 자라면서 보아온 옥죄인 마음이 아니라, 연인을 찾은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 p.150 엄마는 불완전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 기질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친 열기를 억누르지 않고 터뜨릴 줄 알았다. 외부에서 막아도, 내면에서 붙잡아도, 아픈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다. 엄마에겐 아주 뚜렷한 내면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백인들, 적어도 엄마보다 더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무시했다. 그들에게 엄마는 그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역할을 거부하는, “별난 사람”이었다. --- pp.177-178 어떤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올바른 질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로는 질문 하는 행위 자체가 문제였다. 엄마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을 나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질문을 해도 몇 가지 사실은 알아낼 수 있을지언정 이야기의 핵심에 가닿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 내 질문들은 나를 더 멀리 밀어냈다. 우리가 손익 계산을 따지는 불편한 역할 속에서 대화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 p.220 식물을 엉뚱한 자리에 심으면, 정원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사정없이 일러준다. 정원은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통제하려 드는 강박을 비웃고, 그 어떤 순진한 유토피아적 충동도 거꾸로 뒤엎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종이와 잉크로 좁아진 나의 길을 벗어나는 우회로였다.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위험이 닥쳐올 때, 검은 흙에 담근 손이 닻이 되어줄 수 있다. 비록 인생에서 이토록 서툴러본 적이 없을지라도, 이것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작업이다. 구멍 하나에 오래도록 물을 붓다 보면, 서사는 가라앉는다. --- p.228 부모님의 이야기를 식물의 시간으로 상상한다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단발적이고 모호한 존재인지, 인간 개개인의 활동이 얼마나 미미한 운명에 지나지 않는지,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나무들의 그림자 속으로 스러지고 속삭이는 풀밭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지,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이 광활한 세상의 이야기 속에 얼마나 옅은 흔적만을 남기는지. --- p.236 동화되는 것은 까다롭다. 눈에 띌 정도로 달라서 호감이 가고 흥미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이거나 괴롭힘을 “자초”할 만큼 너무 다르게 보이지는 말아야 한다. 가정 내에서는 반동화주의적이고 전통을 즐기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회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정치적·사회적으로 통합된 존재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 p.267 우리는 모두 후성유전적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내 친구 M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조상들의 “살아 있는 콜라주”다. 우리는 감지하기 어려운 유령 습관과 몸짓, 공포증, 결점, 재능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유전은 단순히 다음 세대를 불행한 결말로 이끌거나 또는 그런 틀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아니다. 과거는 우리 몸속에 남아 지속되지만, 우리는 동시에 각자 고유한 존재이며, 지금 세계의 적확하고 특별한 일부이기도 하다. --- p.279 영향의 친족성은 매일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유산에 대해 쓴다는 것은, 글쓰기 자체를 유산으로 말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고, 또 터무니없는 일이 된다. 글쓰기는 내게 자식으로서의 짐이다. 거대한 감사의 꽃다발과도 같은 무게로 들어야만 하는. --- p.391 어느 밤, 엄마는 침대에서 쉬다가 불쑥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냥 뚝딱 죽었으면 좋겠지. 그 발언과 돌발성이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 아니야, 엄마. 나는 말한다. 난 엄마를 사랑해. 팔을 휘젓고 허공을 때리는 엄마를 향해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마치 술 취한 신호병처럼 허공을 때리는 엄마. 나는 말하기를 멈춘다. 엄마의 팔도 멈추길 바라지만 오히려 갑자기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세게. 움켜쥔 손으로. 이제 엄마는 권투선수가 된다. 부드러움의 불씨를, 자기 그림자를 두들겨 없애는. --- pp.406-407 사랑하는 딸, 이야기를 하나 줄게. 우리 행성이 태어나기도 전에, 흙을 이루는 입자들은 우주의 먹빛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사랑하는 딸,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줄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잊은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 p.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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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을 넘어선 친족성, 유전을 넘어선 계승
인종과 이주, 전쟁과 동화, 그리고 제멋대로 흐르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 『바깥의 사랑들』은 작가 자신의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며 새로운 가족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어머니 아버지의 복잡하고 이상한 결혼생활을 되돌아보고 중년에 이른 혼혈 여성 작가로서 겪은 다양한 경험들을 혼란스러운 문화적 맥락에 위치시킨다. 전쟁을 경험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국제 기자 출신 아버지 마이클, 유럽인 백인 남성과 결혼했지만 고분고분한 일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한 어머니 마리코, 언제나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정체를 숨겨야 했던 유대인 정체성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생물학적 아버지 A. 이들은 작가를 낳고 기른 부모로서뿐 아니라 20세기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전쟁과 이주, 동화, 인종차별 등을 드러내주는 극적인 인물들이기도 하다. 쿄 매클리어가 파헤쳐 보여주는 부모 세대의 삶은 원래 태어난 곳에서 바다를 건너 이동하고 옮겨 심기고 번식하는 식물들의 삶과 닮았다. 식물들은 뻗고 구부러지고 기대고 얽히고 상처 입고 옹이를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작가는 식물 혹은 가드닝을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삼는다. 가드닝과 이야기 짓기는 뿌리 찾기라는 은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난다. 원제인 ‘Unearthing(파헤치다)’은 땅을 파헤치고, 식물을 심고 돌보는 행위와 작가 자신의 유전적 위치를 확인하는 일, 가족의 새로운 연대기를 구성하는 작업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바깥의 사랑들』은 작가의 유년 시절과 가족사를 회고하는 동시에 백인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험심 가득한 일본인 여성의 초상을 뒤쫓고(이 과정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 여성 오노 요코가 등장하기도 한다), 뒤늦게 알게 된 출생의 비밀 앞에 혼란스러워하는 작가의 현재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의 생애와 그 갈피갈피에 담겨 있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재구성하고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식민주의와 인종주의 등이 교차하고 중첩되는 과정을 성찰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관통하며 집필된 책이라 거리두기와 돌봄을 엮어 이야기의 시야를 확장하는 부분도 감동적이다. 풍부한 은유와 서사, 여러 문학과 예술 영역의 인용문과 정보가 가득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짧은 글의 연결과 반복을 통해 문학적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캐나다에서 ‘총독 논픽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캐나다 내셔널 베스트셀러’로 선정되는 등 화제에 오른 책이기도 하다. 최근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 김서해가 번역을 맡아 쿄 매클리어의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을 오롯이 전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