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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1. 실재 2. 서쪽으로 3. 경제 4. 버려진 마을 5. 저녁의 나머지 반 6. 아슈하바트의 개 7. 마지막 유대인 8. 위로자 9. 깨진 질그릇 10. 차가운 재 11. 우이씨! 12. 쿠르칸 13. 아타만 14. 행운을 시험하다 15. 이름의 이면 16. 비탈리 17. 거듭난 영혼 18. 심판 19. 익명 20. 그리고 여섯밖에 남지 않았다 21. 레아 22. 흙 23. 신학 논쟁 24. 그리고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25. 굶주림 겨울 26. 좀비들 27. 만물은 거칠게 들끓는 파도에서 솟아나고 28.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다 29. 쉼 없는 다리 30. 아톰 31. 아말렉이 한 짓을 잊지 마라 32. 아크무하메트 쿠르반킬리예프 33.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에요 34. 수탉 35. 그를 돌려주세요 36. 안식일 37. 닭구이 38. 눈과 얼음 봄 39. 소년 모세 |
Tommy Wieri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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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어느 철학자는 이름이 실재의 객(客)이라고 했다. 폰투스 베그는 그 철학을 몸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그는 객이요, 그의 몸뚱이는 실재였다. 이제 주인장은 객을 내쫓을 태세였다. 날은 짧아지고 생은 꺾인다. 밤이면 사나운 비가 들판에 한참 퍼부었다. 베그는 창가에 서서 폭우를 바라보았다. 저만치서 번갯불이 번쩍했다. 밤하늘이 그물 모양으로 쩍 갈라졌다. 따뜻한 발과 싸늘한 발로 리놀륨 바닥에 서 있던 베그는 잠을 다시 청하려면 술이라도 한잔해야겠거니 생각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잠이란 놈은 고약한 배신자처럼 군다. --- p.12
스텝 위 하늘이 우지끈거렸다. 사람들 한 무리가 폭풍을 피하려고 야트막한 모래 언덕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이 걸친 옷은 흠뻑 젖었고 몸뚱이는 뼛속까지 얼어붙었다. 그들은 해가 다시 나오기만 바라며 셀 수 없이 수많은 밤을 하늘의 분노를 피하고 싶은 최초의 인간들처럼 숨어 지냈다. 그러나 밤은 끝나지 않았다. 어둠이 우주의 가두리까지 뻗어나가고 지구는 이제 돌지 않으니 새벽은 다시 없으리라.남자 다섯 명, 여자 한 명, 아이 한 명. 그들은 딱히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해바라기가 태양을 좇듯 매일매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숨을 쉬듯 발길을 옮겼다. --- p.17 베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유대인이 다른 유대인의 죽음을 희소식처럼 여기게 됐을까 궁금했다. 세상에는 놀랄 일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마지막 남은 유대인이오. 그리고 나도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소.” 베그는 손끝으로 있지도 않은 빵 부스러기를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어째서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바로 숨통을 끊어준 자비로운 의사 한 사람이 없었을꼬? 내가 뭐라고 영원하신 분이 내게 이런 것을 바라신담? 누가 나를 위해 카디시를 읊어줄꼬? 누가 나를 기억해줄꼬?” --- p.65 키다리가 깨어보니 조용하고 환한 달밤이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무엇 때문에 깬 거지? 머리를 받쳤던 비닐을 치워보았다. 흙에서 비 냄새가 났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뼛속까지 시리게 추웠다. 흑인은 늘 그렇듯 풀을 깔고 누워 있었다. 키다리가 이슬받이에 가보았다. 검은 물 속에 하얀 달이 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한쪽 귀퉁이에서 막대기를 빼냈다. 물이 한쪽으로 흘렀다. 그쪽에 입을 대고 시원하고 단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 p.88 차 안에서 열두 시간만 버티면 될 거라고 했다. 이따금 누군가의 손목시계 숫자판이 희미하게 빛을 뿜었다. 그들은 어둠 속의 열두 시간이 얼마나 긴지 몰랐다. 끝나지 않는, 잠 없는 밤. 그 안에서 듣는 시계 초침 소리는 밖에서 듣던 소리와 전혀 달랐다! 시곗바늘은 끈끈이에 들러붙은 파리들처럼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소년은 몇 번이나 오줌을 쌀 것 같았지만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요의(尿意)가 가라앉았다. 소년은 뻣뻣해진 다리를 풀면서 자기처럼 화물 받침대에 기대어 앉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했다. 불안정하고 가냘픈 그림자들. 소년은 다른 사람들을 몰랐다. 부부인지 모를 남녀 한 쌍이 있고 나머지는 다 혼자 온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p.123 베그는 리브카와 장미 노래 얘기를 꺼냈다. “나 가끔 이 노래 불러. 웃기지? 이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더라고. 누나는 기억나?” 누나의 웃음소리가 반가웠다. “그 노래 잊고 산 지 오래됐는데.” “얼마 전에 이 노래가 무슨 뜻인지 알았어. 누가 사랑 노래라고 가르쳐줬거든. 엄마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알고 우리한테 불러줬을까? 누나는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누나는 그런 거 기억 잘하잖아. 유대인들이 부르는 노래야.” “이디시 어야. 그래, 엄마가 불러줬지.” “엄마가 어디서 유대 노래를 배웠을까 궁금하더라고.” --- p.135 그 신고 전화는 이른 저녁에 왔다. 어떤 여자가 부랑자들이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엎고 다닌다고 신고한 것이다. 저녁 8시경에 두 번째 신고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어떤 여자가 울면서 무서워 죽겠다고 했다. “시체들 같았어요.” 그녀는 부랑자들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 p.222 사내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흑인이 살해당하고 나서부터 소년이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그 아이는 꿈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봤죠. 여자는 그가 보낸 꿈이라고 했어요. 여자가 해몽을 하더군요. 소년이 꿈 얘기를 하면 여자가 그 뜻을 풀어냈죠.” “누가 꿈을 보냈다고?” 남자가 인상을 썼다. “아프리카요. 달리 누가 있습니까? 그가 꿈을 보내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줬어요. 맹세컨대, 우리는 그가 가르쳐준 방향으로만 쭉 걸어왔어요.” --- p.312 “그게 다예요?” “아니, 안됐지만. 만만한 일이 아니야. 넌 히브리 어를 배워야 해. 말도 할 줄 모르는데 이스라엘에 어떻게 가겠어. 자칫하면 쫓겨날지도 몰라……. 내가 너한테 가르칠 거지만 쉬운 일은 아냐. 하지만 내 머리는 닳아빠졌어도 네 머리는 쌩쌩하잖아? 그러니 내가 하나만 가르쳐도 너는 열을 알 거다.” 베그는 눈을 실처럼 가늘게 떴다. “너는 훌륭한 유대인이 될 거다, 사이드 미르자. 넌 이미 광야를 건너왔지. 누구보다 그 세상을 잘 알 거야.” --- p.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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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링하의 이번 작품의 주제가 언뜻 보기에는 한국 사회와 무관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비링하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갖는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50이 넘도록 몰랐던 자신의 피에 유대계의 피가 섞였다는 것이 사실 대단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지만, 그 유대인이 갖는 특권을 아직 어린 친구에게 부여함으로써, 혈통적 정체성이라는 것의 특성(혹은 특권)이 별거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유대계 혈통의 특권이 아직 미래가 많이 남은 젊은 친구의 생존이라는 보편성보다 앞서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단일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또한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점증하는 난민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다. 작품의 한 중요한 축을 난민들의 입장에 둠으로써,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갖고 있는 난민들에 대한 선입견에 대하여 소수자인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사실 익숙한 자기 나라를 떠나 낯선 나라에 가서 살고자하는 난민들은 얼마나 두려울까! 지저분하고, 어쩌면 가끔 도둑질도 하고 있는 그들, 난민들의 처지를 안정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이해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빌어본다. 네덜란드 문학재단(The Dutch Foundation for Literature)의 번역 지원 작품 이 책의 저자 토미 비링하는 네덜란드 최고 권위의 리브리스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해서 네덜란드 문학재단은 번역비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