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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글 | 선禪의 매혹
제1장 선사들은 왜 이리 과격한가 아상我相의 동일자同一者와 무無의 심연深淵 01 자칫하면 사자에게 물리는 수가 있다! 02 백척간두 아래, 허무의 심연 03 정법안장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제2장 한 물건도 없는데, 부처는 어디 있는가 선禪의 시원始原과 여래장如來藏 01 홍인과 혜능, 3중의 단절 02 여래장과 청정법신 03 청정법신에서 똥 냄새가 진동한다! 제3장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겠다고? 즉심즉불卽心卽佛과 평상심平常心 01 즉심즉불의 두 마음 02 과거를 구원하는 법 03 평상심, 혹은 표면의 깊이 제4장 설법하는 고양이와 부처가 된 로봇 무정불성無情佛性과 잠재성의 바다 01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02 기왓장의 설법을 왜 그대는 듣지 못하는가 03 고양이의 불성, 로봇의 불성 제5장 말해보라, 목구멍과 입을 닫은 채! 불가능한 도道와 진정한 반복 01 침묵마저 상투구가 될 수 있으니 02 오르페우스와 불가능한 경전 03 진정 말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제6장 아니, 목불을 태워서 사리를 얻겠다고? 우주를 흔드는 웃음과 유머가 만드는 세상 01 목불을 태우고, 불상에 올라타다 02 농담관계와 회피관계 03 웃음을 모르는 자들을 조심하라! 제7장 손가락 하나로 세운 세계, 주장자가 집어삼키다 손가락 끝의 폭풍과 세계의 생멸 01 손가락을 세울 때마다 하나의 세계가 02 문학과 선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03 어느 세계에도 머물지 말고 손가락을 세우라 제8장 ‘있음’을 아는 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세계의 특이성과 존재자의 존재론 01 존재의미, 혹은 ‘있음’을 안다는 것 02 특이점의 존재론 03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려면 제9장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와 단 하나만 아는 바보 존재자 없는 존재와 존재 없는 존재자 01 이런 바보들! 이런 백치들! 02 백치 달마와 혜충의 무봉탑 03 백치와 바보는 어디서 만나는가 제10장 고고한 발밑이 한바탕 망신이지 순수의 궁지窮地와 무위자연無爲自然 01 순수의 빗자루가 쓸어버리는 것들 02 유위에 반하는 무위 03 묘봉정 아래의 무위자연 제11장 묘희세계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버려라! 무상한 견고함과 조화를 넘어선 조화 01 무너지기에 무너지지 않는 법신 02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어쨌다구? 03 고요한 세계와 소란스런 세계 제12장 귀향, 혹은 부모도 태어나기 전의 고향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고향의 지질학 01 고향을 잃은 자와 잃을 고향도 없는 자 02 지리학적 고향에서 지질학적 고향으로 03 본래면목, 부모 이전의 고향 제13장 병들지 않는 사람이 병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든 신체와 고통의 생리학 01 고통의 참을 수 없는 무의미 02 병, 내 몸에 날아든 날개의 씨앗 03 병들지 않는 자, 바꾸어가며 병드는 자 제14장 간택하지 않음 또한 하나의 간택인데… 분별 없는 윤리학, 차별 없는 존재론 01 지극한 도의 궁지 02 분별은 공동체를 잠식한다 03 존재론적 평등성 제15장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두인 하나와 ‘지금 여기’의 개체성 01 ‘하나’를 향한 의지들 02 ‘하나’를 찾는 아주 다른 길들이 있으니 03 지금 저 꽃 속에서 만법을 보라 제16장 부처를 만났을 때, 어떻게 죽여야 합니까 초월적超越的 경험과 초험적超驗的 경험 01 그런데, 부처를 만나야 부처를 죽이지 02 나를 죽이라며 머리를 내밀지만 03 부처를 만났다고 믿는 이들이여! 04 초월적 경험과 초험적 경험 05 초험적 경험과 선禪 |
이진경,본명 : 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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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임제 자신도 스승인 황벽黃檗(?~850)에게 불법을 묻다가 뺨을 맞길 세 번이나 거듭한 바 있다. 왜들 이러는 것일까?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과격하게 멱살을 잡고 죽여버리니 살려주니 하는 살벌한 언행을 하는 것일까? 정상좌에게 질문한 좌주나 흠산이나, 물었을 때는 이미 그 안에 나름의 답이나 견식을 갖고 있었던 셈인데, 질문으로 그게 드러나자마자 달려들어 박살을 내준 것이다.
그런 어설픈 식견이야말로 선하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고, 불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막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격한 행동이나 당혹스런 말을 통해 선사들이 겨냥하는 것은 앞에 있는 학인의 생각이나 견해를 깨부숴주는 것이다. _28쪽 아상이란 사실 얼마나 강고한가?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에도 의연히 살아남아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게 아상이다. 그러니 아무리 세심하게 설득하고, 아무리 진심으로 수긍해도 사라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는다. 선사들의 언행이 파격적일 뿐 아니라 저리 ‘과격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감각기관을, 신체 전체를 검은 당혹 속으로, 절벽 밑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강밀함 없이는 결코 깨부수어줄 수 없는 것이 아상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_40쪽 문제는 그래도 말하지 않고선 불법을 전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석가모니가 망설이다 세간으로 내려오는 것이 그렇듯이, 깨우친 분들의 자비심은 심지어 상대방의 근기나 상태에 맞추어 적절한 말을 구사하여 가르침을 펴고자 한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사용되는 모든 개념들은, 어떤 조건에서 무엇을 하고자 말했던 것일까를 보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다. 특정한 조건에서 행해진 언어적 방편이기에, 조건이 달라지면 맞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트집을 잡으려 맘 먹으면 어떤 개념도 자가당착에 빠지는 걸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는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말도 철저하게 그 연기적 조건에 따라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더없이 불교적인 것이다. _61쪽 평상심은 그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을 ‘당당하게’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다. 그건 애증과 탐진의 마음에 물들어 잔물결 하나에도 쉽사리 끌려다니고 끄달리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평상심으로 산다 함은 물결과 파도를 피해 물속으로 숨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끌려다니는 것도 아니다. 따라가되 끌려다니지 않고, 타고 가되 부대끼지 않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하는 것이기에 무위라 한다. 그건 차라리 마음의 물결을 타고 다니며 그것을 부리는 것이다. 흔들림 없이 고요한 곳을 찾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 고요한 것이다. 없는 것을 얻고자 애쓰지도 않고, 있는 것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 오면 오는 대로 맞아주고 가면 가는 대로 놓아두면서 매 순간의 삶에 충실한 것, 그게 평상심이란 말로 마조가 가르치려 한 것일 게다. _93쪽 밥을 먹으며 아침에 싸운 친구를 떠올리거나 자려고 누워서 다음 달 있을 시험 걱정을 하는 것은 아직 불성이 제대로 작용한 게 아니다. 아직 충분히 밥 먹는 것이 아니고, 아직 충분히 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다가든 밥 먹을 땐 전적으로 밥 먹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 잠잘 때는 이전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전적으로 잠자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제대로 된 불성의 작용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마조나 그 제자들이 ‘평상심’이라고 한 것과 불성이 아주 비슷함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들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잤다”는 얘기를 평상심으로서의 도를 가르치기 위해 반복하지 않았던가! _117쪽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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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바라본 매혹적인 선禪의 세계
지은이 이진경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글쓰기란 자신을 매혹시켰던 알 수 없는 힘에 대해 쓰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쓰면서 조금이나마 그 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벽암록≫으로 촉발된 지은이의 호기심은 다양한 선어록을 접하며 철학하는 길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쉽게 떨칠 수 없다. 강하게 휘말려들 정도로 매력적인 선禪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지은이는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이 ‘경악스런’ 사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그건 이 세상을 철학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인연되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고, 쓸 수 없었던 것을 쓰게 되는 일. 그것은 오늘의 내가 어제와는 다른 나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과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경악스런’ 사건, 동시에 너무나 매혹적인 사건인 것이다. 막연한 정답찾기에 빠진 세상에서 나만의 답을 구하는 경험 “나는 여전히 내가 가진 식견을 알아보고 깨어줄 분을 만나기를 바라지만, 보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던지는 저 ‘일반적인’ 방할에서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것은 그분들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말들이다. 아니, 나도 하려고만 하면 누구에게든 해줄 수 있는 말이다. 이는 선이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 아닐까. 공안으로 전해오는 선사들의 언행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타당한 ‘일반적인 가르침’의 말씀이 아니다. 만나는 학인들의 그때마다 다른 상태를 포착하여 그의 식견을 깨주기에 적합한 언행을 날리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때문에 선사들의 질문, 이를 테면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하는 말에 상반되는 답이 나온다고 말한다. “똑같은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때론 미혹이 되다가 때론 깨달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던지는 항상 올바른 대답은 누구의 식견도 깨주지 못한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이 했던 말조차 ‘사구死句’라는 생각에 뒤엎고 깨부수고 하지 않았던가.” 부처가 말하는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 당신이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가 철학자 이진경이 깨달은 것은 선禪의 언행이 당송 시대의 케케묵은 화석이 아니라 지금 21세기 연기적 조건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작동하게 되는 위대한 경험이다. 각자 처해 있는 조건에서 각자의 언어와 섞여 새로운 언행을 만들며 재탄생하는 엄청난 경험이다. 그러한 경험으로 우리의 세상이 좀 더 평온하고 즐거운 것이 되었으면 하는 지식인의 원願이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정답 같은 행복을 찾기보다는 자신을 바로 보고 세상을 바로 보자는 따뜻한 손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